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보라빛우주님의 글을 읽다가 생각나는 게 있어, '질문'에 관해 몇달 전에 쓴 글을 여기다 올립니다. 영감을 주신 우주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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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시: 2003년 8월말

제목: 질문의 유형

오늘 수업을 마치고 나서 애들한테 질문있으면 하라고 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난 사실 질문이 나오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답변을 못하는 어려운 질문이라도 하면 어쩌겠는가. 다른 학생들이 다 보는 앞에서 모른다는 말을 하기란 여간 쑥스러운 게 아니다. 그런데 한 학생이 질문을 할 듯한 자세를 취하는 거다. 난 잽싸게 마이크에 입을 갖다댔다. 내가 했던 말을 여기다 옮긴다.

[질문에는 4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번째가 바로 현학적 질문이죠. 즉, '난 이런 것도 안다. 넌 모르지?'라는 식의 질문을 말하지요. 두번째가 공격용 질문인데, '너 한번 죽어봐라'는 식으로 상대의 사소한 실수나 약점을 파고들어갑니다. 세번째가 궁금형으로, 정말로 알고 싶어서 묻는 경우를 말합니다]

여기까지 말하고 난 칠판에 '기타'라고 썼다. [네번째가 바로 이겁니다. 즉, 연자의 발표내용에 무관하게 주변적인 걸 묻는 거죠. 예를 들면 "자네 부모님은 안녕하신가?"라고 묻는다든지]

애들이 굉장히 감동한 것 같아 난 말을 계속했다.
[리서치 앤드 리서치사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학자들의 61%가 현학적 질문을 가장 싫어한다고 했습니다. 즉, 잘난체를 하는 건 용납할 수 없다는 거죠. 공격용 질문 역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질문이란 서로의 학문세계 사이에 소통이 이루어지는 걸 의미하며, 따라서 상대에 대한 존중이 들어 있어야 하는 거죠. 세번째 유형, 즉 궁금형이야말로 질문의 꽃입니다. 하지만 이건 '나만 모르는 게 아닐까? 섣불리 했다가 무식하다고 놀리면 어쩌지?'라는 불안감 때문에 실제로는 잘 나오지 않습니다. 제가 학회에 입문한지 십년이 다 되었지만, 아직까지 단 한번도 질문을 하지 못한 건 바로 그런 이유입니다]

'리서치 앤드 리서치사'의 조사라는 건 사실 뻥이다. 그런 여론조사 기관이 있다는 건 사실이지만.

[네번째 유형의 경우는 누구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지요. 그저 아무 말이나 하면 되니까요. 하지만 섣불리 그런 질문을 했다간 작살납니다. 그런 건 최소한 50세가 넘어야 할 수 있답니다. 저도 그런 질문을 하려면 앞으로 십수년을 기다려야 하지요]

애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심지어 필기를 하는 애도 있었다. 내 얘기를 적는 게 아닐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자, 그러면 질문 하세요. 단, 질문을 할 때 어떤 유형인지 미리 밝히고 해주시길 바랍니다"
단 한명도 질문을 하지 않았고, 내친김에 난 한가지 에피소드를 말해 줬다.

[어떤 학생이 제게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왜 강의만 열나게 뛰어가냐고. 그땐 허허 웃으면서 운동삼아서 그런다고 대답했지만, 사실 누군가가 개인적으로 질문을 할까봐 그렇습니다. 내가 잘 모른다고 하면 그학생이 '실력없다!'고 소문낼 게 아닙니까.

그런데 한번은 제가 강의 후 열심히 뛰는데 한 학생이 따라오는 겁니다. 겁이 났지요. 그래서 더 빨리 뛰었지만 결국 따라잡히고 말았습니다. 모든 게 끝이구나 하고 생각했더니, 그학생이 숨을 헐떡이면서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선생님, 레이져 포인터 놓고 가셨어요"]

이번학기 내 첫 강의는 이렇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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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시보 2004-03-08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저런걸 보고 초전박살이라고 해야겠네요.

비로그인 2004-03-08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강의는 어떻게 할까??심히 궁금합니다.

진/우맘 2004-03-08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반 아이들..."선생님, 이거 몰라요~" "문제 읽어 봤니?" "네." "(문제 읽어준다) 이제 알겠지?" "네~" TT
한글을 능숙하게 깨우치지 못해서인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학습된 무기력'이라는 증상입니다. 네번째 스타일의 질문에, 작년엔 스물 네 살이었다던 선생님이 올해는 스물 두 살이라고 빡빡 우겨도 "아아~" 하며 끄덕이는, 귀여운 놈들이죠.^^

연우주 2004-03-08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재미있는 글이네요...^^ 마태우스님...^^

마태우스 2004-03-08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라시보님/초전박살 맞습니다. 애들은 그 뒤 한학기 내내 제게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좋은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검은비님/호호호호.
폭스바겐님/예전에는 웃긴 얘기를 중간중간에 했는데, 요즘엔 애드립으로 합니다. 후자가 더 반응이 좋더군요.
진우맘님/학습된 무기력.... 음....그렇군요. 우리 애들도 뭐 물어보면 조용---하던데...
연보라빛우주님/아이, 부끄러워요.

갈대 2004-03-08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질문 원천봉쇄하기. 정말 고단수이시군요, 감탄할 뿐입니다^^

비로그인 2004-03-08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하~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 재밌어요~ >.<

가을산 2004-03-08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학생때 질문 한번 잘못했다가 박살 난 적이 있는데...! 악몽이었습니다.

머리 좋기로 유명한 외과 과장님이 계셨는데, 학생들이 실습 나와서 질문을 안하는 것도 싫어하지만, 현학적인 질문을 하는 것은 더 싫어하셨습니다.
한번은 대회진(과장님 이하 전체 스테프와 수련의, 학생들까지 다 회진을 도는 것)때 회진을 돌다가 '질문 있나?' 하시길래 질문을 했습니다(안하면 또 잔소리 들으니까요). 제딴에는 진짜 궁금해서, 그리고 현학적이지 않다고 생각해서 (마태 분류 3) 한 질문인데, 교수님이 막 화를 내시는거에요. '왜 그딴 실제적이지 못한 질문을 하느냐(마태분류 1 혹은 2)'구요.
당황해서 수습한다는게 그만 '그럼 제 질문 취소할게요'라고 말했더니 둘러섰던 교수님들, 전공의들, 동료 학생들이 더 놀래서 눈이 똥그래지는 사태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회진 끝나고 치프 전공의한테 불려가서 혼나구... ㅜㅜ
마태우스님 글을 그당시 읽었으면 좋았을텐데...

비로그인 2004-03-08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 그러잖아요.. "질문없어요? 그럼 다 안걸로 간주하고 제가 질문하나 하겠습니다."

마태우스 2004-03-09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산님/회진 때 질문하는 건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건데, 그래도 대단하시네요? 전 엄두도 못냈었는데...
폭스바겐님/하하, 그런 분도 계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