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 티처 - 제25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서수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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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월급을 타서 내가 먼저 한 일은 여권을 만들고 옷을 산 거였다. 전자는 월급을 차곡차곡 모아서 세계 여행을 가리라는 헛된 다짐의 결과였고 후자는 약간의 강요로 인한 일이었다. 품위 있게 옷을 입어야 한다고 그래야지 신뢰감을 줄 수 있다는 소리를 날이면 날마다 들어야 했다. 90만 원을 월급으로 받았다. 정말 작고 소중한 내 월급. 너무너무 작고 소중해서 어떻게 귀여워해주어야 할지 난감한 금액.


한 달 교통비만 해도 20만 원이 넘게 들었다. 왜 나는 그렇게도 멀리 일을 다녔던가. 경험과 연륜이 없는 대신에 열정과 패기만 넘치던 시절의 일이었다. 일하는 곳으로 가려면 옷 가게를 지나야 했다. 마네킹이 입고 있는 옷. 예쁘고 알록달록한 옷. 작고 소중한 월급 님을 들고 갔다. 정장 투피스, 정장 바지, 블라우스 등 입으면 격식 있어 보이고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옷으로 골랐다. 30만 원님 로그 아웃.


서수진의 장편 소설 『코리안 티처』의 첫 부분인 봄 학기에는 면접에 통과해 한국어 학당으로 출근하게 된 선이의 이야기가 나온다. 선이는 합격 문자를 받고 80만 원짜리 핸드메이드 코트를 산다. 대학생처럼 보이지 않고 누가 봐도 '강사'로서 보일만한 옷으로 고른 거였다. 봄인데 눈이 내렸고 코트가 젖을까 걱정한다. 그러다 '코트 드라이클리닝 비용을 걱정하는 시절은 지나간'거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달랜다. 그 부분을 읽으면서 나의 지나간 시절이 훅 하고 밀려 들어왔다.


물 빨래가 쉬운 옷만 샀지 드라이클리닝하는 옷을 살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하고 있었는데. 사회 초년생이 된다는 거. 직장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거. 옷을 사면서 실감했다. 7급 공무원 준비를 하다 내려놓고 한국어 학당 강사로서 일하기 위해 시험을 친 선이. 정규직이 아닌 한 학기 10주만 강의를 맡아서 하는 비정규직 강사로서 일을 시작하는 선이. 무시당하지 않고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게 겨우 옷을 사는 행위가 전부인 선이.


『코리안 티처』는 명문 대학의 한국어 학당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계절별로 펼쳐간다. 봄 학기에는 선이의 이야기가. 여름은 미주. 가을은 가은. 겨울은 한희. 겨울 단기는 다시 선이의 이야기로. 『코리안 티처』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모두 여자이다. 그들은 모두 고학력자에 속한다. 석사는 기본이고 박사 논문을 준비하는 이도 있다. 배울 만큼 배우고 그래도 또 배우는 그들은 어째 정규직의 길에서는 한참 벗어나 있다. 몇 개월 단위로 끊어서 일하는 단기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는 것이다.


가을 학기 편의 주인공 한희는 책임 강사로 선이, 미주, 가은보다는 낫지만 임신을 이유로 다음 학기를 보장받지 못하는 처지이다.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미래를 나만은 알 수 있는 것으로 만들고 싶어 공부를 했지만 그럴수록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으로 바뀌고 만다. 한희는 일을 쉬면서 매일이 불안하다. 그는 완전한 사실로서 존재하는 미래를 그리기 위해 노력한다. 한희가 포기하지 않는 미래에 응원을 보낸다.


미주는 청바지를 입고 단화를 신고 수업을 한다. 눈치를 보지 않는 게 미주의 큰 장점이다. 모두의 규율 대신 자신의 신념을 따른다. 매사에 자기주장이 정확하고 일 처리는 완벽하게 하려고 하는 편이다. 그런 미주에게 원치 않는 시련이 찾아온다. 여학생인 한 학생을 남학생으로 오해한 것이다. 자신은 편견과 차별이 없다고 생각한 미주였다. 소설에서 그리지 않은 미주의 내일은 어떤 모습일까 짐작만 할 뿐이다.


잘 웃고 옷을 잘 입는 가은. 학생들에게도 인기가 좋아 강의 평가에서 매번 1등을 한다. 가을 학기의 주인공 가은은 걱정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좋은 일의 원인을 그저 자신은 운이 좋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무한 긍정의 낙천적인 성격을 가졌다. 선이가 슬퍼할 때 자신의 운을 나눠 주고 싶다는 해괴한 말로 위로를 한다. 모든 일이 잘 될 거라는 믿음으로 살아왔지만 일이 뒤틀리기 시작하자 무너져 버린다. 그럼에도 『코리안 티처』는 꽤 괜찮은 미래를 가은에게 선사한다.


다시 겨울 단기는 선이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솔직히 선이에게 가장 크게 감정 이입되었다. 모든 일에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극단적으로 소심한 모습에서.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본인이 손해를 감당하면서까지 현재를 지켜나가려는 몸부림에서. 과거의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코리안 티처』의 각 장인 학기가 끝나는 부분의 결말은 죄다 섬뜩했다. 자신의 의지와는 원하지 않게 돌아가는 결과를 받아들여야 하는 주인공들 때문에. 일상의 공포는 좀비 떼가 나오고 귀신이 출몰하는 게 아니다. 그런 건 영화나 드라마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계약 연장이 안 되거나 모르고 한 일에 대해 고소를 당하고 조심하라는 이유로 협박 문자를 받는 일이 공포고 호러고 스릴러다. 다음 달에는 꼭 주겠다 말하며 월급을 떼이고 소송 건에 대해 정확히 알려주지 않아 그 월급마저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일. 귀찮고 힘든 일을 미루면서 이게 다 너를 위해서야 하는 개소리를 참아내는 일. 『코리안 티처』는 고학력 여성들이 한국 사회에서 받는 차별의 이야기를 그리는 소설인데 나는 공포 소설을 읽는 것처럼 심장이 벌렁대고 소름 끼치는 기분을 마주해야 했다.


한 챕터가 끝날 때마다 무섭고 두려웠다. 그들의 현재가 너무나 암담하고 미래는 아예 삭제 당할 것 같아서. 초극세사 현실적인 여성의 아니 인간의 이야기가 여기 있다. 한국어 학당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공포와 서스펜스 가득한 이야기가 놓여 있다. 첫 장을 여는 순간 공포는 시작된다. 『코리안 티처』는 되지도 않는 희망을 말하지 않는다. 소설의 인물들이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행복하게 살아가겠지 가능한 추측의 기회마저도 빼앗는다. 그래서 공포다. 그래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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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0-10-06 0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 극세사 현실, 진짜 호러 소설이네요. 제목만 봐서는 안끌렸는데 좋은 리뷰 읽고 나니 굉장히 관심이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