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영화보다 울었다. 제목을 보고 지순한 사랑 이야기겠거니 했지만, 의외로 울지 않으면 안될 장치들이 몇 개 있었다. 그런 것에 좀 걸려 주는 게 예의인 듯, 곳곳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고, 나도 모르는 새 난 그 대열에 동참하고 있었다.

일주일 중 유일하게 밤 시간이 비었던 어제, 난 엄마, 할머니와 영화보러 갈 것을 제안했고, <가문의 위기>를 보려던 내 계획은 <너는 내 운명>을 주장하는 엄마 때문에 바뀌어 버렸다.

맨 처음 할머니랑 영화보러 갔을 땐 정말 쑥스러웠다. 다들 젊은애들, 그 대부분이 쌍쌍으로 온 터에 나 혼자 할머니와 앉아 있노라니, 마치 찌는 여름에 바바리를 걸친 기분이었다. 남들이 “쟤는 애인도 없나봐”라고 비웃는 것 같았던 시기도 있었지만, 그것도 몇 번 반복되다보니 남들의 시선에 익숙해졌고, 요즘은 남들이 날 존경의 눈으로 보는 것같다는 착각마저 한다. 얼마전 영화를 보다 말고 할머니 팔짱을 낀 채 화장실로 모시는데, 다들 “쟤가 내가 아까 말한 그 효자야”라고 말하는 듯했다. “어머나 멋지게 생겼다!”란 말은 확실히 내 환청이겠지만.

전도연은 참으로 예뻤고, 황정민은 농촌총각 그 자체였다. 전도연의 연기야 정평이 나 있지만, 황정민이 연기를 그리 잘하는 줄 미처 몰랐었다. 하여간 그 둘이 만나니 영화 스크린은 현실이 되어버렸고, 난 황정민이, 때로는 전도연이, 간혹가다 황정민의 가족들이 된 채 영화 속에 있었다. 꼭 손예진같은 청순가련이 나오지 않아도 눈물을 흘리게 할 수 있다는 걸 오랜만에 느꼈다. 이제부터 스포일러.

이 영화의 핵심 키워드는 에이즈다. 그걸 뛰어넘는 지순한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게 이 영화의 목적이니까. 그런데.
나: 할머니, 에이즈가 뭔지 알아?
할머니: 몰라.
나: 죽는 병이야.
할머니: 그럼 쟈가 독약을 탔냐?
나: 그게 아니라 성병이야.
할머니: 뭐? 전화가 왔어?
나: (큰소리로) 성-병-!
다들 날 쳐다봤다. 이쯤해서 엄마가 나설 차례, “민아, 그냥 보자, 응?”

택시를 타고 집에 가다가.
나: 할머니, 에이즈라고 들어본 적 있어?
할: 들었는데 까먹었제.
엄마: 걸리면 죽는 병 있잖아.
할: 들어본 것도 같아.
에이즈가 뭔지 모르는 할머니는 이 영화가 왜 슬픈지 모르셨다.

오늘 아침, 결혼식 때문에 부산을 가다가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나: 할머니, 그게 문둥병 같은 거야. 그거 걸리면 다들 가까이 안하려고 하잖아. 근데 그 농촌 총각이 그래도 여자를 좋아하니까 아름다운 거라구.
할머니: 에이즈 나도 알아. 옛날에 나 어릴 적에 들은 적이 있어. 그것 때문에 남자들이 맘대로 가시내 못따먹잖아.

옛날이라니. 어릴 때라니. 에이즈가 나온 게 1980년대 후반인가 그런데, 할머니가 에이즈를 제대로 이해하긴 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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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春) 2005-09-25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머님은 매독인 줄 아시는 거 아닐까요?

울보 2005-09-25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참 착한 손자네요,,
언제나 오래도록 마태님곁에 할머님이 계셨으면 합니다,
잘하셨어요,,,박수

Phantomlady 2005-09-25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나쁜 게 존재하는 지도 모르고 사시는 것도 행복일 거 같아요 ^^

야클 2005-09-25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효자시군요.
효자들은 장가를 늦게 가는가 봅니다.

