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 의학대학원 회의가 있었다. “자료를 준비해서 9월 9일날 만나자”고 한 게 몇 달 전 일로 여겨졌는데, 그날이 성큼 와버린 것이다. 마감에 임박해서 이틀간 머리를 싸맨 끝에 난 열한장짜리의 그럴듯한 보고서를 만들어냈고, 사람 수만큼 복사해 놨다. 다시 읽어보니 의학대학원에 가지 말아야 할 이유를 이렇게 잘 정리하기도 힘들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의기양양하게 회의장에 간 나는 치대에서 준비해온 자료를 보고 갑자기 불안해졌다. 그쪽에서 준비한 자료는 무려 50장이 넘었으니까.

“뭘 그렇게 많이 하셨어요?”

“그냥 하라는대로 했는데요”

기획실장의 주재 하에 회의가 시작되었다.

“의대 쪽에서 먼저 발표하시죠”란 말에 난 떨리는 목소리로, 그러나 간결하게 회의 자료를 브리핑했다. 그런데 중간중간 기획실장의 추궁이 이어졌다.

“교육과정에 대한 자료는 왜 없지요?”

“그, 그게요... 그다지 교육과정이 변할 것 같지 않아서 자료에서 뺐습니다”

“그렇다면 1억6천씩 받아서 워크숍을 한 대학들은 아무런 결과도 내지 않았나요?”

“그,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말은 공손했지만 사실상 ‘작살난’ 거였다.

“이런 식이라면 총장 앞에서 의학대학원으로 가지 말자고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준비한 자료들은 다 우리가 알고 있던 거 아닌가요?”

난 그저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훨씬 긴 시간을 잡아먹은 치대의 발표는 나 때와는 달리 화기애애했다.

“아, 그런 논리라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겠네요”

“그러니까 대학교육 자체도 훨씬 부실화된다는 거죠?”

시간은 징그럽게도 안갔고, 푹신한 의자는 바늘방석이었다. 그냥 ‘총장님 원하시는대로 의학대학원 갑시다’라고 선언하고 싶었을 정도. 발표가 끝나자 기획실장은 우리, 아니 나를 보면서 말했다.

“자료를 다시 준비해서 9월 말에 만나죠”


참석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의대 쪽 위원들에게 난 “부실하게 준비해서 죄송하다”고 얘기했다. 그분들의 말씀.

“그러게 좀 잘 준비하지....”

“치대 쪽 자료를 보니까 우리 게 얼마나 부실한지 알겠다”

마치 나와는 상관없다는 이 말들은 내게 상처를 줬다. 우리 학장님은 왜 60대를 추진위원으로 뽑은 것일까. 전부 30-40대인 치대는 위원들끼리 파트를 나누어 자료를 준비한 모양이었고, 모든 위원이 그 내용을 숙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자료준비에 관심이 없었을뿐더러 “치대 쪽 자료를 보고 다시 준비를 하세요”라고 말하는 걸로 보아 이번에도 나 혼자 낑낑대며 자료 준비를 해야 할 모양이다.

한명이라도 "내가 그 학교들 자료 좀 받아줄까?“라고 말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회의가 끝났을 때, 그래도 위원들이 수고한다고 기획실에서는 학교에서 타낸 수표 한 장씩을 우리에게 줬다. 돈은 똑같이 받고 나만 일한다는 게 난 못내 억울했다. 참고로 난 그날 술약속이 있어서 술을 와장창 마셨으며, 기차를 탈 때 혹시나 지갑을 털릴까봐 그 수표를 양말 속에 넣었다. 다음날 엄마한테 의기양양하게-자료준비할 생각에 마음은 심난했지만-수표를 드렸다.

“그거 제가 야단맞어가면서 번 돈이어요”

엄마의 말씀, “어머나 이렇게나 많이! 야단을 굉장히 많이 맞았나보네?”

“네.... 근데 엄마, 그거 양말 속에 넣어둔 거니까 키스하거나 그러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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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e 2005-09-12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온갖 고생은 혼자서 다하셨는데 공은 나눠가지는 거, 정말 고통스럽죠. 게다가 다시 준비를 하셔야한다니.
이번에 한 번 준비해 보셨으니 다음엔 좀 수월해지지 않을까요.^^(수월해져라, 수월해져라~)

릴케 현상 2005-09-12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생이 많으시군요...수업시간에 발표한 거 말고는 그런 자리 가본 적은 없지만 대따 힘들 것 같네요^^

호랑녀 2005-09-12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편이 깨지고 들어오면 내가 기분도 맞춰주고 눈치도 좀 봐주는데, 마태님은... 불쌍해...
눈을 눈썹 밑으로 붙이시고 결혼하시면, 이럴 때 위로가 될 수도 있는데...ㅜㅜ =3=3=3

클리오 2005-09-12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이.. 이러면 못한다고 무지 속상한 듯이 말해버리죠.. 그리고 원래, 발표 못하는 것은 한번 민망하고 끝나지만, 다시 준비하라고 하는 것처럼 속상한 게 없는데... --;; 못하겠다고 해버리세욧!!!

