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10월 25일(수)

마신 양: 소주 한병 + 양주 한병(주량이 세진 게 아니라, 따우님 말씀대로 소주가 너무 묽어졌다)

 

대전에는 늘 나를 반겨주는 동창 친구가 있다. 그의 어설픈 미소와 느릿느릿한 말투를 보기 위해 난 일년에 한두번씩 꼭 대전을 찾는데, 어렵사리 시간을 낸 게 지난 수요일이었다. 그 친구에겐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니, 그건 생맥주 300cc를 마시고 세 번이나 오버이트를 해야 했던 전설적인 주량이었다. 물론 그의 주량은, 나처럼 남이 마시는 것에 개의치 않고 나만의 주량을 채워나가는 사람에겐 하등 문제될 게 없었고, 우리가 쭉 친하게 지낼 수 있는 이유도 그렇게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기 때문일 거다. 내가 그에게 술을 권하지 않듯이, 그는 내가 자유롭게 사는 것을 존중해 주는 몇 안되는 친구니까.


그날 역시 우린 즐겁게 수다를 떨었고, 그러는 와중에 그는 맥주 한병을, 난 소주 한병에 양주 한병을 혼자 비웠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익산행 기차를 타야 했기에 서대전역 근처 여관에 묵기로 했다. 택시를 잡았다.

“아저씨, 서대전 역 가기 전에 좀 괜찮은 여관 있으면 세워 주세요.”

여관비가 2만원이라는 사실이 좀 꺼림칙했지만 난 옷가지를 벗어던진 채 침대에 누웠다.


알람에 맞춰 일어났다. 방안을 대충 훑어보니 낡고 불결하다는 느낌이 팍팍 온다. 화장실로 가서 샤워를 했다. 비누가 없다. 할 수 없이 물로만 샤워를 한다. 나가서 수건을 찾았다. 보이지 않는다. 물기를 뚝뚝 흘리면서 필사적으로 수건을 찾는다. 그래도 없다. 수건이 없는 여관이라니, 해도 너무했다.

‘야, 재벌 2세 서민이 어쩌자고 이런 여관에 들어왔냐.’

뭘로 닦을까. 어제 입은 와이셔츠? 속옷? 그때 침대 위에 뭉쳐져 있는 이불이 눈에 들어왔다. 이거다 싶어 이불로 몸과 머리를 닦았다. 나갈 채비를 차린다. 바지를 입고, 새 와이셔츠를 걸쳤다. 그리고 잠바를 들어 올렸을 때 난 어이가 없어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잠바 밑에 수건 두장이 겹쳐져 있었던 것.


밖으로 나가서 택시를 잡았다. 반대편 도로를 지나던 택시가 크게 유턴을 하며 내 앞에 섰다. 택시가 출발한다.

“서대전역이요.”

택시 아저씨가 놀라서 쳐다본다.

“서대전역이요?”

아저씨는 다시 유턴을 한 뒤 내가 택시를 탔던 길 건너편에 차를 세운다. 서대전역은 바로 여관 옆이었다. 유턴 두 번에 1800원이라니, 돈 벌기 정말 쉽다. 전날 택시 아저씨가 원망스러워진다. 난 분명 근처라고 했는데 어쩌자고 역 바로 옆에 있는 여관을 소개해 줬담?


역 근처 여관은 후지다. 하지만 아무리 후져도 수건을 안주는 곳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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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6-10-28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별로 그럴일은 없겠지만 역 근처 여관에 가는일은 없도록 해야겠네요. 후후
그건그렇고,
항상 마태우스님의 페이퍼를 보면 궁금해져요. 이렇게 바쁘게 사시는데 어쩜 이리도 부지런히 페이퍼를 올리실까? 하고 말이죠.

Mephistopheles 2006-10-28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근처는 여관뿐만 아니라 음식도 형편없던걸요..^^

2006-10-28 15: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eylontea 2006-10-28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식 형편없지요....

그리고... 너무하신 택시 기사님이시네요.. --;

물만두 2006-10-28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음식은... 난감 그 자체입니다^^

라이더 2006-10-28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식. 공감합니다. 영등포역에서 맛이간 순대국밥 먹은 기억이 아직 나네요.

세실 2006-10-28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호 청주 터미널 근처에 있는 여관은 안 후지다~~~
물론 직접 들어가 본적은 없지만 뭐 굉장하다 던걸요?

기인 2006-10-28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택시 기사님 다 너무하시네요;; 진짜 제 경험상도 역 근처는 후져요~~
그나저나 재벌 2세 서민님 ㅎㅎ 아이러닉 해요 ㅋㅋ

파란여우 2006-10-28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근처 여관이 대개 후진 이유는요, 뜨내기 여행객들이 많기 때문이고요
새삥 여관들(모텔)은 외곽에 주로 있는 이유는,
거긴 남의 눈을 피해 '러브'하러 가는 부류들이 많기 때문 아닐까요?
참고로 전 작년에 부산역 근처에서 겁나게 좋은 모텔에서 이틀밤을 자고 왔답니다.
호텔수건에 컵라면과 커피까지 구비!

Mephistopheles 2006-10-29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해보니 세실님 말씀하신 건 제가 목격했군요..
처가쪽 형님이 팔 다칠 때 병문안하러 청주 내려가서는 깜짝 놀랐습니다.
터미널에서 병원까지...모텔 네온사인으로 불야성을 이루더군요.^^

춤추는인생. 2006-10-29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벌2세 셨군요..^^ 그 택시기사 아저씨 정말 나쁘네요.
마태우스님이 너무 인상이 좋으셔서 그런거 아닐까요??^^


비자림 2006-10-29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공 대전에 오셨는데 그리 후진 여관에 들어 황당한 일 겪으셨네요. 제가 다 죄송합니다. 그래도 친구분과 정겨운 시간 나누셨지요?

모1 2006-10-29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구실에서 주무시겠다고 한 글을 보았는데..어째서 또 여관을? 했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신것 같네요.

마태우스 2006-10-30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1님/아, 연구실서 잔 건 어제구요, 여관은 지난 수요일입니다. 좋은 하루 보냈지요!^^
비자림님/별 말씀을요.. 친구와 워낙 재밌게 지낸 탓에 여관은 별반 영향을 못미쳤습니다^^
춤추는인생님/유턴 두번이면 원래 택시비 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글구 재벌2세인 거 모르구 제게 그렇게 잘해주셨군요^^
메피님/모텔이 많다는 건 잘 곳 없는 외로운 영혼들이 많다는 뜻...?^^
여우님/여우님이 묵었다는 그 멋진 모텔을 가르쳐 주세요. 저도 참고할께요^^ (분위기가 이상해지는데....?)그런 뜻은 아니어요....더 이상해진 듯..)
기인님/재벌이지만 서민의 마음을 잊지 말라는 게 아닐까 싶다는...^^
세실님/흐음, 청주 갈 일이 있는데 거기서 자야겠네요^^
라이더님/맛이 간 순대국이라...생각만 해도...으ㅡ으
만두님/그래도 만두는 어디나 기본은 하지 않을까요..^^
실론티님/당연히 받는다는 표정이어서 안줄 수가 없었다는...
메피님/맞아요 식당도 후져요!
다락방님/그게요 부지런하게 사니까 페이퍼거리가 계속 생기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