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한 얘기를 재탕하자면, 아버님 살아생전 우리 가족은 전화를 마음대로 쓰지 못했다. 아버님은, 전화를 쓰시려 할 때 다른 이가 전화를 하고 있으면 수화기에 대고 “끊어라!”고 소리를 치셨다. 전화를 거는 모습을 들켜도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래서 우린 아버님과 같이 있을 때 전화벨이 울리면 일단 불안했다. “누가 이렇게 전화를 하냐?”고 불같이 화를 내실 게 뻔하니까. 전화를 좋아하는 나나 어머니는 그때가 말로 표현 못할 억압의 시절이었다


아버님이 안계신 지금은 어머니나 나나 원 없이 전화를 한다. 어머님은 집에 계실 때 늘 전화를 하고, 그러느라 나랑 거의 얘기를 나누지 못한다(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나 역시 무제한 정액제의 본전을 빼느라 전화기를 귀에 대고 있을 때가 많다). 문제는 어머니한테 밤늦게, 혹은 새벽같이 전화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 도무지 시간관념이라는 게 없는지, 밤 12시가 넘거나 새벽 다섯시밖에 안됐는데 왜들 그리 전화를 하는 걸까? 나처럼 전화벨이 울려도 세상모르고 자는 사람이면 모르겠지만, 우리 엄마는 그런 사람이 아닐뿐더러 주무시다 깨면 한동안 잠을 못주무시고 뒤척인다.

“어제 새벽 한시에 걸려온 전화 받고 네시까지 못잤어.”

밤늦게는 전화 걸지 말라고 하면 될 걸, 어머니는 인기를 의식해서인지 절대 그런 말씀을 안하신다. 주무시다 받아 놓고서도 “아냐 안잤어!”라고 하시니 지인들이 좋아라고 전화를 하는 게 아닌가.


어젯밤, 할머니와 나, 그리고 어머니는 마루에서 에어콘을 틀어놓고 자고 있었다. 엄마는 전날 걸려온 전화 때문에, 난 저녁 무렵 마신 소주 때문에, 그리고 할머니는 더워서 낮잠을 못잔 관계로 자려는 욕망이 충만해 있었다. 밤 9시, 우리 셋은 모두 잠자리에 들었다. 그 평화는 오래 가지 않았으니, 9시 반쯤 엄마한테 전화가 걸려 온 것. 엄마는 피곤했는지 30분만에 전화를 끊고 오더니 내게 이러신다.

“전화 때문에 잠을 다 깨버렸네.”

전기를 뽑고 전화선을 뺐지만 우리집 전화기가 워낙 좋은 탓에, 내 전화기로 전화를 해보니 벨은 여전히 울린다. 안되겠다 싶어 컴퓨터 방에 있는 전화의 수화기를 내려놓아 버렸다. 효과는 좋았다. 그로부터 한시간 동안 단 한번의 전화도 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내가 문제였다. 밤 11시 쯤, 내 휴대폰이 타잔 소리를 내며 울린다. 난 엄마가 깰까봐 잽싸게 전화를 받았다. 친구였는데 술에 몹시 취해 보였다.

“이승엽 오늘 어떻게 됐냐?”


난 휴대폰을 꺼놨다. 우리 가족은 평화롭게 잠이 들었다.


에필로그: 내가 수화기를 올려놓은 건 오늘 아침 6시 15분이었다. 그리고 첫 전화가 울린 건 6시 20분, 그분은 엄마가 전화를 받자마자 화부터 냈다. 영문을 모르는 엄마는 “전화가 안되긴 왜 안돼?”라고 반문했는데, 그분은 아마 어젯밤 내내, 그리고 오늘 새벽 다섯시부터 전화를 해댔을 거다(혹시 신고라도 하지 않았나 모르겠다). 급한 얘기가 있느냐면 그런 것도 아닌데 왜 그러는 걸까? 하여간 오늘부터 무조건 수화기 내려놓을 거다. 엄마의 단잠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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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림 2006-08-10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하하~~~~~~~~
제가 댓글 처음 달아 신나는군요.
우리 아버지도 전화를 이상하게 싫어하셔요. 관료 출신이어서 전화 받는 음성도 무지하게 저음에 무뚝뚝하시지요. 그래서그런지 저도 전화를 잘 애용하지 못해요. 음성언어보다 문자언어가 편한 듯...

Mephistopheles 2006-08-10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옛날에 친구집에 전화 걸었을 때가 생각나요..
그친구 아버님이 엄청 엄하신 분이라 전화 걸때 바싹 긴장해서 걸거든요
전화 걸어서 공손하게 XX네 집이죠..하면..XX집 아니다 이집은 내집이다..
하면서 무정하게 끊어버려 사람 황당하게 했던 친구 아버지가 생각나는군요..ㅋㅋ

해리포터7 2006-08-10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려대는 전화! 아마 저희 시댁의 전화가 그랬다면 저는 벌써 쓰러졌을겁니다.,.시댁어른들이 전화벨소리를 소화전소리처럼 크게 해놓으셨어요.ㅋㅋㅋ 상차리다가 공중으로 붕 뜨며 깜짝놀라기는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물만두 2006-08-10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집하고는 참 다르네요^^ㅋㅋ 우리집은 9시 이후에 거의 전화가 안걸려옵니다.

