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메일을 확인해야 한다고 내 방에 온 1학년 학생이 컴퓨터 사양을 보고 놀란다.

“아니 아직도 윈도우 98을 쓰는 분이 있군요!”

내 컴퓨터는 구닥다리다. USB도 안되고, 인터넷에 떠도는 동영상도-물론 내가 컴맹이라 그런 것도 있지만-대부분 볼 수 없다. 심지어 어느 고마우신 분이 이따금씩 보내 주시는 음악 파일도 남의 컴퓨터로 들어야 한다. 한글이 되고 그걸 복사해 인터넷에 올릴 수만 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들어 새 컴퓨터에 자꾸만 눈이 간다. 수업을 할 때마다 강의 자료를 CD에 굽기 위해 생화학교실에 가는 대신, 내 방에서 그냥 USB에 저장을 해 가면 얼마나 좋을까? 자리를 왕창 차지하는 모니터 대신에 얇디얇은 LCD면 폼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가끔씩 했는데 고맙게도 학교에서 컴퓨터를 교체해 준단다. 우리 학교, 정말 좋은 학교 아닌가.


“27일날 일괄적으로 수거하고 설치할 테니 그전까지 자료 다 백업해 놓으세요.”

문제는 이거였다. 백업. 이걸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USB만 되면 폴더째 옮길 거다. CD writer 기능만 되도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둘 다 안된다. 플로피 디스크에 저장을 해? 1.1MB가 고작인 그 디스켓에 하나에 20MB가 넘는 강의록-사진이 많아서 그렇다-을 어떻게 담는가. 한 사흘간 고민했고,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어봤다. 가장 매력적인 제안은 이거였다.

“하드를 뜯으면 되지요.”

“하드...그게 뜯으면 뜯기니?”

“그럼요.”

“새 컴퓨터에 붙일 수도 있니?”

“당연하죠.”

하지만 내겐 그런 능력이 없고, 더 중요한 이유로 그날 수거되는 컴퓨터들은 다른 부서에 배치되어 쓰인단다. 그러니 하드를 떼가는 건 문제가 있다. 또 다른 의견이라 봤자 기술자를 불러서 해결하라 정도인데, 그럼 돈도 줘야 되고, 무엇보다 귀찮았다.


결국 난, 문제를 스스로 해결했다. 파란 닷컴에 가입한 것. 거기서는 무려 1GB 용량의 메일을 제공하지 않는가. 난 내 파일들을 하나씩 하나씩 내 파란메일 주소로 보내기 시작했다. 학교 3인자라는 지위 때문이겠지만 웬 파일들이 그렇게 많은지, 자료를 보내는 데는 월요일 하루 종일이 걸렸다. 혹시 빠진 게 있나 싶어서 어제 반나절을 체크했는데 역시나 빠진 게 있어 메일을 더 보내야 했다. 새 컴퓨터로 작업을 하다보면 “아, 이 파일을 안챙겼구나!” 하는 게 아마 있을 거다.


오늘은 서울서 학회가 있어서 어제 오후 다섯시, 학과장 회의를 하기 위해 방을 나섰던 순간이 만 6년간 동고동락했던 내 컴과의 마지막 이별이었다. 가져가기 좋게 컴퓨터를 옮기면서 덩치만 크고 화면은 작은 내 모니터를 바라봤다. 그 컴으로 난 세권의 저서를 썼으며, 숱한 사람들과 정감어린 이메일을 주고받았고, 강의자료를 만들었으며, 인터넷도-사실은 이게 주된 일이었지만-했다. 그 학생은 내 컴을 구닥다리로 취급했지만, 내겐 더없이 소중하고 고마운 컴퓨터였다. 떠날 때 손이라도 한번 흔들어줄 걸, 냉정하게 나와 버린 게 마음에 걸린다. 잘 가라 내 컴퓨터야. 잘 가라. My pictures에 저장된 유니 사진들아. 그동안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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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6-04-27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아쉬운 이별이네요..^^ 그래도 새로오는 녀석하고 친하게 지내는 것도 즐겁지 않을까요..그런데 유니라니요...혹시 그 섹쉬하게 생겼다는 가수 유니인가요.?

싸이런스 2006-04-27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엉엉 넘 슬퍼요. 정든 것과 이별이라니..흑흑

싸이런스 2006-04-27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등!

