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는 강의실 밖에서 쉬다가, 시험지의 답들을 적지 않았다는 것을 퍼뜩 깨달았다. 이름 석 자만 적고 휭 하니 나와 버린 것이다. 이걸 어쩌나? 시험지가 모르는 것 천지라도 성의를 보이는 차원에서 아무 거라도 답란에 적고 나왔어야 되지 않나? 이대로 있다가는 과락(科落)이 될 텐데, 다시 시험장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아아 이 절망감.
할 때 아무래도 현실 같지 않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 순간 꿈에서 깼다. K는 자기 집 이부자리에 누워 있었다. 주방에서 무슨 요리를 하는지 아내가 슬리퍼 끌며 바삐 오가는 소리도 들려온다. K는 안도했다. 노후 특징 중 하나가 꼭두새벽에 잠깨는 일이다. 오늘도 새벽 네 시경에 잠이 깨서 하는 수 없이 컴퓨터를 켠 뒤 인터넷 하다가 다시 잠잤는데 그렇듯 시험악몽에 시달렸던 것이다.
시험.
K가 직장(교직)생활 할 때 스트레스를 많이 받던 일 중 하나가 방학 때 대학교로 강습 가서 치르는 시험이었다. 담당 교수가‘책이나 노트를 펴 놓고 참조해가며 답을 적어도 좋습니다. 단지, 강습을 받았다는 증빙자료로써 답지를 걷는 것이니까요.’하는 부담 없는 시험도 있지만 대개는 승진점수와 결부되는 긴장된 시험이었다. 그럴 때 K는‘승진에 관심이 없다’는 듯 애써 편한 낯으로 시험을 치르지만 속마음은 편치 않았다. 왜냐면 시험을 열심히 치르는 동료들이 주위에 포진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동료들이 훗날 K보다 교장 교감이 먼저 돼 평교사로 남은 K를 감독하고 관리할 듯싶었다. 그런 엿 같은 미래현실을 마음 편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K가 3학년 담임으로 있는 학교에서 정기고사를 치를 적마다 그 스트레스에 영양실조 걸린 것처럼 얼굴이 푸석푸석한 학생들이 많은데… 입장이 바뀌어 K 자신이 바로 그런 학생들처럼 스트레스를 받으며 대학교 강의실에 앉아 시험을 치렀던 거다! 순간 K는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뇌까렸다.
“그 놈의 시험!”
주방의 아내가 무엇을 썰다가, 남편의 외마디 소리에 놀라서 큰 소리로 물었다.
“뭐라고요?”
“아냐. 아무 것도 아냐.”
그렇게 답한 뒤 K는 이불을 천천히 개면서 모처럼 퇴직 후 행복감을 만끽했다. 비록 현직 때 받는 봉급의 절반밖에 안 되는 연금으로 살지만 그 놈의 시험을 치를 일이 없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시험. 얼마나 성가신 것인지 모처럼 우리나라를 방문한 미 대통령 트럼프마저 이렇게 외쳤을까.
“북은 미국을 시험에 들게 하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