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한 기독교
케빈 드영 지음, 홍종락 옮김 / 템북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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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 전도할 때 사용하는 간략화된 “복음 소개 책자”와는 달리, 이제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하면 수많은 요구들을 맞닥뜨리게 된다.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봉사를 하는 것을 넘어, 기독교인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의 목록은 계속 늘어난다. 물론 때로 그런 요구들 중 어떤 것은 별 필요가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또 중요한 게 분명해 보이기도 하니까.


문제는 우리가 이 많은 요구들을 “제대로” 해 낼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완벽주의적 목표를 세우면 세울수록, 우리는 더 자주, 더 크게 실패하고 만다. 그리고 이런 실패의 경험이 반복되다보면 자연스럽게 신앙적 패배주의에 젖어들게 된다. 이 패배주의에는 여러 별명들도 붙기도 하는데, 현실은 어쩔 수 없다는 식의 현실주의나 모든 인간은 죄 아래 있어서 스스로 뭔가 이룰 수 없다는, 좀 더 영적으로 보이는 변명이 사용되기도 한다.


이 책의 저자는 이런 태도가 결코 옳지 않다는 점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리스도인은 죽어라 애쓰다가 결국 실패를 맞닥뜨리고 좌절하는 삶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다. 물론 제자의 삶은 고난을 동반하지만, 패배주의와는 분명 다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명령(그분의 말씀을 지키고 따르라는)을 하시는 분일 리 없지 않은가.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이 패배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한 몇 가지 지침을 제시하기 이전에 일부의 우려에 대한 단서조항을 붙인다.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은 믿음이 아닌 행위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 지금 말하고자 하는 건 구원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구원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 관한 내용이니까.


저자가 강조하는 지점은 그리스도인들이 수많은 “영적 요구”를 만족시키는 자리로 부름을 받은 게 아니라는 것이다. 다분히 이는 교회 내에서 특정한 사역을 강조하기 위한 과장된 수사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예를 들면 선교는 중요하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당장 타문화권의 사람들을 만나서 무엇인가를 하거나, 그렇게 앞장서는 사람들을 후원해야만 하는 게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복음 전도가 신실한 기독교를 규정하는 유일한 특징이 되는 것을 의도하지 않으셨다.”


목회자들은 자주 자신들도 미치지 못하는 이상적인 이야기를 떠들 때가 있다. 자신 또한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고백을 더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교인들의 어깨에 더 무거운 영적 짐을 올려두어도 괜찮은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성경은 시간을 내는 헌신보다 성품을 강조한다.”


또한 우리는 불필요한 죄책감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에 대한 과도한 책임을 지우는 것이 진보적인 생각인 것처럼 유행하지만, 성경은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죄책감을 부여하지 않는다. “사도들은 십자가 처형 당시 예루살렘에 있던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특별한 책임이 있다고 여겼지만, 그 책임은 모든 고위직 관리나 모든 유대인, 또는 이후 예루살렘에서 살게 되는 모든 사람에게 확대되지 않았다.”






기독교는 우리에게 불가능한 목표를 제시하고 지쳐 쓰러질 때까지 재촉하는 종교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명령에 순종하면서 매일 그것을 성취할 수 있고, 그 성취의 결과를 맛보며 살 수도 있다. 물론 우리의 성취가 완벽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녀의 성취물이 예술가들의 그것에 미치지 못한다고 무시하거나 불쾌해하는 부모는 없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우리 죄에서 구원하실 만큼은 강하지만 죄로 물든 우리 삶을 변화시키기에는 부족한 반쪽짜리 구세주가 아니”라는 저자의 말은 기억해 둘만한 문장이다. 모든 좋은 것들을 다 같다 붙인다고 해서 그 결과물이 좋다는 보장은 없지만, 아쉽게도 교회 안에서는 이런 일들이 종종 일어나는 것 같다.


책 말미에, 바울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축복하고, 격려하며, 그들의 성취를 칭찬했는지를 길게 설명하는 부분이 나온다. 분명 지나치게 현실주의, 패배주의에 젖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본문일 것이다. 물론 이 내용은 긍정의 힘 식의 사이비 번영신학과는 분명 다르니 오해하지 말자.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가능하다는 주장과, 말씀 따위는 내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주장 사이에는 하늘과 땅 만큼의 간격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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