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난 사람이 많은 곳에서 약속을 정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머리를 좀더 써보면 편하고 좋은 장소가 얼마든지 있음에도, 왜 꼭 사람들이 우글대는 번잡한 장소에서 만나자고 하는 걸까?

가장 비근한 예가 졸업식이다. 졸업식을 할 때 만나는 장소는 대개가 정문앞,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정문 앞에는 수백, 수천의 인파가 바글거려, 찾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매년 사람들은 정문앞에서 약속을 하는데, 신기하게도 못만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친구들과 만나는 장소도 언제나 사람이 많은 곳, 신촌 현대백화점 앞이랄지, 홍익문고랄지 하는 곳이 장소로 선택된다. 이 문화를 바꾸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했지만, 잘 안됐다. 예컨대 서울역 같으면 가장 흔히 선택되는 곳이 시계탑이고, 내 지인들도 다 거기서 만나자고 얘기를 한다. 그래서 이랬다. "거기는 복잡하니까, 서울역 주차장 요금 정산소에서 만나자"
친구: 거기가 어딘데?
나: 서울역 주차장 있잖아, 차가 나갈 때 요금 내는 곳 말이야!
친구: 그래도 모르겠는데?
나: 그냥 시계탑에서 봐!

다른 친구와도 요금정산소에서 만나기로 한 적이 있었는데, 약속 시간이 조금 지나 전화가 왔다. 도저히 못찾겠다는 거다. 아니 그 쉬운 곳을 왜 못찾는담? 차를 뺄 때 돈내는 곳은 한군데밖에 없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들은 조금 어려운 장소라면 지레 포기하는 모양이다. 사람들이 잔뜩 서있는 홍익문고도 그다지 좋은 장소가 아닌지라, 난 "홍익문고 앞에서 연대 쪽으로 일곱 번째 가로수에서 보자" 이런 식으로 약속을 정하려고 했다. 하지만 친구들은 "에이, 그냥 홍익문고 앞에서 봐!"라고 내 말을 일축한다. 그래서 난 할수없이 번잡한 곳에서 친구가 오는지 눈이 빠지게 쳐다봐야 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휴대폰을 갖게 된 지금이야 더 어려운 곳에서도 만남을 가질 수 있지만, 휴대폰과 삐삐도 없던 그당시엔 어떻게들 사람들이 만났는지 신통할 따름이다. 그땐 지금보다 사람들간의 신뢰도가 더 높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약속시간에서 1분만 지나도 "어디야?"라고 전화를 하는 지금과 비교할 때, 사람들의 인내심도 그때가 훨씬 더 컸었나보다.

* 학장님이 서울서 회의 있다고, 같이 가자네요. 시간이 없어서 허접한 글을 써버렸습니다 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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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08 13: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eylontea 2004-03-08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전에는 핸드폰,삐삐 없어도 약속장소에서 잘 만났는데...지금은 분명히 약속을 하고 똑같이 그 장소에 가도 못만나고 꼭 전화를 하게 됩니다.

진/우맘 2004-03-08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소 애용하고 있던 신촌 현대백화점 앞, 홍익 문고.... 그래도 홍익 문고는, 만남의 장소로는 별로일지 몰라도 기다림의 장소로는 좋지 않습니까? 책 읽으면서 버틸 수 있으니까요. 시간 잘 안 지키는 친구와 약속 잡을 때는 이만한 곳이 없지요.^^

비로그인 2004-03-08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접하다고 하시지면 너무 재밌는데요~ ^^ 사실, 폰이 없으면 없는대로 또 살아지지만, 있는 폰을 놓고 나가면 엄청난 상실감이 들죠. 심장이 덜컹하고. 문명의 이기에 너무 길들여져서 그런가봐요. ㅎㅎ

▶◀소굼 2004-03-08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화를 잡고 '어디야?'라고 하면 바로 눈 앞에 띄죠-_-;전화비 아깝게 말이에요;;

마태우스 2004-03-08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론티님/그러게 말입니다. 눈도 침침해졌나 봅니다.
진우맘님/그건 그런데요, 서점에서는 기다리며 책을 뒤적이는 사람들을 싫어하는 눈치더군요.
앤티크님/그렇죠. 길들여진다는 것, 그게 가끔 사람을 슬프게 하죠.
salt님/후후, 저도 그런 경험 많이 했죠..... 전화비 아깝게...
 

