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4 3장 분량으로 소설을 하나씩 써내라고 했습니다. 완성이 안되도 괜찮으니 벌려놓은 데까지만 내도 된다고 했습니다. 그 대신 베끼면 절대로 안된다고 했습니다. 이번 학년은 작년에 리포트 파동을 겪은 애들이라 제가 베끼기를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고, 몇 번이나 그 얘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막상 소설을 받고나니 겁이 납니다. 과연 이 중에 베낀 학생이 한명이라도 있으면 어쩌나 싶어서요.
하지만 소설을 읽는 시간은 무척이나 즐거웠습니다. 다들 자기 얘기고, 의대생 얘기고, 교통사고가 많이 나오고, 수정을 안한 듯 오자가 눈에 띄었지만, 내용은 전혀 지루하지 않고 발랄합디다. 남녀가 만나서 같이 자취방에 가는 장면에서 끝이 난 로맨틱한 소설의 표지에다 전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렇게 끝내버리면 내가 너무 서운하잖아!”
사랑을 다룬 소설들에 가슴이 뛰었고, 비리교사의 만행에 저도 모르게 흥분했습니다. 개인등을 안 켜주는 퇴근버스 안에서 휴대폰 불빛에 비춰가며 리포트를 읽었습니다. 학생들의 소설 솜씨는 정말 훌륭했습니다. 이것들이 모두 창작물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구글로 다섯 개를 검색한 결과 한 소설이 토씨 하나 안바꾸고 그대로 다른 걸 복사해 왔지 뭡니까. 어쩐지 잘 썼다 싶었네요. 그 학생, 도대체 무슨 배짱인지 모르겠습니다. 미리 얘기할 거 없이 조용히 F를 주렵니다. 1년을 더 다녀야 한다해도요. 물론 그 학생의 부모가 찾아온다면 버틸 자신이 그리 많은 건 아닙니다만.
다른 것들도 다 구글과 네이버를 두드려 볼 생각입니다만, 줄거리를 차용한 경우 검색에 한계가 있을 것 같아 여러분의 도움을 청해 봅니다. 혹시 많이 본 스토리다 싶으면 제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가 은혜는 꼭 갚겠고요, 학생의 장래를 망치는 일이라기보다 정직이 최우선인 과학 분야에 종사할 학생들을 바른 길로 이끄는 일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줄거리만 차용한 거에 F를 주는 건 가혹하다고 생각하며, C 정도를 줄 계획입니다. 오늘 본 것까지만 일단 올립니다.
1번
시골서 다니는 고3 수험생 얘기. 5월 8일이 무슨 날인지 모르는 학생은 토요일인데도 자율학습을 위해 학교에 간다. 아버지는 비닐하우스에서 열심히 일하며 아들을 걱정한다. 전화벨이 울리고,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아버지 앞에서 아들은 눈물을 흘리고, “생각해보니 오늘은 5월 8일이다.”며 끝을 맺는다.
2번.
중3 학생, 과학고를 목표로 공부 중이다. 근데 실수로 과학 답안지를 밀려 썼다는 걸 선생님한테서 듣는다. 봐달라고 하려고 찾아갔는데, 그가 다른 학생을 과학고에 진학시키려고 일부러 시험지를 조작한 거라는 걸 알게 된다. 자살을 하려다 못했고, 자퇴 후 검정고시를 보고 대학에 온다. 그는,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의 가능성은 있는 거다.”라고 말한다.
3번.
의대생이고 과커플인 여자. 의대 공부가 적성에 안맞는다는 생각에 고민하다, 어느날 수업을 빼먹고 무작정 부산행 기차에 오른다. 옆자리에 사진을 찍는 남자가 앉는다. 섬에 가서 사진을 찍겠다고 하는 남자를 여학생은 따라간다. “같이 가요!”
4번.
횡단보도에서 차사고를 당한 주인공, 죽음과 삶의 중간계에 누워있게 된다. 그에게 선택의 길이 주어진다. 반신불수로 남은 여생을 사느냐, 아니면 새로 태어나냐. 새로 태어날 경우 생에서 어떤 삶을 살았냐에 따라 점수가 주어지고, 그 점수를 학벌, 재산, 외모, 수명 등에 배분할 수 있다. “여기가 어디지? 내가 왜 여기 있는 걸까?”라는 말과 함께 소설이 끝난다.
5번. 만점을 준 소설.
쌍둥이 형제가 있다. 동생은 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형은 그가 못마땅하다. 향수 회사에 다니는 동생은 형에게 ‘몇초만 맡으면 죽고 마는’ 향수를 가르쳐 준다. 형은 동생의 연구실로 가서 그를 죽이는데, 그 사건이 뉴스에서는 이렇게 보도된다. “자신의 형을 죽인 동생이 구속되었습니다..”
6번.
약대를 졸업하고 다시금 재수학원에 다니게 된 주인공, 명문 P공대를 다니다 온 21세 여인을 좋아하게 된다. 남친과 헤어진 날 위로한답시고 술을 마시다 그녀와 친해진 주인공, 결국 그녀와 연인 사이가 된다. 같이 자긴 하지만 하지는 않은 상태, “꿈같은 하루하루가 지나고 수능이 다가온다.” 이하 생략이란다.