일찍 가는게 효잔가???

바람돌이 2005-09-25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효자 마태님에게 한표!
저도 친정어머니와 가끔 영화를 보러 간적은 있었는데 그것도 언제였던지 기억도 안나누만요.
마태님 덕분에 엄마랑 영화라도 한 편 보러갈까 싶어요. ^^

클리오 2005-09-25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흐흐.. 성병 때문에 '남자들이 여자를 마음대로 못따먹다니..' 새로운 해석이십니다... ^^ 글구, '다들 “쟤가 내가 아까 말한 그 효자야”라고 말하는 듯했다'라구요? '말했다'가 아니라 '그런 듯 했다'는 거죠? 이제 환청까지 들으시다니... 크흐흐.... (내가 오늘 왜이럴까... ^^;;;)

검둥개 2005-09-25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존경의 눈으로 봐드릴께요. 어머 멋져요!!!

진주 2005-09-25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머님께서는 매독이나 임질로 이해하셨다면 정확한 거 아닌가요?
요즘이야 그 병들에 대한 치료약이 나왔지만, <꼿가치피어 매혹케하라>를 보면 매독의 치료약이 없어 시체요법, 생간요법, 수은요법 등 무시무시한 민간요법들이 총동원되고 코가 문드러지는 끔찍한 질병이었으니 요즘 에이즈와 다를 바가 없었어요.

마냐 2005-09-25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으...요즘 서재 곳곳에서 올라오는 영화평들은 모조리 염장질임다. 느무느무 보고싶은 영화에 또 추가....암튼, 효자효손 마태님 만쉐이~

kleinsusun 2005-09-25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마태님 정말 효자시군요.
그 극장엔 마태님의 그런 모습에 반한 미녀들이 엄층 많았을꺼예요. ^^

마태우스 2005-09-25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서님/반하면 뭐합니까. 다 쌍쌍이 왔는데^^
마냐님/맞다 마냐님은 영화 못보시는군요! 하지만 외화는 가장 먼저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신데렐라맨 보고 싶은데..
진주님/그런가 봅니다. 매독인 줄 아셨나봐요. 옛날엔 매독도 에이즈 취급을 받았겠네요...
검둥개님/헤헤 저를 알아주는 이, 님밖에 없습니다
새벽별님/제가 좋아서 웃는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클리오님/친구가 제게 이러더군요. 우울증이 생길래야 생길 수가 없다구. 테니스 칠 때 잘한 것만 기억한다나요^^ 그러니 환청이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바람돌이님/알라딘에서만 효자가 되요. 사실은 효자도 아닌데^^ 다음에 또 갈수밖에 없습니다.
야클님/장가와 효자는 사실 별 관계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스노우드롭님/그럴지도 모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검은비님/할머니께 그렇게 전해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울보님/그전에 워낙 해드린 게 없으니, 철들고 나서는 잘해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루님/지금으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moonnight 2005-09-26 0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마태우스님은 효자세요. 흠.. 할머님께서 에이즈를 너무너무 잘 이해하시는 거 같아서 사실 깜짝 놀랐답니다. ^^; 맞아요. 옛날엔 매독도 에이즈에 버금가는 병이었겠지요. 유럽에서 어제밤에 돌아왔는데 잠이 안 와서 이러고 있어요. 근무가 슬슬걱정되네요. ㅜㅜ;; 즐거운 월요일 여시기 바래요. ^^

모1 2005-10-03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멋지십니다.(마태우스님 팬할래요.)
저는 가끔씩 엄마, 아빠 영화표 끊어드리는데..좋아하시더군요.(이상하게 올해는 영화예매권이 상당히 많이 당첨되어서 엄마, 아빠...영화구경 더더욱 잘하셨어요.)
참..그런데요. 영화 선택도 중요한 것 같아요. 결혼은 미친짓이다...시사회권이 당첨되어서 엄마랑 갔거든요? 그 것 보고 민망해서 혼났어요. 성관계맺는 장면도 자주 나오는데다가 내용이 결혼따로 연애따로 하는 내용이라서..아무런 사전정보 없이 갔다가 얼마나 불편하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