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험 잘봤니?”
학생 시절, 시험이 끝날 때마다 이런 질문을 서로에게 하곤 했다. 그 질문을 통해 우리는 “나만 못본 게 아니다.”라며 안도할 수 있었고, “내가 못본 이유는 시험 문제가 이상해서였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하곤 했다. 비록 못봤다고 답한 애들의 상당수가 내숭이었다는 게 나중에 밝혀졌지만, 우리는 매번 그런 질문을 통해 시험 후의 우울함을 달랬다. “못봤다.”는 대답을 기대하고 한 질문인지라 “아니, 난 잘봤어.”라고 대답하는 애가 있다면, 겉으로는 “좋겠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흥! 재수!’ ‘잘났어 정말!’이라며 욕을 해댔다.
전에도 말했지만 우리 학교는 예과 때 토익 점수 600점을 넘어야 본과에 진입한다. 12월인 지금도 그 점수가 안되어 불안에 떠는 학생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토익 합격증을 발부받은 상태. 어제 여학생 둘과 같이 밥을 먹다가 한 학생에게 토익 점수를 물어봤다.
나: 토익 몇점 맞았어요?
학생1: 920점이요.
나: (잠시 당황--> 부러움-->시기, 질투) 아니 누가 점수를 말하랬나요? 600점 넘었나 안넘었나만 말하면 되는거지.
학생 1: ??
나: 아니 학생이 그렇게 영어를 잘해요? 저랑 영어로만 얘기해 볼까요? Do you speak with me in English?
학생1: 아니어요... 저 영어 못해요.
나: 아니 토익 920이 무슨 영어를 못해요. (막 전화를 끊은 학생 2에게) 우리끼리만 우리말로 얘기합시다.
학생 2: 어? 무슨 일 있었어요?
나; 아니 이 학생이 토익이 920이래요.
학생 2; 좋겠다...
글로 옮기니 내가 진짜 화를 낸 것처럼 느껴질지 모르지만, 무척 장난스럽게 얘기한 거였다. 하지만 정말 부럽긴 하다. 한번도 토익을 볼 일이 없어서 다행이지, 내가 토익을 봤다면 600점을 넘었을까 의문이다. ‘고 3 때 영어 실력이 가장 좋다.’는 고교 때 선생님의 말씀이 맞다고 가정하면, 졸업 후 20년이 지난 내 영어 실력이 어디까지 추락해 있을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더구나 듣기 시험을 보는 요즘 애들과 달리, 그 당시엔 대학입시 50문제 중 40문제 이상이 독해였으니, 외국 사람의 특강을 들을 때 하품만 열나게 하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토익점수가 곧 영어 회화를 잘하는 능력을 말해주는 게 아니라는 건 나도 익히 들어 알고 있다. 토익, 토플에 목숨을 거는 나라가 우리와 일본밖에 없다는 얘기도 자주 들었다. 그럼에도 토익점수가 평가의 한 잣대인 사회에 살고 있고 또 앞으로도 살아야 하기에, 그리고 그런 가치관에 깊이 물이 들어버렸는지라, 나도 어디가서 자신있게 “토익 900 조금 넘지 아마?”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끔씩 한다. 거기에 더해서, 학생들에게 600을 넘겨야 본과 온다고 하면서, 나 자신의 토익 성적이 거기에 못미친다면 좀 부끄럽지 않겠는가.
* 실은 3년 전에 토익을 한번 보려고 준비를 했었다. 출퇴근 시간에 하면 충분하다 싶었다. 하지만 한달이 못가서 흐지부지됐는데, 가장 중요한 이유는 ‘동기부여’가 안됐다는 것.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지?”라는 생각은 더 이상 공부를 지속할 수 없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