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하루 동안 한 일. 내 이름이 들어간 4과목의 성적을 내고 입력을 했다. 그거 하는 데도 꽤 시간이 걸린다.


내가 이번 학기에 바빴던 이유의 5할이 연구와 술, 그리고 인터넷이었다면, 나머지 5할은 바로 수업이었다. 원래 난 본과 1학년에게 기생충학만 가르쳤다. 하지만 재작년 보직을 맡으면서 모든 게 변했다. 난 하나둘씩 예과 과목을 맡아서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이번 학기는 거의 피크였다. 의대 교수들은 예과 수업을 귀찮아하는지라 그들에게 부탁을 하려면 숫제 구걸을 해야 했는데, 평소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못하던 나는 “바빠서 안되겠다.”며 손을 내젓는 선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관둬라. 내가 하면 될 거 아냐?”(물론 속으로)

그리고 난 여러 명이 나눠서 하던 그 수업을 대부분 혼자 해결했다.


그랬던 이번 학기가 드디어 끝이 났다. 8월 10일까지 해야 할 뭔가가 있지만, 그래도 수업이 없다는 게 어딘가. 내 전공만 가르치면 되는 2학기는 훨씬 순탄한 시간이 될 터였다. 하지만 막판에 일이 틀어졌다. 뭔가 일이 잘못되어 유전학을 비롯한 두 과목을 ‘우리’-여기서 우리란 의대를 말한다-가 가르쳐야 되게 되었다. 이걸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회의를 연 게 한달쯤 전이었다. 어떻게 하든지 자기는 거기서 빠지려는 선생들 덕분에 난 거의 정신병에 걸릴 뻔했다. 저들과 같이 뭔가를 하며 마음고생을 하느니 그냥 혼자 낑낑대는 게 낫겠다는 게 그때 내린 결론이었다. 난 유전학의 책임 교수란에 내 이름을 써 넣었고, ‘팀 티칭’이라고, 각자 자신 있는 파트를 맡아 수업을 할 예정이던 그 과목은 나와 학생들이 혼돈의 바다에 빠져 헤매이는 장으로 변하게 될 것 같다.


몇날며칠을 고민한 끝에 수업은 어떻게 하고 실습은 또 어떻게 할 것인지 계획을 세웠지만, 문제는 ‘비교해부학’이라고 이름 붙여진 또 다른 과목이었다. 고민에 고민을 하던 끝에 난 평소 활발한 의견을 개진해 날 그로기 상태로 몰고가곤 했던 선생한테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뭐 좀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요. 지금 찾아뵈도 될까요.”

그와 난, 탁자를 두고 마주앉았다.

“선생님, 제가 유전학은 다 해결했는데요, 이 과목은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서요. 좀 도와주시면 안될까요?”

그의 대답은 이랬다.

“그걸 왜 나한테 얘기하는데? 다른 사람한테 얘기해요.”


예과 학생들은 나만의 학생이 아니고, 그들이 의과대학 학생인 한, 의대 선생 모두가 책임을 져야 한다. 교수의 사명이 교육과 연구일진대, 학생을 가르치는 일에 그토록 무관심하다면 어찌 교수라고 자처할 수 있을까. 말없이 그의 방을 나온 나는 분을 삭일 데가 없어 십여분간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 있어야 했다. 직장 동료에게서 일말의 신뢰를 느끼지 못할 때, 그리고 학교 일을 왜 나 혼자만 하느냐고 느낄 때, 사람은 그만두고 싶어진다. 이 정도의 스트레스가 없는 곳은 없을 테고, 누가 뭐라해도 난 복받은 직장에서 근무 중이란 건 잘 알고 있음에도. 나의 2학기도 파란만장의 연속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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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6-06-21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의 페이퍼를 본 순간 세상엔 날로 먹을려는 사람들이 정말 많구나...라는
걸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2006-06-21 15: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hika 2006-06-21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음......... 오랜만에 댓글 남기려니 뻘쭘합니다 그려.
- 십여분간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있어야 했던 그 심정이 너무 절실하게 느껴져서 뭐라 말을 못하겠사옵. ㅠ.ㅠ

비로그인 2006-06-21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금 다른 이유로, 어쩌면 조금 비슷한 이유로 저도 얼마전 비슷한 생각을 했어요. 어쩌면 욱하는 마음에 실행할지도 모르고, 어쩌면 또 반대로 욱하는 마음에 잔류할지도 모르겠지만 유쾌한 일은 아니죠?