 

 

 

 

 

* 연보라빛우주님의 글을 읽다가 생각나는 게 있어, '질문'에 관해 몇달 전에 쓴 글을 여기다 올립니다. 영감을 주신 우주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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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시: 2003년 8월말

제목: 질문의 유형

오늘 수업을 마치고 나서 애들한테 질문있으면 하라고 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난 사실 질문이 나오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답변을 못하는 어려운 질문이라도 하면 어쩌겠는가. 다른 학생들이 다 보는 앞에서 모른다는 말을 하기란 여간 쑥스러운 게 아니다. 그런데 한 학생이 질문을 할 듯한 자세를 취하는 거다. 난 잽싸게 마이크에 입을 갖다댔다. 내가 했던 말을 여기다 옮긴다.

[질문에는 4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번째가 바로 현학적 질문이죠. 즉, '난 이런 것도 안다. 넌 모르지?'라는 식의 질문을 말하지요. 두번째가 공격용 질문인데, '너 한번 죽어봐라'는 식으로 상대의 사소한 실수나 약점을 파고들어갑니다. 세번째가 궁금형으로, 정말로 알고 싶어서 묻는 경우를 말합니다]

여기까지 말하고 난 칠판에 '기타'라고 썼다. [네번째가 바로 이겁니다. 즉, 연자의 발표내용에 무관하게 주변적인 걸 묻는 거죠. 예를 들면 "자네 부모님은 안녕하신가?"라고 묻는다든지]

애들이 굉장히 감동한 것 같아 난 말을 계속했다.
[리서치 앤드 리서치사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학자들의 61%가 현학적 질문을 가장 싫어한다고 했습니다. 즉, 잘난체를 하는 건 용납할 수 없다는 거죠. 공격용 질문 역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질문이란 서로의 학문세계 사이에 소통이 이루어지는 걸 의미하며, 따라서 상대에 대한 존중이 들어 있어야 하는 거죠. 세번째 유형, 즉 궁금형이야말로 질문의 꽃입니다. 하지만 이건 '나만 모르는 게 아닐까? 섣불리 했다가 무식하다고 놀리면 어쩌지?'라는 불안감 때문에 실제로는 잘 나오지 않습니다. 제가 학회에 입문한지 십년이 다 되었지만, 아직까지 단 한번도 질문을 하지 못한 건 바로 그런 이유입니다]

'리서치 앤드 리서치사'의 조사라는 건 사실 뻥이다. 그런 여론조사 기관이 있다는 건 사실이지만.

[네번째 유형의 경우는 누구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지요. 그저 아무 말이나 하면 되니까요. 하지만 섣불리 그런 질문을 했다간 작살납니다. 그런 건 최소한 50세가 넘어야 할 수 있답니다. 저도 그런 질문을 하려면 앞으로 십수년을 기다려야 하지요]

애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심지어 필기를 하는 애도 있었다. 내 얘기를 적는 게 아닐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자, 그러면 질문 하세요. 단, 질문을 할 때 어떤 유형인지 미리 밝히고 해주시길 바랍니다"
단 한명도 질문을 하지 않았고, 내친김에 난 한가지 에피소드를 말해 줬다.

[어떤 학생이 제게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왜 강의만 열나게 뛰어가냐고. 그땐 허허 웃으면서 운동삼아서 그런다고 대답했지만, 사실 누군가가 개인적으로 질문을 할까봐 그렇습니다. 내가 잘 모른다고 하면 그학생이 '실력없다!'고 소문낼 게 아닙니까.

