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란 K는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살폈다. 그러곤 어이가 없었다. 개울 흔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끼 낀 바위들이 널려 있어서, 비가 오면 개울물이 흘렀을 것 같았다. 바위들은 미끄러웠다. 그뿐 아니다. 플라스틱으로 된 막걸리 병과 과자 봉지 같은 것들이 퇴색한 채 바위 들 틈에 박혀 있었다. 누군가가 무더운 여름이면 서늘한 이곳을 찾아, 과자를 안주로 막걸리를 마시며 더위를 피하곤 했던 모양이다. 꾀죄죄하게 때가 낀 물건들의 꼴로 봐서는 근래의 일은 아니었다. 최소한 이삼년 전 일일 것 같았다.
사방 어둑한 숲속에서 사람이 다녀간 흔적을 보니 K는 왠지 안도가 되었다.
개울 흔적을 지나서 다시 10분쯤 나뭇가지와 칡덩굴을 낫으로 치며 나아가자, 갑자기 K의 눈앞이 훤히 트였다. 거짓말처럼 나무 한 그루 없이 잡초들뿐인 넓은 땅이 펼쳐져 있었다.
‘프랑스 사람이 인적 끊긴 깊은 숲속에 들어갔다가 생각지도 않던 거대한 앙코르와트 유적을 발견했다는데 그 때 놀란 심정이 지금의 내 심정과 같지 않았을까!’
K에게 직감이 왔다. 오래전 누군가 밭농사 지었던 흔적이었다. 세월이 흘렀어도 농사짓던 자국은 쉬 사라지지 않았다. 울창한 나무 숲속에 숨겨져 있는 공간.
누군가가 나무 숲속에서 낯선 침입자 K를 살피고 있는 것 같은 공포감에, K는 손의 낫을 다시금 확인했다. 고요하다기보다 적막함이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여기서 농사짓던 이들이 일하다가 힘들 때 쉬는 곳으로 삼았는지, 가까운 거리에 큰 포도나무 한 그루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거미줄에 얽힌 포도송이들이 여기저기 달려 있는 게 보였으나 K는 다가가지 않았다. 식욕마저 나지 않는 적막한 공간.
초여름의 따가운 햇살이 공간과 K를 한꺼번에 내리쬐었다.
‘왜 농사를 중단하고 사라졌을까?’
만나본 적 없지만 어느 한 때 땀 흘려 경작하다가 무슨 사연인지 다 포기하고서 떠나버린 ‘그들’. 공간의 넓이로 봐 결코 혼자 농사지을 수 없을 거란 판단에 K는 ‘그들’이라고 복수(複數)를 생각했다. 마치 K네 부부처럼.
K가 퇴직금으로 외진 골짜기 땅을 사서 아내와 밭농사 짓기 여러 해. ‘그들’ 부부도 K네 부부처럼 이 공간을 사서 밭농사 지었던 듯싶다. 하지만 무슨 사연인지 다 포기하고 떠나버렸다. 문득 며칠 전 아내가 K에게 한 말이 떠올랐다.
‘여보. 잡초들 김매다가 지쳐 죽겠어. 이 돌투성이 밭을 팔아치우고 편히 삽시다. 다 늙어서 이게 무슨 고생이야.’
그 말에 K는 대꾸하지 않았다. 기껏 비싼 포클레인까지 불러들여 경지정리하고 컨테이너 농막까지 사다 놓고는 ‘농장’을 시작했는데 … 그만 둔다니 될 말인가. 그렇기도 하고 적적한 노후를 집에서 날마다 TV나 보며 보낼 거야?
K는 돌아섰다. 숲속에 숨어있는 ‘농사짓다가 떠나면서 황폐하게 남은 밭’을 더 지켜보기 힘들었다. 마음이 몹시 무거워졌다. K는 다시 낫을 들어 앞을 가로막는 나뭇가지와 여기저기 뱀처럼 널려 있는 칡덩굴들을 쳐내며 무겁게 한 걸음 한 걸음 농장을 찾아 나아갔다.
-종(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