2006-06-21 16: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werpoll 2006-06-21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 .. 공동의 문제인데, 공동의 문제라서 아무도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때, 누군가는 꼭 해야할때, 그땐 서로 서로 눈치보느라 바쁘죠. 나몰라라 하는 사람들도 있구요. 마태우스님은 용감하신거라 생각해요....

moonnight 2006-06-21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이 너무 선하셔서 그래요. 저도 때로는 마태우스님을 분노하게 만드는 인간 중 하나로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합니다. ㅠㅠ 그리고 저역시 요즘 직장을 관둬야하나 고민하고 있어서..

건우와 연우 2006-06-21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디나 너무 많은 사람이 묻어갑니다.
속상해요.ㅠㅠ

아르미안 2006-06-21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라는 곳이 생각보다 폐쇄적이고 자기 이익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곳이더군요.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면 해야죠.
내용 쭉 읽어봤는데, 상아탑의 현실이 그렇다니 씁쓰름하네요. 아무튼 힘 내시고, 좋은 결말 있으시길~
화이팅 하십시오... ^^*

ceylontea 2006-06-21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왕.. 제목에서.. 저도 오늘 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서리.. 쯥...

가을산 2006-06-21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 고생하시네요.
그런데 유전학이나 비교해부학을 강의하라고 하면 저라도 움찔할 것 같아요. ^^
유전학이야 의사들도 바탕이 조금은 있지만,
'비교해부학' 이거는 임자가 나타나기 힘들 것 같은데요? (전 옛날에 쥐 뼈 표백한다고 락스물에 삶았던 기억 밖에 안나네요. 뼈는 하얘졌는데, 연골이 '초록색'이 되어가지고는, 기겁했답니다.)

가장 가까운 과목이 해부학 아니면 발생학 정도일 것 같은데..... 외부강사 초빙은 안될까요?

울보 2006-06-21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어려운일이군요,,

마태우스 2006-06-21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보님/그러게요...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어요..
가을산님/저도 비교해부학이 좀 어렵다고 생각해요. 사실 그게 꼭 필요한지도 의문이고,다른강좌로 대체하려고 해요. 근데 뭘하죠??? 외부강사 초빙, 생각은 하고 있답니다...
실론티님/언제 님과 술한잔 해야겠네요...근데 님이 넘 바쁘셔서...
아르미안님/상아탑이나 밖이나 세상은 다 마찬가지인 듯해요. 특히 대학 안은 작은 세계라 그런 갈등이 더 첨예해질 수 있을 것 같아요
건우와 연우님/보직 맡기 전, 저도 묻어가는 놈이었을 거예요.. 사실 그분들이 보직 맡아보면 제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겠죠..
달밤님/어머나 그렇다면 우리가 술을 마시면서 스트레스를 풀어야겠군요...!
토깽이탐정님/당장의 갈등이 싫어서 더 큰 문제를 만드는 재난회피형 인간입죠 저는... 탐정님이 많이 도와주시어요
속삭이신 h님/교수의 본분은 연구라고 아는 분이많아요. 연구만 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한분들이라 강의를 귀찮아하긴 하죠...
주드님/이런일로 상처받는 건 다 님이나 저처럼 맘약한 사람인 듯해요...우리 좀 더 강해지자구요
치카님/정말 왜이리 오랜만에 오셨어요 엉엉...
속삭이신 분/처음 뵙겠습니다. 님도 저랑 비슷한 신세군요..알라딘엔 왜이리 그런 분들이 많은지 원... 근데 참 신기하네요. 하기 싫다고 안할 수 있단 말이어요? 세상엔 안되는 게 없나봐요..
메피님/메피님의 댓글을 본 순간 제 처지를 이해해주시는 분이 있어서 든든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연 2006-06-22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회사에서 easy-riding하려는 사람들을 보면..분노가 치밀죠...
일은 항상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 몰리고 나머지는 묻어가고...으윽!

미래소년 2006-06-22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장의 갈등이 싫어서 더 큰 문제를 만드는 재난회피형 인간
<=== 딱 "저"입니다, 에혀 ㅡ.ㅜ

마태우스 2006-06-22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래소년님/그런 사람은 인생이 피곤한데...반갑습니다 하여간!!
비연님/difficult-riding하는 사람은 알라딘에 다 있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