그런데 한번은 제가 강의 후 열심히 뛰는데 한 학생이 따라오는 겁니다. 겁이 났지요. 그래서 더 빨리 뛰었지만 결국 따라잡히고 말았습니다. 모든 게 끝이구나 하고 생각했더니, 그학생이 숨을 헐떡이면서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선생님, 레이져 포인터 놓고 가셨어요"]

이번학기 내 첫 강의는 이렇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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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시보 2004-03-08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저런걸 보고 초전박살이라고 해야겠네요.

비로그인 2004-03-08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강의는 어떻게 할까??심히 궁금합니다.

진/우맘 2004-03-08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반 아이들..."선생님, 이거 몰라요~" "문제 읽어 봤니?" "네." "(문제 읽어준다) 이제 알겠지?" "네~" TT
한글을 능숙하게 깨우치지 못해서인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학습된 무기력'이라는 증상입니다. 네번째 스타일의 질문에, 작년엔 스물 네 살이었다던 선생님이 올해는 스물 두 살이라고 빡빡 우겨도 "아아~" 하며 끄덕이는, 귀여운 놈들이죠.^^

연우주 2004-03-08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재미있는 글이네요...^^ 마태우스님...^^

마태우스 2004-03-08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라시보님/초전박살 맞습니다. 애들은 그 뒤 한학기 내내 제게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좋은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검은비님/호호호호.
폭스바겐님/예전에는 웃긴 얘기를 중간중간에 했는데, 요즘엔 애드립으로 합니다. 후자가 더 반응이 좋더군요.
진우맘님/학습된 무기력.... 음....그렇군요. 우리 애들도 뭐 물어보면 조용---하던데...
연보라빛우주님/아이, 부끄러워요.

갈대 2004-03-08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질문 원천봉쇄하기. 정말 고단수이시군요, 감탄할 뿐입니다^^

비로그인 2004-03-08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하~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 재밌어요~ >.<

가을산 2004-03-08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학생때 질문 한번 잘못했다가 박살 난 적이 있는데...! 악몽이었습니다.

머리 좋기로 유명한 외과 과장님이 계셨는데, 학생들이 실습 나와서 질문을 안하는 것도 싫어하지만, 현학적인 질문을 하는 것은 더 싫어하셨습니다.
한번은 대회진(과장님 이하 전체 스테프와 수련의, 학생들까지 다 회진을 도는 것)때 회진을 돌다가 '질문 있나?' 하시길래 질문을 했습니다(안하면 또 잔소리 들으니까요). 제딴에는 진짜 궁금해서, 그리고 현학적이지 않다고 생각해서 (마태 분류 3) 한 질문인데, 교수님이 막 화를 내시는거에요. '왜 그딴 실제적이지 못한 질문을 하느냐(마태분류 1 혹은 2)'구요.
당황해서 수습한다는게 그만 '그럼 제 질문 취소할게요'라고 말했더니 둘러섰던 교수님들, 전공의들, 동료 학생들이 더 놀래서 눈이 똥그래지는 사태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회진 끝나고 치프 전공의한테 불려가서 혼나구... ㅜㅜ
마태우스님 글을 그당시 읽었으면 좋았을텐데...

비로그인 2004-03-08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 그러잖아요.. "질문없어요? 그럼 다 안걸로 간주하고 제가 질문하나 하겠습니다."

마태우스 2004-03-09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산님/회진 때 질문하는 건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건데, 그래도 대단하시네요? 전 엄두도 못냈었는데...
폭스바겐님/하하, 그런 분도 계시죠^^
 

 

 

 

 

 

어느 책에서 본 건데, 펀키 박사인지 핀처 박사인지 하는 사람이 자녀의 모든 것은 다 유전자에 씌여져 있다는 주장을 폈다고 한다. 즉, 애가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 하는 게 미리 결정되어 있으며, 부모가 아무리 극성을 부려봤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공부하기 싫어하는 애를 아무리 두들겨 패도 소용없는 건 그래서란다. 에디슨은 천재가 1%의 재능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했지만, 그 99%의 노력을 가능하게 하는 유전자의 유무가 태어날 때 이미 정해져 있다는 건 조금은 놀랍다.

