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의준비를 하다가 애들 나눠준 유인물의 한페이지가 빠진 걸 발견했다. 컴퓨터로 뽑아서 복사를 해가지고 내일 애들한테 나눠줘야겠다는 깜찍한 생각을 했고, 복사실로 갔다. 그게 시작이었다.
복사가 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난 문구점을 겸한 복사실 안을 기웃거렸고, 그 과정에서 충동구매라는 걸 했다. 포스트잇 왕창, 스카치테이프, 싸인하느라 동이 난 검은색 수성펜 몇자루, 집게, 아주아주 큰 왕풀... 아주머니는 복사물과 더불어 문구류를 박스에 담아 주셨다.
-박스를 들고 방에 왔다. 문구류를 꺼내 재배치하려다, 그냥 박스채로 보관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방 정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책상 위에 널려있던 두꺼운 테이프와 가위, 풀, 자 등을 박스에 모았고, 창가 틀에 자리를 만들어 박스를 올려놓았다. 한결 보기가 좋았다. 그러자 창틀에 쳐박아 둔 디스켓 박스가 눈에 밟혔다.
-B 드라이드용 디스켓들, 한때 거기다 정보를 저장했지만 요즘엔 누가 그걸 쓰는가. 와장창 버리려다 마음이 약해져 캐비넷에 보관하기로 했다.
-캐비넷을 여니까 여기 와서 받은 공문들 7년치가 가득 들어있다. 도대체 그 공문들을 누가 본다고? 어떤 공문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화장실에서 박스를 하나 주어와 공문들을 닥치는대로 쓸어담았다. 아예 다 버리려다 아주머니가 놀랄까봐 절반만 버렸다. 참고로 말하면 내 옆방에 있는 선생님이 연수를 갔다 왔는데, 방을 대대적으로 정리하느라고 몇십박스 분량의 쓰레기를 복도에 배출해 놓은 상태였다. 그 와중에 나까지 그러면 너무하잖아?
-캐비넷에 생긴 자리에다 디스켓과 요즘 사재기한 내 책들을 꽂았다.
“참, CD도 여기다 보관하자!”
-강의에 쓸, 혹은 썼던 CD들, 백신과 한글 CD, 그리고 컴퓨터 관련 CD들을 캐비넷에 넣기위해 책상서랍을 열었다. 이런이런, 그간 긁은 카드 명세서와 결제 청구서 몇 년치와 휴대전화 요금 자동이체 영수증이 서랍마다 가득하다. “이런 걸 왜 보관하고 있지?”
난 다시금 박스를 구해 그것들을 와장창 쓸어담았다. 서랍이 훨씬 가뿐해졌다.
-덥다는 생각이 들어 냉장고 문을 열었다. 이런, 김치냄새가 물씬 풍긴다. 보름쯤 된 김치가 겁나게 냄새를 풍긴다. 얼마 남지 않은 거라 비닐에 싸서 버리고 냉장고를 치웠다....
나의 오전은 이렇게 흘러갔다. 9시 즈음하여 학교에 왔다고 뿌듯해하며, “빨리 강의준비 해야지!”를 외치던 내가 오후 1시가 다 되도록 청소만 하고 있을 줄이야. 밥을 날림으로 먹고 그때부터 허겁지겁 강의준비를 시작했다. 늘 하는 강의, 뭐 새삼스레 준비할 게 있나 싶겠지만, 작년까지는 파워포인트 강의를 거의 하지 못했기에 올해는 강의를 할 때마다 새로 만들어야 한다. 게다가 그간 설렁설렁 하는 바람에 내일 강의는 양이 겁나게 많아서, 어제 하루 종일을 쏟아부었지만 다 만들지 못했었다.
지금도 난, 언제 끝날지 모르는 파워포인트 만들기를 하고 있다. 슬라이드 장수는 100장을 넘어 170장을 향해 달리고 있다. 오늘은 할머니 생신이라 무슨 일이 있어도 5시 10분에 떠나는 퇴근버스를 타야 한다. 오늘 못하면, 내일 새벽이라도 와서 해야 한다. 자, 이쯤해서 생각해 보자. 방 청소를 오늘 꼭 해야 했는가? 아니다. 다음에 한다면 쓰레기가 분산되니 아주머니도 좋아하신다. 공문을 꼭 오늘 버려야 했는가? 절대 아니다. 이번주에 더 올 공문까지 한꺼번에 버리면 훨씬 홀가분하다. 문구류는 오늘 꼭 사야 했는가? 결단코 아니다. 싸인을 할 수성싸인펜은 아직 몇자루 있었고, 포스트잇도 책상 여기저기에 널려있어서 그렇지 쓸만큼은 된다. 그렇다면 복사는 꼭 오늘 했어야 했는가? 그렇다. 강의 당일날 해야지 하면 까먹는다. 복사하러 간 김에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포스트잇을 산 건 잘한 거 아닌가? 맞다. 그런 건 복사실에 갈 때 사버려야지, 나중에 사려면 잊어버린다. 추석 지나고나서 값이 오를지도 모르고. 수성 싸인펜도 언제 또 왕창 싸인을 할지 모르니 미리 준비해두면 좋잖아? 그렇다면 그런 문구류를 보관하기 위해 방 청소를 한 건 잘한 일 아닌가? 청소라는 건 계기가 있을 때 해버려야지, 지금 미루면 한 몇 년 그대로 가잖아? 그렇다. 치우는 김에 치우는 게 좋다. 공문도, 몇 년 더 버티면 버리는 거 자체가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럼 난 오늘 잘못한 거 없네? 물론 그렇다. 이론상으로는 그런데, 강의준비는 도대체 언제 한단 말인가? 뭐가 잘못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