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력과 은총 채석장 시리즈
시몬 베유 지음, 윤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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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손에 든 동기가 독특하다. 최근에 읽었던 두 권에서 저자의 이름이 언급되었기 때문인데, 하나는 수학철학에 관한 책(참회의 수학)이고, 다른 하나는 중요한 기독교 인물 열전(루미나리스)이었다. 덕분에 시몬 베유라는 인물에게 관심이 생겼고, 책을 검색하던 중 제목이 흥미로운 이게 걸렸다.


프랑스 출생의 유대인이었던 시몬 베유는 흥미로운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스물두 살에 철학교수자격시험에 합격했지만, 이후 노동운동에 뛰어들어 몇 달 간 공장노동을 하기도 했고, 이후 스페인 내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1938년 조지 허버트의 시를 읽던 중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사로잡는 경험을 하고, 신앙과 관련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로완 윌리엄스에 따르면 그녀가 겨우 서른네 살에 세상을 떠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동료 프랑스인 중 가장 가난한 사람보다 더 먹을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단한 고집이다. 비슷한 이유로 베유는 자신이 기독교(가톨릭) 세례를 받는다면 기독교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배제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이유로 끝까지 세례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생전 세 권의 책을 썼고, 나머지는 사후 그녀가 남긴 글들을 모아서 엮은 것이라고 한다. 이 책 역시 시몬 베유가 남긴 여러 단편적인 글들을 모아 엮어 낸 책인 듯하다. 책 제목이 “중력과 은총”이다. 이 무슨 흥미로운 조합일까.


중력과 은총은 이 책에 실려 있는 문장들을 관통하는 중요한 두 개의 주제다. 중력은 물리적인 힘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인간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 무엇, 인간 존재의 한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은총은 반대로 그런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게 해 주는, 신적 차원의 도움, 혹은 경험을 가리킨다.


저자는 당연히 중력에 매인 삶보다 은총을 받는 삶을 우위에 놓는다. 하지만 우리를 땅으로 붙잡아두는 중력의 힘은 너무나 강하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중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저자는 자기 힘을 다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만을 따라가지 않는 삶을 강조한다. 그렇게 자기를 비울 때 은총의 자리가 생긴다는 것.





사실 책 전체가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긴밀하게 짜인 게 아니라, 이곳저곳에서 가져온 짧은 구절들을 모아놓은 식이라, 단편적인 생각밖에 읽을 수가 없다. 또, 이 문장이 반어법인지, 유머인지, 아니면 그저 좀 극단적인 표현인지 파악하려면 눈을 부릅뜨고 글을 읽어야 한다. 콘텍스트 없는 콘텐츠만큼 읽기 어려운 것도 없는데, 물론 편집자가 잘 뽑아 정리해놓긴 했지만 어려운 부분은 어쩔 수 없다.


책의 성격이 독특하다. 확실히 기본적으로 철학책이지만, 신학책처럼 보이기도 한다. 시몬 베유의 사유에는 기독교 신학의 요소와 철학이 굳이 분리되지 않았던 것 같다. 중세의 학자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베유의 신학적 사유나 통찰에 그리 매력을 느꼈던 것은 아니다. 신비주의적 글들에 내가 별 관심이 없기도 하고, (책의 주제는 정반대의 주장을 담고 있으면서도) 글 전반에서 여전히 신비를 합리적으로 설명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근대성의 얄팍한 자국이 느껴지기도 해서다.


조금은 독특한 느낌의 철학책이다. 저자의 기독교 신학의 탁월성 보다는,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자신의 주된 작업인 철학을 해 나가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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