공부뿐 아니라 다이어트도 마찬가지다. 이건 <하마가 소말리아로 간 까닭은?>이란 내 친구의 저서에 나온 얘긴데, 일란성 쌍둥이가 어릴 적 헤어져 한참 후에 만났을 때, 둘의 체형이 비슷한 것도 몸매에 관한 게 다 유전자에 씌어있기 때문이란다. 그러니 살을 뺀다고 아무리 다이어트를 해도 되는 사람이 있고 죽어도 안되는 사람이 있다는 거다.

다 아는 사실이지만, 주량도 유전자의 지배를 받는 대표적인 종목이다. 주량이란 게 사람마다 정해져 있어서, 아무리 열심히 마신다고 해봤자 늘어나는 게 한계가 있는 법이니까. 우리 형제들이 그렇다. 딸 둘, 아들 둘인데, 다들 술에는 한가닥씩 한다. 나와 남동생은 소주 두병쯤 마시면 헬렐레 하지만, 누나와 여동생은 세병 정도 마시는 듯하다. 우리들끼리 모여서 한판 붙으면 제일 먼저 떨어져나가는 건 나. 누나와 여동생은 아무리 마셔도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는 주당이다.

조카들이 놀러오라고 성화를 부리는 통에, 오늘 오후 누나집에 놀러갔다.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는데, 국수전골을 시키기에 소주를 한병 달라고 했다. "잔은 하나만 주시구요"

누나의 말이다. "아니 너 맨날 술먹는다면서 소주를 또 시키냐? 니가 인간이냐?" 그때 종업원이 냄비를 가지고 오자, 누나가 이런다. "소주잔 하나 더주세요!" 난 안주가 없으면 술을 안먹지만, 누나는 물김치만 나온 상황에서 거푸 세잔을 비운다. 그런 걸 보면 우리 누나야말로 진정한 주당, 애들 키우느라 술을 마실 기회를 갖지 못한 건 우리 경제의 비극이다. 혼자 계속 술을 따라마시는 누나에게 눌려, 난 오늘 딱 한잔의 술만을 먹었을 뿐이다. 술이 들어가고 나자 누나는 매제와 대판 싸웠다는 여동생까지 불러서 크게 한번 마셔보잔다. 내일 출근해야 한다고 거절했지만, 사실은 그들과 대적할 만큼 몸을 만들지 못해서 그런 거였다. 맥주 150cc를 마시고 세번의 오버이트를 한, 전설적인 친구가 있으니, 소주 두병을 마시는 건 그래도 웬만큼은 된다. 하지만 누나의 주량이 내 주량이었으면, 하는 생각은 여러 번 한다.

술의 유전자 결정론을 부인하는 예 한가지. 나와 같이 조교를 하던 3년 선배는 술을 전혀 못했다. 그가 군대생활을 하던 어느날, 그가 학교에 오더니 나와 한판 붙잔다. 가벼운 맘으로 나갔지만, 소주 두병씩을 마셨을 무렵 난 정신을 잃고 말았다. 혼미해진 상태에도 그가 했던 말은 지금도 기억이 난다. "내가 널 이기기 위해 지옥훈련을 했지"  그날 이후 그는 술을 안마시던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는데, 어떤 훈련을 했냐는 내 거듭된 질문에 답변을 회피하고 있다. 치사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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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3-07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그 지옥훈련 내용만 알수 있어도, 앞으로의 술대결에서 무적이 될 수 있을텐데요! ^^ 술이 받는 체질과 아닌 체질이 있는건 알지만, 공부나 다이어트도 유전자로 결정되어있다니 너무 서글픈데요. ㅠㅜ

mannerist 2004-03-08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하... 갑자기 유전에 관계된 무지막지한 이야기가 생각나는군요. 이곳에 적긴 좀 길고. 생각 정리되는대로 한번 써 봐야겠습니다. ㅋㅋ...

