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 보던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여름 가고
가을 가고
조개 줍는 해녀의 무리 사라진 겨울 이 바다에
바다 기슭을 걸어가는 날이
현대시의 특징은 난해함에 있다는데 조병화 시인의 ‘추억’이란 이 시는 전혀 난해하지 않다.
‘누군가를 잊고자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먼 겨울 바닷가까지 왔다. 사흘씩이나 바닷가를 거닐지만 역시 잊을 수 없다’는 가슴 아픔이 이 시의 내용이다.
동양화의 매력은 붓 칠을 멈춘 여백에 있다. 이 시에서 ‘여름’이나 ‘가을’은 짧게 한 줄로 표현되기에, 표현되지 않는 그 계절의 사연은 무한하다. 여름 내내, 가을 내내, 화자는 누군가를 잊고자 괴로운 날들을 보낸 것이다.
겨울을 맞아 바닷가까지 왔지만 과연 화자의 가슴 아픈 추억 잊기가 성공할지는 의문이다.
그런데 일 년 사 계절 중 왜 ‘봄’만 이 시에서 제외됐는지 그 까닭을 헤아려봐야 한다. ‘봄’은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이다. 화자는 추억의 소생을 바라는 게 아니라 소멸을 바라는 입장이다. 그 때문에‘봄’은 제외했으되 ‘겨울’에는 집착한다. ‘겨울’은 일 년 사 계절 중 마지막 계절이며 만물이 침묵하는 시간이다. 겨울 바닷가는 해녀 무리 이외에는 인적마저 끊긴 춥고 쓸쓸한 공간이다. 화자는 그런 겨울 바닷가를 혼자 걷고 있다.
‘하루/ 이틀/ 사흘’이라 간략하게 표현했지만 사실 ‘하루’만 따져도 얼마나 간단치 않은 시간인가. 화자가 바닷가 부근 숙소에서 묵으며 세수하고 식사하고 바바리코트를 걸쳐 입고 혹 겨울비 내리는 날씨가 아닐까 일기예보에도 귀 기울이고…… 집에는 ‘나, 잘 있으니까 걱정 마라.’라는 안부전화도 해 놓아야 하고. 그런 간단치 않은 24시간의 일상을 한 줄의 단어로 제친 것이다.
따라서 ‘하루/ 이틀/ 사흘’에서의 줄 바뀜은 24시간이란 객관적 하루의 주관적인 처리다. 우리가 일상에서 맞는 세계는 철저한 객관적 존재물이건만 시인은 단 몇 줄의 시어로 쉽게 변형시켜 새로운 감동의 세계로 독자들을 이끌어준 것이다.
한편, 이 시에서
“하루
사흘“
이라고 세로로 나열한 것 또한 눈여겨볼 만하다. ‘해안선까지, 일정하게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파도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지지 않는가.
그런데 이 시를 볼 때마다 떠오르는 가요가 하나 있다. 송창식의 ‘철지난 바닷가’이다.
철 지난 바닷가를 혼자 걷는다
달빛은 모래위에 가득하고
불어오는 바람은 싱그러운데
어깨 위에 쌓이는 당신의 손길
그것은 소리없는 사랑의 노래
옛 일을 생각하며 혼자 듣는다
아~ 기나긴 길 혼자 걸으며
무척이도 당신을 그리곤 했지
아~ 소리 죽여 우는 파도와 같이
당신은 흐느끼며 뒤 돌아 봤지
옛 일을 생각하며 혼자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