2005-09-12 1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검둥개 2005-09-12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어쩜 좋아요. 50장은 상당히 쎘네요.
9월 말에 하실 때는 멋지게 역전시키실 거라 믿습니다. ;)
화이팅 화이팅 화이팅!!!

히나 2005-09-12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단을 굉장히 많이 맞았나보네.. 이런 말 하면 안 되지만 마지막 어머니 말씀에 넘 웃겼어요.. 추천합니다 기운내요 화이링!!!

울보 2005-09-12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화이팅!!!!!!!!!!!!!!!!!!!!!!

moonnight 2005-09-12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속상해요. ㅠㅠ 고생은 혼자 다 하셨는데 야단도 혼자 맞으시고 그런데, 다른 교수님들이 수표 다 받으시던가요? -_-+++

panda78 2005-09-12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효.. 일을 혼자 했으면 수표도 혼자 먹어야 하는 것을....
기운내셔요, 마태님.

sweetrain 2005-09-12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 토닥토닥. ㅜ.ㅜ

커피우유 2005-09-12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그 이런...진작 자료좀 모아서 드릴걸. 마치 제가 마태님 등에 작살을 꽂은것처럼 맘이 아프구만요 ^^;;
마태님. 무슨 자료가 필요하세요? 알려주심 가능한한 모아보겠슴다..
근데 제 일이란게 의학대학원을 갈라는 사람들을 위한 일이라...의학대학원이 생기지 말아야 할 이유로 정리를 할라면 가공을 좀 하셔야될거에여..^^;;
암턴....필요한 자료 있으심 요청하시구요. 심기일전 하소서.

manheng 2005-09-12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ㅠㅠ 고생이시네요... 60대라도 다 같이 해야 하는거 아닌가 ㅠㅠ 나쁘다 ~ 마태님 홧팅입니다. +_+

ceylontea 2005-09-12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런... ㅠ.ㅜ

비로그인 2005-09-12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돈은 똑같이 받고 나만 일한다는 게 난 못내 억울했다.-> 이론이론. 나쁘다~~
혹시나 지갑을 털릴까봐 그 수표를 양말 속에 넣었다 -> 털려본 경험이 있군. ㅋㅋ
그거 양말 속에 넣어둔 거니까 키스하거나 그러지 마세요” -> 친절한 마태형. ^-^
화이팅!! 짝짝짝!! 화이팅!! 짝짝짝!!

2005-09-13 0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산사춘 2005-09-13 0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죄송해요. "야단을 굉장히 많이 맞았나보네?" 이 말씀에 마구 웃었어요.

마태우스 2005-09-13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사춘님/호호, 저도 웃었답니다
속삭이신 ㄴ님/부끄럽습니다 으흐흐흐.
가시장미님/정말 친절한 마태가 되어야 할텐데... 지갑 털려본 적 꽤 많습니다
실론티님/그러게요...
만헹님/그죠? 나쁘죠? 오늘도 친구한테 아쉬운 소리-자료 좀 주라-했다는...
커피우유님/님과 제가 그렇게 연결이 된다니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하지만 제게 필요한 자료는 의학대학원 가는 학교의 교육과정이 어떻게 변했는가 하는 거라서 관련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아무튼 크게 감사드립니다
단비님/전 괜찮습니다...
판다님/하핫, 그 수표 다 먹으면 체하죠^^]
문나이트님/네.... 좀 도와달라고 해야겠어요...
울보님/다음주부터 열심히 할래요^^
스노우드롭님/어머님의 유머감각이 빛을 발한 거죠. 가끔씩 웃기신답니다^^
검둥개님/그래야겠죠? 치대 자료 봤더니 한숨만 푹푹..
클리오님/정말 못하겠다고 말하고 싶어 죽겠어요...다시 하려니 어찌나 짜증나는지..하지만 지금까지 별로 한 게 없어서 억울하진 않습니다
호랑녀님/깨지는 건 일년에 하루이틀이구, 결혼하면 일년내내 깨져야 하는데요?
자명한산책님/연구에 보탬이 안되는데다 혼자 하려니 하기싫어 죽겠습니다...격려 고맙습니다
서연사랑님/수월해졌으면 정말 좋겠어요 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