갈대 2004-03-08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술 안 받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집 네 식구가 소주 한 병이면 전멸이라는..

진/우맘 2004-03-08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술 말고도 실생활 속 유전자의 신비는 많지요. 며칠 전 페이퍼 내용대로, 저는 엄마에게 기계치로서의 유전자를 물려받았습니다. 울 아빠의 맥가이버 유전자는 둘째에게 갔지요.
'엄마 머리 갖고 놀기' 같은 유전자도 있나봅니다. 제가 어릴 때 맨날 엄마 머리를 비비고 뜯으며 자랐다더니... 요즘 진/우가 그래요. 숱 없는 머리, 두피가 다 일어날 지경입니다. TT
 

 

 

 

 

 

38번째 술

일시: 3월 5일

누구랑?: 초등 친구들과

마신 양: 소주 한병 +알파, 2차는 진토닉

느낀 점

-누구나 저마다의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때론 자신만이 힘든 수렁에 빠져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누구에게나 위로받고 싶은 상처는 있는 법이다.

-초등 친구들 중 갈라선 애들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놀라게 된다. 절세의 미녀 하나는 애 셋을 뺏기고 이혼했고, 몰라보게 이뻐진 모습에 내 넋이 나갔던 여인도 최근 헤어졌다. 부부란 외모만이 아니겠지만, 그런 얘기를 들으면 마음이 아파온다.

-갈라선 사실을 나만 알고 있었던 내 친구는 역시 이별의 슬픔을 안고있는 여인과 작년에 결혼했다. 난 몰랐는데, 지난 1월말에 아이를 출산했단다. 그날 들은 일 중 가장 즐거운 소식이었다.  

 

39번째 술: 사재기

일시: 3월 6일 토요일, 교보 뒤에서

누구랑?: 브로커랑 (이하 문답식으로 쓴다)

-교보에 왜 갔나?
=내 책을 사기 위해서다.

-아니 니 책을 왜 니가 사나?
-책이 나오면 한권 달라는 사람이 많다. 그들이 그러는 건, 저자는 집에다 책을 잔뜩 쌓아 놨겠거니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출판사에서 저자에게 주는 책은 10-20권 남짓, 나머지는 전부 자신이 사서 줘야 한다. 내가 틈나는대로 교보에 가고, 알라딘에 책을 주문하는 건 바로 그런 이유다.

-집근처 서점을 놔두고 큰서점을 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브로커는 또 뭔가?
=브로커를 두는 이유는.... 내가 계속 사면 사재기를 하는 걸로 오해받지 않겠는가. 그래서 시간이 있는 지인들을 동원해 책을 사게 한다. 큰서점에 가는 건, 작은 서점에 가면 내 책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솔직히 말해 이왕 사는 거, 큰서점에서 베스트에 진입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다. 한마디로 올-인이다!

-계산대를 달리하면서 두권씩 사는 이유는 뭔가?
=그건.... 사재기로 오인받을까봐.....

-브로커에게 일당을 주나?
=아니다. 일이 끝나면 밥과 술을 사는데, 대개는 술값이 책값보다 훨씬 더 든다. 요즘 내가 매일같이 술을 마시는 이유가 바로 그거다.

-매일 술을 마시면 힘들지 않나?
=당연히 힘들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올-인이다!

-지금까지 몇권이나 샀으며, 책을 줘야할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한 100권 정도 돌린 것 같은데, 아직도 줘야 할 사람이 많다. 우리 어머니도 만만치 않다. 내가 책을 사놓으면, 친구분들 주신다고 다 가져간다. 아주머니들은 몇 명만 주면 삐진다고, 참석자 수만큼 책을 챙겨가신다. 화요일날도 아홉권이 필요하단다. 나도 다음주 목요일에 큰 모임이 있는지라 책이 더 필요하다. 한마디로 올-인이다!