마태우스 2006-04-27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싸이런스님/저도 슬퍼요. 싸이런스님이 미국 계셔서...
메피님/당근 그 유니죠!!! XP 쓰는 게 좀 무섭긴 하지만....새 친구랑 잘 지내야죠

조선인 2006-04-27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컴퓨터에 정들긴 쉽지 않은데, 역시 마태우스님.

비로그인 2006-04-27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바로 그 이유로, (마지막 단락의 이유들, 단 유니 사진 제외) 아직도 제 개인 컴퓨터를 안바꾸고 있다는 것 아닙니까! 알라딘에서 책 한 권 살 때에도 회사 컴퓨터로 살 때의 두 배의 시간이 걸리고 부팅하면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건만 귀찮음과 정듦이 가장 큰 문제일 겁니다.
덧붙이기-선명도는 얇은 LCD보다 기존의 CRT가 더 한수 위일 거에요. 부피 면이 다르겠지만서도.^^

sweetmagic 2006-04-27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일로 붙인 파워포인트 자료 일부 사진이 누락되기도 합니다. 물론 씨디로 구워도 마찬가지 이기도 합니다만....
메일로 보낼 자료 하드 한곳에다 몰아놓고 이거 그대로 새 컴에 옯겨 주세요
하시면 기사님들이 알아서 다~~ 해 주십니다~ ^-^ 진짜 장말 귀찮으면 제가 전화해 드릴게요 소중한 강의자료 잃지마세용 ~

다락방 2006-04-27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가요, 마태우스님의 컴.
저도 인사하는거예요, 작별인사.

2006-04-27 1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자림 2006-04-27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년째 타고 다니는 제 차와 헤어질 때가 되면 저도 그런 마음이 들 것 같아요.

비연 2006-04-27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 보고 잔뜩 기대하고 왔었답니다...ㅋㅋㅋ
컴과의 이별이라...항상 저도 그넘의 저장문건들 옮기는데 골머리를 앓는다는..ㅠㅠ

하루(春) 2006-04-27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서야 LCD의 세계로 입문하시는 군요. LCD로 바꾸면 내가 언제 그런 투박한 놈을 썼었나 싶으실 거예요. 축하~

플라시보 2006-04-27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이제 새로운 PC로 작업을 하시겠네요. 저도 몇번인가 컴퓨터를 떠나보내고 바꾸고 했는데 지금 쓰는 컴퓨터역시 결혼하면서 바꾼겁니다. 성능은 좋은데 뭐랄까 아직 정이 안가요. 너무 얇은 본체와 LCD모니터. 그것보단 예전에 책상 내려앉을것만 같던 묵직한 녀석들이 훨 더 그리워요. (참 저도 자료 다 옮기느라 메일을 이용했더랬어요. 뭐 별로 담아놓은게 없어서 그냥 hot메일로 충분히 해결했답니다. 대충 압축해서 보내놨거든요)

moonnight 2006-04-28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컴퓨터 고친 기념으로 댐시 들어와봤더니 서운한 페이퍼군요. ㅠㅠ 정든 것과의 이별은 늘 좀 그렇죠. 저도 직장에 있는 컴퓨터가 훨씬 새거고 모니터도 시원스럽지만 집에 있는 고물컴퓨터가 더 정이 가더라구요.

모1 2006-04-28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이 많이 드셨겠어요.

마태우스 2006-04-29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1님/그럼요. 몇년이나 같이 있었는데요
달밤님/님도 정이 참 많으시군요 님의 귀염성은 정에서 나오는 듯...^^
플라시보님/엘시디 모니터, 낼 학교가면 바뀌어 있을 거예요. 근데 잘 될지 걱정되네요.... 님도 메일을 이용했다니 반갑습니다
하루님/사실 엘씨디는 부럽더라구요^^
비연님/USB만 감지되면 문제가 없는데 그게 안되서 고생했죠 저는..
속삭이신 분/님의 아름다운 맘씨 꼭 기억할께요^^
다락방님/하핫, 감사합니다. 미모에 맘도 곱군요
매, 매직님/벌써 일은 벌어진 뒤예요...누락된다구요? 앙앙 어떡해...
주드님/아아 님도 정이 많으시군요!! 멋지십니다...
조선인님/제 정은 다른 분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군요 흐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