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대사태’가 발생한 후 십여일이 지났다. 지금쯤이면 흥분도 가라앉았을테니 좀 차분하게 생각을 해보자는 뜻에서 이 글을 쓴다.
고대사태를 정리하자면 이렇다. 이건희의 명예박사학위 수여식에서 총학생회가 시위를 했다--> 놀란 보직교수들이 사퇴를 했다--> 학생들이 총학생회에 대해 탄핵을 발의했다 --> 탄핵은 3분의 2 찬성을 얻지 못해 부결되었다
총학생회의 시위 자체는 문제가 없었다. 협박과 회유를 통해 무노조경영의 신화를 쌓아가고 있는 이건희가 고려대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는데 아무런 저항도 없었다면 오히려 부끄러웠을 거다. 삼성과 연관이 없는-혹은 연관이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사람들 중에는 통쾌함을 느낀 이가 많았을 것이다. 나 역시 “고대가 아직 안죽었구나”라고 말을 했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우선, 고대 보직교수들이 사퇴를 했다. 나이든 교수들이야 돈줄인 삼성의 비위를 거슬려서야 안될테니, 그게 자신들의 뜻이 아니라고 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지나친 저자세 같지만, 돈이 신격화된 요즘 시대에서 돈 앞에 꼿꼿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제자들의 취업도 걱정이 되었을게다. 그러던 중 학생들에 의해 총학생회에 대한 탄핵안이 발의되었다. 탄핵안에 서명한 학생들의 숫자는 무려 1,948명, 총원이 얼마인지 모르지만 겁나게 많은 숫자다. 사람들이 개탄한 건 이 대목이다. 아니 자유. 정의. 진리를 건학이념으로 한 고대생들이 돈 앞에서 저렇게 비굴할 수 있다니. 옛날 선배들은 모든 것을 던져가며 민주화운동을 했었는데? 그 소식을 들은 나 역시 아연했다. 안죽은 줄 알았던 고대는 사실은 죽어 있었다.
하지만 꼭 그렇게 볼 일은 아니다. 과거 선배들이 시위에 나섰던 것은 그렇게 한다해도 취직에 별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고대를 나왔다면 여러 곳에서 데려가려 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은? 잘은 모르겠지만, 지금 대학생들 취직 걱정에 잠도 편히 못잘 거다. 외환위기 이후 불어닥친 구조조정 열풍 속에서 기업들은 신규채용을 줄였고, 있던 사람도 내보내는 판이다. <노동의 종말>을 쓴 제레미 리프킨의 말대로 자본은 점차 종업원 대신 기계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런 현상은 갈수록 심화될 전망이다. 삼성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잘 나가는 대기업, 노조가 있건 없건 봉급 수준도 국내 제일이다. 우리나라 대학생 중 삼성에 입사하는 꿈을 꾸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고대 애들 중에도 삼성에 가고픈 학생이 아주 많을 거다. 그들은 그 많은 삼성 계열사들이 “이건희를 모욕하는 고대 애들은 안 뽑겠다”고 하지나 않을지 입이 탔다. 공개적 선언이야 없겠지만, 알게 모르게 인사상 불이익을 받으면 어쩐다? 삼성은 고대를 안뽑아도 상관없으니, 아쉬운 쪽은 역시 고대 측. 그래서 그들은 “우린 저들과 다르다” “뽑아만 주면 견마지로를 다하겠다”는 걸 행동으로 보여줄 필요가 있었으리라. 그 결과 나온 것이 ‘총학생회 탄핵’이었다(한편 탄핵을 발의한 이승준 군 역시 “명예박사학위 수여에 대한 반대시위는 적절했다”고 인정했다. 그는 폭력이 문제였다고 하지만, 내가 알기에 먼저 폭력을 행사한 쪽은 그 시위를 물리적으로 막으려는 삼성 측이었다). 그 탄핵안이 이건희의 마음을 얼마나 누그러뜨렸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최선을 다했다.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던 탄핵 규정을 찾아내 탄핵을 발의하다니.
고대 학생들을 욕하기는 쉽다. 하지만 욕만 하기에 앞서 그들 입장이 되어볼 필요가 있다. 내 얘기를 잠깐 하자면, 우리 학교에도 교수노조가 있지만, 난 가입할 생각이 전혀 없다. 혹시 가입했다가 미운털이 박힐까봐. 이걸로 미루어 보아 내가 고대생이었다면, 그리고 삼성에 입사할 꿈을 가지고 있었다면, 나 역시 그 2천명 중 한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학생들로 하여금 돈에 굴종하고 알아서 기게 만든 건 사실은 우리다. 신자유주의의 광풍이 몰아닥치는 험난한 세상을 그들에게 선사했기에 그들로서는 살아남기 위해 달리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들을 그만 욕하자. 그리고 더 나은 세상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 보자. 그게 이번 사태를 긍정적으로 승화하는 길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