* 브로커와 일대일로 마셨다. 생맥주를 3천cc씩 마셨는데, 그만 2차에서 정신을 잃었다. 브로커로부터 "술이 너무 약해졌군!"이라는 말을 들었다. 다른 건 노력으로 되지만, 술은 아무리 마셔도 늘지를 않는다. 주량이 딱 소주 다섯병만 되면 소원이 없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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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시보 2004-03-07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량이라는 것이 대체 어찌 계산을 해야 하는 것인지... 저는 몸 상태 및 기분에 따라 술빨이 천양지차기 때문에 알 수가 없습니다.

비로그인 2004-03-07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브로커 이야기나, 친구분들 이야기나, 왠지 마음이 짠~한데요. 교보베스트에 진입하셨는지?? 저라도 사재기가 아니고도 베스트에 진입할수 있도록 일조하겠숨다~ ^^

sooninara 2004-03-07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주변에는 아직 이혼한 친구가 없습니다. 친구끼리도 다행이라고 말한답니다.
부부란 외모만이 아니라는 말이 ...맞는듯합니다..^^ 서로 못난얼굴을 어여삐 여기고 살아가야겠지요..
그래도 오래 같이 살다보면 어느순간 잠시동안은 우리남편이 권상우로 보일때도 있어요^^
사재기하시는군요..교보순위가 궁금해집니다..

연우주 2004-03-07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후배 중에 사재기 아르바이트 했던 후배가 있었어요. 모 출판사에서 나온 책을 한 두 권씩 교보에서 사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뿌리는 알바가 꽤 많다더군요. 후배 왈, 베스트셀러는 그렇게 다 허구란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마태우스님의 사재기 얘길 들으니 더 미안한 걸요?
저자가 책을 많이 안 가지고 있어서 사서 주어야 한단 얘기 전에 들었는데 염치없이 달라고 해서 죄송...흑흑.

쎈연필 2004-03-07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서 마태우스님 책을 메인페이지 배너로 달았으면 좋겠습니다. 마냥 웃기만 할 순 없는 글입니다. 참... 재밌으시고 사람 좋은 분 같네요.

마태우스 2004-03-07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라시보님/주량이란 평균적인 양을 따지는 거겠지요. 그래서 전 소주 두병이지만, 어젠 정말 컨디션이 안좋았나봐요.
앤티크님/하하, 제가 열심히 살테니까 '일조'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수니나라님/여기 분들이야 다들 즐겁게 잘 사실 것 같습니다. 특히 님은요!!

마태우스 2004-03-07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보라빛우주님/미안해하지 마세요. 책을 드리는 것에는 두종류가 있어요. 너무 기쁘게 드리는 분과, 어쩔 수 없이 주는 사람. 우주님을 비롯한 알라딘 분들은 당연히 전자지요.
자두상자님/아, 아닙니다. 사실 저는 책이 안팔려도 별 지장이 없는데요, 전업작가 분들이야 그렇지 않잖아요. 메인 배너는 그분들에게 돌아가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좋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사실은... 나쁜 점이 많은 놈인데요)

비로그인 2004-03-07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좋은 이웃 마태우스님이 책을 내셨으니 당연히 읽어봐야죠~ 담에 지인에게 선물받기로 했으니, 받으면 읽고 감상이라도 남기겠습니다. 어딘가의 베스트셀러 순위에 도움이 되겠죠?? ^^

비로그인 2004-03-08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께 책달라고 조르는 멜 보내고 나서 이글을 읽었습니다..아 제 손이 부끄럽네요.미안해하지 말라해도 무진장 미안하고 죄송합니다.**제 주위에서도 갈라지는 커플들이 많습니다.참 안타깝지요.인연을 만나 서로가 서로에게 믿음으로 하나되는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마태우스님의 주량은 어느정도이신지...전 두꺼비 두마리는 거뜬히 잡을 수있지만은요...그것이 남편이 싫어하는지라 이제부턴 마실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나의하늘이 싫어하는데 따라야하겠지요...슬픈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겠기에 오늘은 우울한 날입니다.
 
