오후 네 시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남주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당신은 어떤 걸 상상했지? 여긴 연극 무대가 아니잖아!
끝내고 싶다고 해서 막만 내리면 되는 줄 알아?

게다가 연극이 그렇게 지독했던 건 바로 당신 탓이야!

나 역시 무기력하고 못난 인간이야.

사람은 자기 안에 정체되어 있는 커다란 덩어리를 갖고 있지.

삶에 대해 적극적인 자세를 잃고 체념하는 순간 그게 밖으로 나오는 거야.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의 희생물일 뿐이야.」 



 

        목차가 없다. 지난번 읽었던 같은 작가의 책 『이토록 아름다운 세살』에서와 마찬가지였다. 목차가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목차의 역할은 책의 소제목들을 일관된 논리를 가지고 배열하는 것이다. 그리고 책의 소제목들의 역할은 독자가 책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을 대비해 ‘여기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하고 전체와 부분의 연관성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목차가 없는 이 책의 저자는 무슨 생각으로 소제목을 하나도 정하지 않았을까? 단지 글이 짧기 때문일까? 어쩌면 ‘나는 그런 목차 없이도 전체 이야기의 긴장감을 떨어뜨리지 않고, 독자의 흥미도 계속 고조시키면서 끝까지 이야기를 진행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은 아닐까? 사실이 그러했으니 뭐라고 더 말 할 수도 없고..

 

        고등학교 교사를 은퇴한 후, 한적한 시골로 부인과 함께 이사를 온 에밀. 일주일 후 이웃집에 사는 베르나르댕이라는 사람이 찾아온다. 단순한 이웃집 사람의 사교성 방문으로 알았지만, 실수였다. 그의 방문은 매일 오후 네 시면 거르지 않고 이루어진다. 더구나 그는 방문을 해 놓고도 아무런 말도 않는다. 아무리 많은 질문을 해도 딱 두 마디, Yes와 No로 대답할 뿐이다. 이런 이상한 방문자가 있는가.

 

        에밀은 처음에는 흥미로운 시선으로 이 방문자를 바라보지만,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그의 방문은 괴로움으로 다가온다. 어느 누가 매일 오후 일정한 시간에 찾아와서는 커피 한 잔을 당당히 요구하며 두 시간 동안 그저 ‘앉아 있다가’ 가는 방문자를 환영하겠는가. 더구나 그는 무뚝뚝하고, 무례하며, 오만했다.

 

        무려 2개월이나 매일 오후 불청객을 맞이해야 했던 에밀은 결국 찾아온 그에게 욕을 퍼부으며 쫓아내고 만다. 하지만 남는 건 감정을 절제하지 못했다는 씁쓸함 뿐. 여기서 처음으로 베르나르댕이라는 인물이 불쌍하게 느껴진다. 이전에는 독자 역시 에밀의 시각에 따라 그가 고집스럽고 오만한 불청객으로 느껴졌지만, 에밀의 분노의 폭발은 독자와 에밀 사이의 거리를 약간 벌려놓는 대신, 베르나르댕과의 거리를 좁혀놓는다. 왜 그는 그런 성격의 사람이 되었을까? 저자는 책이 끝나는 순간까지 그 이유를 밝히지 않는다. 독자는 단지 상상만 할 수 있을 뿐.

 

        그 후로 얼마간, 해방의 기쁨도 잠시였다. 에밀의 아내 쥘리에트는 베르나르댕과 그의 아내 베르나데트에게 동정과도 비슷한 감정을 품게 되었고, 에밀과 쥘리에트 사이에는 미묘한 냉기류가 흐른다. 그러던 중 베르나르댕의 자살미수 사건이 일어나고, 에밀이 이를 극적으로 발견해서 그를 구조한다. 하지만 그 후에도 베르나르댕의 태도에는 전혀 변화가 없고, 에밀은 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최후의 결정은...

 

 

       책은 처음부터 에밀의 심리를 따라간다. 1인칭 관점의 소설이다. 하지만 이 소설이 1인칭 관찰자인지, 1인칭 주인공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강조점이 크게 달라진다.

        아무런 즐거움과 기쁨도 없이 단조롭고 지루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베르나르댕의 모습을 보면서, 희망과 의지, 꿈을 잃는다는 것이 얼마나 (자신에게나 주의 사람들에게)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오는지, 심지어 (역사 자신에게나 주위 사람들에게) 위험하기까지 한 모습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해 보게 되기도 했고, 문제에 닥쳤을 때 대처하는 에밀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그의 모습이 나에게는 없는가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그밖에도 책에는 저자가 남겨놓은 여러 가지 암시적인 단서들이 있어서 읽고 난 뒤에 한참 생각해 보아야 할 책인 듯싶다.

 

        실망을 주지 않는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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