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를 모시고 청계천에 다녀왔습니다. 거기 가는 게 대단한 일인 양 할머니는 꽃단장을 하셨고, 약속시간보다 한시간 전에 준비를 다 하시고 기다립니다. 종로 2가에서 버스를 내렸고, 아래로 내려가 청계천을 걸었습니다. 물이 흐르는 게 약간은 신기했지만, 라인강에서 헤엄을 쳤고, 세느강에서 조약돌을 줍고, 아마존에서 물고기를 잡았던 제게 청계천은 그리 대단한 게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에게는 그렇지 않나 봅니다.

“언제 이렇게 만들었다냐”

“이 넝쿨 좀 봐라. 세상에, 저기 풀도 있네!”

그전 청계천의 기억이 별로 남아있지 않다면서도 할머니는 물이 흐르는 청계천이 마냥 좋으셨나 봅니다. 제 휴대폰과 할머니 휴대폰으로 사진을 여러장 찍었습니다. 할머니를 배경으로 한 사진을 휴대폰 대기화면에 저장해 드렸지요. 김두한이 활약했던 수표교에서도 사진 한 장을 찍어드렸습니다.

“할머니, 김두한 아세요?”

“알제. 김두한이면 전에 대통령 했던 사람 아니냐”

“그 사람은 전두환이고요, 김두한은 싸움 잘했던 사람이잖아요”


사람은 나이가 들어야 철이 들지요. 하지만 그 철이 드는 건 서서히가 아니라 어느 한순간일 겁니다. 직접 청계천에 나와 흐르는 물을 보다보니 전에 썼던 글을 반성하게 되더군요. 원래 제가 욱하는 성질이 있어서 그런지, TV에 청계천 물이 나오니까 저도 그만 이성을 잃어버렸나 봅니다. 그런 소치로 “이렇게 대단한 청계천을 왜 뭐라고 하는 거냐”는 이상한 글을 썼던 거구요. 무수한비판에 궁색한 변명만 늘어놓다가, 그만 얘기하겠다고 입을 닫아 버렸었지요.


청계천에 심드렁한 저나, 그저 좋아만 하시는 할머니나 청계천 물이 어떻게 흐르는지, 물 속에 뭐가 들었는지 알게 뭡니까. 저희처럼 마냥 들떠서 청계천을 걷는 시민들도 그건 마찬가지지요. 하지만 오랜 기간 환경만 연구하셨던, 그래서 저희보다 훨씬 더 많이 아시는 분들은 비판을 하셔야 합니다. 그런 비판들이 나중에 또 이런 공사를 했을 때 보다 친환경적인 구조물이 탄생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지 않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청계천에 열광해야 하는 건 아닐진대, 왜 제가 “니들 왜 청계천을 싫어하냐?”는 글을 썼는지 모르겠습니다. 댓글로 저를 깨우쳐 주신 많은 분들께, 그리고 그 와중에도 제게 추천을 해주셨던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저 혼자같으면 뚝섬까지 길을 따라 걸었겠지만, 89세인 할머니는 허리가 아프다면서 종로 3가도 못가서 그만 가시겠답니다. 할머니를 모시고 한일정이라는 음식점에 갔습니다. 저는 왕만두를, 할머니는 냉면을 시켜드렸지요. 저보다 훨씬 전에 식사를 하신 할머니는 배가 부르다며 냉면의 반을 제게 덜어 주십니다. 잽싸게 다 먹고 할머니를 바라보니 할머니는 냉면 국물까지 다 드시고 계십니다. “여기 국물은 어떻게 했기에 이리도 맛있다냐?” 제가 너무 많이 뺐어먹은 것 같아서 죄송했습니다.

“할머니, 우리 나온김에 영화나 볼까요?”

나왔다가 너무 빨리 들어가는 것 같아 극장에 갔습니다. 시간대가 맞는 게 없어서 할수없이 <가문의 위기>를 또 봤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할머니께 설명을 해드렸는데,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이러십니다.

“뭐가 뭔지 당최 모르겠다...”

침을 튀겨가며 줄거리를 설명했더니 그제서야 “아이고, 깡패가 검사를 사귀어?”라네요.


