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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사
백가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9월
평점 :
11월의 어느날, 문학과 지성사와 인터뷰를 하는 영광을 누렸다.
인터뷰가 끝나고 난 뒤 문지의 책을 갖고싶은 만큼 (까지는 아니지만) 고르라고 해서
집어든 게 바로 <사십사>라는 단편집이었다.
요즘 갈수록 책을 읽지 않는지라 백가흠 작가를 알지 못했지만
표지 그림이 왠지 끌렸다.
내 느낌은 적중했다.
여기 실린 단편들은 하나같이 재미있었다.
특히 마음에 든 건, 처음 두 편을 제외하면 죄다
스토리가 잘 나가다 '그쪽'으로 빠지는 점이었다.
<아내와 사는 차차차>를 보자.
부산에 출장온 주인공은 호텔 엘리베이터에서 한 여자를 만난다.
잠시 뒤 그는 그녀가 모는 승용차에 타고 횟집에 가고,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낯선 곳에 누워 있었다...그녀는 창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149-150쪽)
남자는 묻는다.
“우리, 했어요?” (150쪽)
표제작인 <사십사>의 주인공은 44세 여자교수인데,
과거 지도교수를 우연히 만난다.
지도교수는 말한다.
“너무 반가워서 눈물이 다 나려고 한다 야....정말 그리웠단 말이야.” (212-213쪽)
뭔가 좀 수상하다 싶었는데 아니나다를까, 과거 그녀가 학생이던 시절
주인공은 지도교수와 이런 대화를 나눈다.
주인공: 계속 이렇게 지낼 수는 없잖아요. 저도 이제 서른이에요...결혼해요.
지도교수: (싸늘한 표정으로) 이혼이라도 하란 말이니? 너, 나랑 놀자는 거야?
그랬던 인간이 그로부터 15년이 지나 다시 만났을 때, 이렇게 지분거린다.
“저기 있잖아, 우리 근사한 데 가서 저녁이라도 먹자....와인 바도 좋구 말이야.” (225쪽)
그가 뭘 원하는지 안봐도 비디오다.
이게 우리 남자들의 실제 모습이라 더 재미있는 것 같다.
<네 친구>는 오랜 기간 친구로 지내던 세 명의 여성이 카페에서 만난 뒤 벌어지는 이야기다.
정말 공교롭게도 그 카페의 사장은 일전에 셋 중 하나와 나이트에서 만난 사이.
같이 나가서 술을 마신 뒤 깨보니 낯선 남자와 차에 있다.
여자가 묻는다.
“우리, 한 건 아니죠?”
남자의 대답, “하하하, 귀여운 거 알아요? 했으면 어떻고, 안했으면 어때요.” (254쪽)
요즘 좀 금욕적으로 살아서 그런지 이런 대화를 읽는 게 너무 재미있다.
원래 소설집은 절반 정도만 재미있어도 건졌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재미있다.
‘했어요?’란 대사가 나오지 않는 <사라진 이웃>과 맨 마지막에 실린 광신도 이야기까지,
이쯤되면 ‘월척을 낚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를 소재로 한 비극이 있는 게 애견가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수 있지만,
소설이 워낙 재미있다보니 양해가 된다.
알라딘에 리뷰를 올리려고 봤더니 이미 20편의 리뷰가 올라와 있다.
나만 모르고 있었나보다, 백가흠 작가의 위대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