테마가 있는 책 읽기
최성일 지음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 2004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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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인 최성일님은 "여러 지면에 출판 시평과 북 리뷰를 기고하며 자유롭게 글을 쓰고" 있다. 책만 읽고 사는 모습이 부럽기도 하지만, 아무나 프리랜서를 하는 건 아니다. 최성일님은 "프리랜서로 살기 위해서는 운이 좋아야 한다...나는 운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한다"고 겸손해 하지만, 그건 저자의 높은 내공 탓이지, 운으로 치부할 건 아니라고 본다.

전작인 <베스트셀러 죽이기>를 비롯해 여러 지면에서 그의 글을 접했는데, 그의 글은 이해하기 쉽고 재미있으며, 글을 통해 '올바른' 정신을 우리에게 전달한다. 출판평론이 갖는 가장 큰 미덕은 읽을만한 책들을 우리에게 소개해 준다는 것인데, 언론이나 문단의 비평이 '주례사 비평'으로 전락했다는 말이 나오는 요즘, 그의 책은 독자들에게 등대가 되어줄 만하다. 이 책은 주제별로 대표적인 책들을 몇권씩 소개하고 있는데, 당연하게도 주옥같은 책들이 많이 나온다. 언급된 책들 중 내가 읽은 게 얼마나 되나 세어봤더니 고작 25권이다. 강유원의 <책>과 <축구, 그 빛과 그림자>를 비롯해서 읽고픈 책들을 다 체크해 놓았는데, 나중에라도 사서 읽어볼 생각이다. 책에서 인상적인 대목을 몇개만 소개한다.

-<군중과 권력>을 쓴 카네티의 말, "군중의 외침은 반드시 자발적인 것이어야 한다. 미리 연습을 해서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고함소리는 군중이 그 나름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증거가 되지 못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자랑스러워했던 월드컵 때의 거리응원도 카네티의 눈으로 보면 생명이 없는 응원?

-[교양과학서는 베스트셀러라도 많은 판매부수를 갖지 못한다.... "방정식 하나를 사용할 때마다 매출 부수가 반씩 줄어들 것"이라는 조언에 유념한 탓인지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는 전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다] 이 구절을 읽으니 과학기술서가 안팔린다고 한탄하던 '마립간'님이 생각난다. 방정식을 쓰지 말고 쉬운 말로 책을 쓴다면 과학기술서도 충분히 잘팔릴 수 있을 것이다. 정재승의 <과학콘서트>처럼.

-[뛰어난 시집이라도 첫시집은 독자의 손길이 미처 닿기 전에 없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신동엽과 김수영이 그렇고, 김지하와 신경림의 첫시집도 소박한 호응을 얻었을 뿐이다] 이와는 달리 영화는 신인감독인 경우가 잘만든 작품을 만드는 경우가 흔하다. 박찬욱의 말에 의하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었기 때문"이라나?

-조셉 캠벨은 이렇게 말했단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셋만 있으면, 하루 24시간이 짧겠다. 그나저나 그 작가가 뭘 읽는지는 어찌 아는 것일까?

뭘 읽을지 방황하는 독자라면, 이 책을 한번쯤 집어들 만하다. 책에 나오는 수많은 책들 중 몇권은 그의 기호를 충족시켜 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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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4-03-08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이리뷰가 개편된 후부터 리뷰를 잘 안쓰게 된다. 아무 때고 올릴 수 있으니까, "나중에 쓰자"고 미뤄두게 되는 탓이다. 예전엔 내 리뷰가 올라가면 기분이 좋았는데, 지금은 그냥 그렇다. 하지만 리뷰 쓰기가 편하도록 개편된 것은 참 좋은 일이다. 뭔가가 바뀌면 늘 궁시렁대는 나같은 사람에겐 발전이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