다락방 2006-08-10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전화로 이야기하는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게다가 요즘엔 식구들이 죄다 핸드폰이 있어서 집 전화가 거의 울리지 않더라구요. 그나저나, 새벽에 남의 집에 전화를 하는 사람들은 왜 그런가요? 낮이 되기를 기다리기가 너무 지루해서일까요? 흐음. 오늘부터는 마태우스님의 할머님도, 어머님도, 그리고 마태우스님도 단잠을 주무시길 바랄게요 :)

해적오리 2006-08-10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이퍼부터 댓글까지 다 넘 웃기네요. 혼자 입막고 키득대고 있어요.
메피님 친구아버님의 "이집은 내집이다." 대박입니다. ㅍㅎㅎㅎㅎㅎ

페일레스 2006-08-10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님 진짜 대박! "이집은 내집이여 이눔아" 낄낄낄. 아 증말 마태님과 메피님은 당해낼 수가 없다니깐요... -_-a

달콤한책 2006-08-10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전화 싫어요. 내가 뭐하고 있는지 상관없이 쳐들어오는게 전화라서...꼭 전화 할 일 아니면 전화걸지도 않지요...근데 울 아버님이 전화를 너무 좋아라하시죠. 결혼하고나서 정말 미쳐버리는줄 알았어요...아...전화 시러요ㅜㅜ

moonnight 2006-08-10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전화벨 울리는 게 넘 싫어요. -_-; 급한 일도 아닌데 밤늦게, 또는 새벽같이 전화해서 잠깨워놓는 사람들 정말 이상하죠. 마태님 착한 성품 어머님 닮으셨군요. 싫은 소리 못하고 그냥 내가 참지 뭐. 하시는 거요. ^^

balmas 2006-08-11 0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승엽 오늘 어떻게 됐냐?”

ㅋㅋㅋㅋㅋㅋㅋ 이게 압권이네요. :-)

마태우스 2006-08-11 0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헤헤 저도 그친구한테 전화해서 그 질문 할 때가 많습니다^^
새벽별님/엥? 아드님과 아버님을 구분 못하시다니 새벽별님도 무던하시네요!!! 목소리만 똑같지 공유한 경험은 다를 게 아니어요!!^^
달콤한책님/아버님이 전화를 좋아한다는 건 좋은 거 아닌가요... 남자분 중 그런 분이 별로 없는데...^^
페일레스님/하하, 제가 메피님 때문에 빛을 못보지요 워낙 유머감각이 출중하신 분이라...
해적님/그렇죠? 긴 페이퍼보다 촌철살인의 댓글이 더 웃음을 유발하는 법입니다^^
다락방님/어제도 전화기 내려놓았어요. 그랬더니 오늘 새벽에 어김없이 전화가 왔는데요, 두 사람 다 왜 어제 전화가 안됐냐며 따지더이다...
물만두님/그게 정상적인 거죠..열시만 넘어도 약간 미안해야 하는 건데...
해리포터님/그분들이 귀가 조금 어두우신 건가요? 제가 아는 분은 전화를 모기만하게 해놓으셨던데.....애가 깬다나 뭐라나...
메피님/호호...이집은 내집이다... 화끈하시네요^^ 좋은 친구분을 두셨습니다^^
비자림님/남자분들이 대개 전화를 싫어하죠... 우리 때 아버님들은 다 그러셨던 것 같아요.

비로그인 2006-08-11 0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컥! 어머님 친구분 무지하게 대단하시네요..;; 하긴 저도 제 친구랑 일단 잡으면 3시간이에요! ㅋㅋㅋ 그리고 저희집도 무제한 정액제라서 친구가 전화걸어주면 끊게해서 제가 다시 한답니당.. 히히

달콤한책 2006-08-11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버님이 전화를 좋아라 하신다는거는 기본 하루에 두 번씩 전화가 왔다는 거죠. 밥 먹었냐 한 번, 그냥 걸었다 한 번...그리고 오빠 들어왔냐(당신 아들을 이렇게 부르십니다 >..<) 그리고는 한 시간마다 전화하시죠. 아직 안 들어왔냐? 아직 안 들어왔냐는 전화만 4번까지 하신게 최고 기록. 일반적으로는 이런 전화가 많죠. 핸폰 안 받는다. 전화해서 나한테 전화하라고 해라(내가 핸폰 기지국 사람입니까..핸폰 안 받는거 내가 어떻게 하냐구요)...그래서 전화가 시러요...

모1 2006-08-11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 들으면 잠이 없다고 하던데...마태우스 어머님 친구분들이 그러신듯..그나저나 친구분..대단..

마태우스 2006-08-12 0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1님/하하 저도 그 친구에게 자주 그러는데요 뭐.^^
속삭이신 분/아앗 제가 먼저 보내려 했는데....망했다^^
달콤한책님/아버님이 전화를 좋아하시는군요. 하지만 통화 시간은 짧은 듯하네요. 저희 엄니는 한번 들었다면 한시간...두시간....보통이죠.
크리미슈슈님/오오 무제한정액제 동지시군요. 반갑습니다. 하지만 세시간은.... 너무 힘들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