7번.
데이트코스 연구회는 애인 없는 애들끼리 놀자는 모임이다. 23살인데 한번도 사랑을 해보지 못한 주인공은 성시경 노래를 들으며 외로움을 달랜다. 하지만 모임 회원들이 다 눈독을 들이는 회장이 그녀를 좋아하는 것 같다. 자기가 먼저 좋아한다는 고백을 하고 싶은데, 말을 못한다. “23살의 로맨스는 언제 시작되는 걸까.”
8번.
제목이 ‘2099’.
2090년인데 남자와 여자, 방자가 있다. 방자는 교육도 못받고 하인 신세로 착취당하며 지내는데, 방자 중 하나가 몰래 책을 읽고 주위 얘기를 들으면서, 자신들의 능력이 사실은 가장 뛰어나다는 걸 알게 된다. 그가 말한다. “조금만 기다려. 곧 알게 될거야.” “뭘?” “모두 알고 있지만 침묵하고 있는 거. 알려 하지만 알 수 없는 거”
9번. 상투적인 결말이긴 하지만....
혜리는 커플매니저다. 그녀는 엄청나게 잘생기고 돈도 많이 버는 킹카 때문에 골치다. 6번 다 괜찮은 여자를 해줬건만, 모두 거절. 7번째가 마지막이다. 여자의 조건도 안본다면서 왜 저따윈가. 혜리는 그를 만나서 너같은 놈 혼자 살아라,고 쏘아붙여 준다. 근데 그 남자는 혜리가 마음에 든다고. 갑자기 세상이 아름답게 변한다.
10번.
대학을 나온 주인공은 백수다. 그가 베트남에서 군인을 필요로 한다는 얘길 들었다. 장면이 바뀌어 베트남이다. 그는 부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양민을 학살한다. 장면이 또 바뀌고, 종군위안부인 고모가 일본군 만행 특집을 TV로 보고 있다. 같이 욕한다. “저런저런 나쁜 놈들...”
11번.
실연을 당한 그녀는 Bar에서 술을 마신다. 데낄라를. 근데 한 남자가 앞에 앉는다. “제가 술 한잔 사고 싶은데...” 여자는 응한다. 그녀는 그날 남자 품에 안겨서 잠이 들었다(하진 않았다). 깨보니 너무 힘들어하지 말라는 쪽지가 남겨져 있다. 그녀는 그 후부터 그 Bar를 계속 갔지만 그를 만날 수는 없었다. 1년이 되는 날, 그녀 앞에 한 남자가 다가온다. “긴 여행을 다녀왔습니다...제 여행 애기 들어보시겠어요?” 그는 바로 그 남자, “새로운 사랑이 찾아오는 기분”이라며 소설은 끝난다.
12번.
박사는 옆 나라에서 발생한 괴질 때문에 정보국의 호출을 받는다. 옆 나라는 모든 나라로부터 고립된다. 그건 음모였다. 분단이 되어 있는 옆 나라는 잦은 내분으로 타국민의 발걸음이 드물었는데, 일부러 전염병을 발생시키면 분단국끼리 힘을 합칠 수가 있고, 치료제를 개발하기 위해 모금운동도 벌이면 일석이조가 아니냐는 것. (사실 난 이 음모가 왜 좋은 발상인지 이해가 안됐다). 박사는 옆 나라의 일에서 뭔가 이상하다는 의혹을 느낀다..(여기서 끝)
13번.
주인공인 나(여자)는 H를 좋아했다. 근데 자기한테 프로포즈한 건 M, H만 쫒다가 M을 놓칠 것 같아 사랑한다고 해버렸다. M은 헌신적으로 잘 해줬다. 근데 둘이 커플인 게 소문이 나던 그날, H가 술집에서 엄청 퍼마셨다. H는 나를 좋아하고 있었잖아! 결국 M에게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해 버린다. M이 말한다. “니가 사랑 안해도 좋아. 내가 너 많이 사랑할게.” 그리고 운다. 결국 나는 M을 떠나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 M을 사랑할 수 있을까.
14번. 어려웠던 과거를 회상하는 사소설 성격의 글.
아버지가 돌 가지고 공장을 운영하는데, 부도가 나서 삼촌집에 맡겨진다. 다시 엄마, 아빠와 집을 합치는데, 단칸방에서 어려운 생활을 한다. 통닭을 먹다가 셋이 울어 버렸다. 지금 자기는 대학생이고, “분명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15번.
미군부대 옆에서 식당을 하던 엄마는 흑인병사와 사랑에 빠져 날 낳았다. 아빤 날 버렸고, 엄마와 난 미국으로 이민을 가야 했다. 난 의사가 되었다. 코카인 중독인 멕시코 소녀를 치료하는 장면. 신부감은 한국인이어야 한다는 엄마의 뜻과 달리 난 티나라는 흑인 여성을 사귄다. 저 멀리서 엄마가 선물을 해왔다. 컵이다. 그때 전화가 걸려 온다. 자신의 검진 결과가 안좋은 것 같다. 서둘러 스톱 버튼을 눌러 버린다. (여기서 끝)
-To be continued-
* 더 자세한 정보가 필요한 경우에도 서슴지 마시고 말씀해 주십시오. 추가로 올려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