피곤하셨는지 할머니는 지금 소파에서 주무십니다. 입시 때문에 저는 내일 아침 일찍 학교로 가야 하지요. 길고 긴 일요일 하루를 할머니는 또 뭘 하면서 보내셔야 할까요. 그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파오네요. 불순한 의도로 만든 하천이지만, 오늘 하루는 이명박이 할머니한테 효자 노릇을 했습니다. 이 말에 반대하실 분, 설마 안계시겠지요?^^


* 컴맹만 아니면 제가 찍은 청계천 사진을 더불어 올리고 싶은데요, 그러지 못했습니다. 가끔씩 컴맹인 게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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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10-15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머니 좋아하셨음 그나마 다행이지요^^

싸이런스 2005-10-15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 덕에 눈시울이 불그레... 마음이 따땃해지네요. 좋은 글 감사..+ 추천

비로그인 2005-10-15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형! 물의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데? 그게 왜 물의야? 생각을 나누고자 시도한 것 뿐인데..
그런글을 올린 것이 물의였다면 어떤 글을 어떻게 올려야 하는걸까? 하는 생각이드네.
나도 그 글을 통해서 다양한 의견을 들었고, 다양한 방향으로 하나의 문제를 접근 할 수
있다는 것이 아주 좋았어. 아주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누구나 그렇지 듯이
누구나 경험을 하고 나서는 다른 생각을 하게되는 것이 당연하고 더 많은 것을 알게되면
또 다른 방향으로 바라보게되는 것이고. 다 그런 것 아닐까? ^-^ 중요한 것은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는 것 아닐까? ^-^*

stella.K 2005-10-15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할머님 건강하셔서 손자와 함께 청계천 걸으시니 좋으셨겠는데요 뭐. 항상 건강하셔서 마태님과 함께 하시는 시간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추천 한방!^^

2005-10-15 17: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모1 2005-10-15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머님이 정정하신가 봅니다. 너무 좋아보여요.(역시나..그 동네 안살아서 그런지...청계천에 대해 아무생각이 없어요. 후후..그냥 집앞에 흐르는 XX천이라면 좀 다를지도..참고로 제가 사는 곳은 다리가 많고 아래에 도랑정도(?)되는 물이 흘러요. 도랑(?) 양옆으로 풀밭이 잇어서 사람들이 운동도 하고 저녁에 간이술집도 생기고...뭐 하여튼 그렇습니다.)

인터라겐 2005-10-15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세상에서 제일 가는 미인과의 데이트였네요.. 참 마태님처럼 이렇게 고운 마음씨 갖고 계시는 분께 왜 임자가 없는거냐구요...

마태우스 2005-10-15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라겐님/그게요, 마음만으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젤 미인과의 데이트라... 호호, 그렇군요!
모1님/다리가 많고 도랑이 흐른다면 굳이 청계천까지 갈 필요가 없지요. 간이술집마저 있다면 만사 오케이죠!
속삭이신분/참을인 세번이면 말도 잡아먹는답니다^^
스텔라님/추천 감사합니다. 할머니의 건강이 저도 감사하죠. 제가 효도할 기회를 주시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가시장미언니/그게 왜 물의냐면 글이 도발적이었기 때문이고, 또 그 후에 내가 단 댓글이 거의 어거지 수준이었기 때문이지. 그 토론으로 인해 뭔가를 배워간 분들도 계시겠지만, 어쨌든 내가 좀 더 사려깊게 글을 썼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어. 결론도 좀 무리였구^^
사이런스님/님 덕분에 제 얼굴이 불그레...혹시 소주 때문일까요^^ 하여간 여러가지로 고맙습니다
물만두님/그러게요 좋아하셨으면 다행이죠^^

ceylontea 2005-10-15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운내세요...
할머님께서 좋아하셨다니 저도 기쁩니다..

mong 2005-10-15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과 할머님 두분께 그런 따뜻한 시간을 주었다면
청계천은 충분히 좋은 공간인거죠
효자 마태님께 만세대신 (저희 아버님 기절하십니다 ㅎㅎ) 추천 ^^

2005-10-16 08: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실 2005-10-17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머니랑 데이트하셨군요~~~
할머니를 위해 '가문의 위기'를 두번 보는 배려를 발휘하신 마태님....
복 받으실거예요~~ 에구 전 언제나 보려나...원~

마태우스 2005-10-16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실님/센스라기보단 ... 마땅한 말이 생각안나서 통과! 호호.
속삭이신 분/그래요, 다행스런 일이죠. 제일 걱정되는 게 치매라도 걸리시면 어쩌나 하는 겁니다. 그걸 걱정하는 게 저 때문이구요, 그래서 전 효자가 아니어요...맨 마지막 줄에 쓰신 거 감사드립니다
몽님/아이 부끄러워요.... 몽님 만세
실론티님/어제 테니스치고 거기 다녀와서 결혼식 갔다가 술까지 마시려니 힘들더라구요...그래도 마음은 뿌듯했어요

세실 2005-10-17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려는 어떨까요? 잉.... 이것도 아닌가? 에구...

마태우스 2005-10-17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센스 할래요 호홋.

마태우스 2005-10-19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범님/아닙니다. 제가 글로만 그러지, 실제로는 그리 잘해드리지도 못합니다. 글 쓰면서 스스로를 반성하고 그런답니다. 정말 잘하는 분들은 소리없이 잘하지요...하여간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