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책에서 본 건데, 펀키 박사인지 핀처 박사인지 하는 사람이 자녀의 모든 것은 다 유전자에 씌여져 있다는 주장을 폈다고 한다. 즉, 애가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 하는 게 미리 결정되어 있으며, 부모가 아무리 극성을 부려봤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공부하기 싫어하는 애를 아무리 두들겨 패도 소용없는 건 그래서란다. 에디슨은 천재가 1%의 재능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했지만, 그 99%의 노력을 가능하게 하는 유전자의 유무가 태어날 때 이미 정해져 있다는 건 조금은 놀랍다.

공부뿐 아니라 다이어트도 마찬가지다. 이건 <하마가 소말리아로 간 까닭은?>이란 내 친구의 저서에 나온 얘긴데, 일란성 쌍둥이가 어릴 적 헤어져 한참 후에 만났을 때, 둘의 체형이 비슷한 것도 몸매에 관한 게 다 유전자에 씌어있기 때문이란다. 그러니 살을 뺀다고 아무리 다이어트를 해도 되는 사람이 있고 죽어도 안되는 사람이 있다는 거다.

다 아는 사실이지만, 주량도 유전자의 지배를 받는 대표적인 종목이다. 주량이란 게 사람마다 정해져 있어서, 아무리 열심히 마신다고 해봤자 늘어나는 게 한계가 있는 법이니까. 우리 형제들이 그렇다. 딸 둘, 아들 둘인데, 다들 술에는 한가닥씩 한다. 나와 남동생은 소주 두병쯤 마시면 헬렐레 하지만, 누나와 여동생은 세병 정도 마시는 듯하다. 우리들끼리 모여서 한판 붙으면 제일 먼저 떨어져나가는 건 나. 누나와 여동생은 아무리 마셔도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는 주당이다.

조카들이 놀러오라고 성화를 부리는 통에, 오늘 오후 누나집에 놀러갔다.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는데, 국수전골을 시키기에 소주를 한병 달라고 했다. "잔은 하나만 주시구요"

누나의 말이다. "아니 너 맨날 술먹는다면서 소주를 또 시키냐? 니가 인간이냐?" 그때 종업원이 냄비를 가지고 오자, 누나가 이런다. "소주잔 하나 더주세요!" 난 안주가 없으면 술을 안먹지만, 누나는 물김치만 나온 상황에서 거푸 세잔을 비운다. 그런 걸 보면 우리 누나야말로 진정한 주당, 애들 키우느라 술을 마실 기회를 갖지 못한 건 우리 경제의 비극이다. 혼자 계속 술을 따라마시는 누나에게 눌려, 난 오늘 딱 한잔의 술만을 먹었을 뿐이다. 술이 들어가고 나자 누나는 매제와 대판 싸웠다는 여동생까지 불러서 크게 한번 마셔보잔다. 내일 출근해야 한다고 거절했지만, 사실은 그들과 대적할 만큼 몸을 만들지 못해서 그런 거였다. 맥주 150cc를 마시고 세번의 오버이트를 한, 전설적인 친구가 있으니, 소주 두병을 마시는 건 그래도 웬만큼은 된다. 하지만 누나의 주량이 내 주량이었으면, 하는 생각은 여러 번 한다.

술의 유전자 결정론을 부인하는 예 한가지. 나와 같이 조교를 하던 3년 선배는 술을 전혀 못했다. 그가 군대생활을 하던 어느날, 그가 학교에 오더니 나와 한판 붙잔다. 가벼운 맘으로 나갔지만, 소주 두병씩을 마셨을 무렵 난 정신을 잃고 말았다. 혼미해진 상태에도 그가 했던 말은 지금도 기억이 난다. "내가 널 이기기 위해 지옥훈련을 했지"  그날 이후 그는 술을 안마시던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는데, 어떤 훈련을 했냐는 내 거듭된 질문에 답변을 회피하고 있다. 치사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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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3-07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그 지옥훈련 내용만 알수 있어도, 앞으로의 술대결에서 무적이 될 수 있을텐데요! ^^ 술이 받는 체질과 아닌 체질이 있는건 알지만, 공부나 다이어트도 유전자로 결정되어있다니 너무 서글픈데요. ㅠㅜ

mannerist 2004-03-08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하... 갑자기 유전에 관계된 무지막지한 이야기가 생각나는군요. 이곳에 적긴 좀 길고. 생각 정리되는대로 한번 써 봐야겠습니다. ㅋㅋ...

갈대 2004-03-08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술 안 받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집 네 식구가 소주 한 병이면 전멸이라는..

진/우맘 2004-03-08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술 말고도 실생활 속 유전자의 신비는 많지요. 며칠 전 페이퍼 내용대로, 저는 엄마에게 기계치로서의 유전자를 물려받았습니다. 울 아빠의 맥가이버 유전자는 둘째에게 갔지요.
'엄마 머리 갖고 놀기' 같은 유전자도 있나봅니다. 제가 어릴 때 맨날 엄마 머리를 비비고 뜯으며 자랐다더니... 요즘 진/우가 그래요. 숱 없는 머리, 두피가 다 일어날 지경입니다. T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