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1시

치과 의자에 올라간 나의 표정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후배는 “별로 안아파요”라고 말했지만, 가장 커다란 공포를 10이라고 한다면 그 당시 내가 느낀 공포의 크기는 대략 9.8 정도였을거다 (포경수술 할 때가 9.7). 그로부터 한시간 동안 난 허리 살을 꼬집으면서 고통을 이기려 했다. 그러나.


마취

마취의 힘은 참으로 컸다. 잇몸수술을 한 부위가 오른쪽이란 건 알겠는데 위쪽인지 아래쪽인지조차 몰랐고, 사랑니가 빠지는지 여부도 간호사가 말을 해준 후에야 알았다. 한시간을 입을 벌린 채 버티는 게, 그리고 코로 숨을 쉬어야 한다는 것이 알레르기성 비염 환자인 내게 힘들었을 뿐, 생각처럼 아프지는 않았다. 오후 세시 쯤 드디어 마취가 풀리자 난 비로소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지만, 그나마도 병원에서 준 진통제를 먹으니 사그라들었다. 이 정도라면 마지막 치료를 하는 6월 3일까지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졸려

진통제의 부작용인지, 세시쯤 약을 먹었더니 무지하게 졸렸다. 그날 오후 참석한 학회에서 난 세명의 발표를 졸면서 들었고, 마지막 발표가 끝나자마자 부리나케-코골고 잤다는 동료의 말을 듣고는-도망갔다. 집에 오자마자 이불을 깔고 세시간을 잤으며, 죽을 먹고 난 뒤 다시금 긴 잠에 빠졌다. 약 때문에 잔 잠은 아무리 오래 자도 개운하지 않은 법, 오늘 아침 6시에 어머니를 모셔다 드리러 일어났지만, 계속 졸리기만 했다. 오늘 점심 때도 진통제를 하나 먹었더니 효과가 바로 나타나, 두시부터 다섯시까지 내리 퍼잤다. 하도 졸려서 후배한테 전화를 했다.

나: 그 진통제 계속 먹어야 하냐? 나 하나도 안아픈데.

그: 그럼요, 안드시면 아플 걸요?

그래, 아픈 것보단 졸린 게 낫지.


배고파

어제 점심은, 당연한 얘기지만 굶었다. 저녁은 죽을 먹었다. 할머니가 죽을 끓여 주셨는데, 뜨거운 걸 먹으면 안된다고 하기에 식을 때까지 기다렸다. 죽에다 간장을 쳐가지고 고추조림 하나에다 밥을 먹었다. 오른쪽으로 죽이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오늘 아침에는 남은 죽에다 고추조림, 점심과 저녁엔 파출부 아주머니가 끓여 준 맛있는 죽을 고추조림과 함께 먹었다. 밥에 오래 길들여진 탓인지 죽만 먹으니 영 힘이 없다. 배도 금방 꺼지고. 삼겹살이 생각나는 저녁이다.


앞으로 한달간 술을 먹지 못하는 탓에, 목요일까지 정말 빽빽하게 술을 마셨다. 하지만 내가 알콜중독이 아닌 것이, 오늘로 이틀째 술을 안마셨지만 아무런 증상, 예컨대 헛것이 보인다든지 초록색 병만 보면 몸이 꼬인다든지 하는 것이 나타나지 않고, 마음은 지극히 평온하다. 이 기회에 술을 확 끊어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고, 체중도 줄이고 엄마, 벤지와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좋다는 긍정적인 생각도 든다. 마음 한편에는 치료가 끝난 뒤부터 무시무시하게 술을 먹음으로써 복수를 하겠다는 생각도 자리잡고 있다.


어제 학회장에서 만난 지도교수는 날 보고 반가워하더니 이런 말씀을 덧붙인다.

“오랫만에 만났으니 오늘 한잔 할까?”

생화학을 하는 군대 친구는 날 보더니 “작년에 도망갔으니 오늘 한잔 합시다”라고 조른다. 술을 포기하니 이렇듯 술자리가 생기는 건 인생의 아이러니, 난 모든 유혹을 뒤로하고 집으로 갔다. 앞으로 닥칠 더 큰 술자리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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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5-14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졸립고, 술도 못 마시는 이유로 함께 주급을 탈 수 있어서 기뻐요!!^^

울보 2005-05-14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왜?
할머니가 끓인 죽은 그냥 죽인데,,
파출부아줌마가 끓인 죽은맛난죽인지,,,,,

마태우스 2005-05-14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보님/저도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파출부 아주머니는 죽에다 고기를 얇게 썰어서 넣었다는...할머니 죽은요, 물이 너무 없었어요. 그냥 된 밥 같았다고 할까. 계란을 조금 넣으신 것 같았는데 전체적으로 맛은 없었어요. 간장 맛으로 먹었죠 뭐.
여우님/저도 여우교 신자로서 무지하게 기쁩니다. 30위는 식은죽 먹기죠 하핫.

LAYLA 2005-05-14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디 !! 치료다하실때까지 유혹을 뿌리치시길..^^

진주 2005-05-14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달동안 술을 못 마시다가 급기야는 술 먹는 방법 조차 잊어버리셨으면 좋겠어요^^

진주 2005-05-14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거지로 하는 금주지만 기특해서 추천이요...^^

클리오 2005-05-14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런 증상이 없으시다구요.. 조금만 있으시면 괜시리 힘이 없고 우울해지는 알코올 금단증상이 나타나실 겁니다. 흐흐 =3=3=3 (아니 이런, 도움이 안되는 이야기를.. ^^;;;)

물만두 2005-05-14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참에 금주하세요. 그나저나 치료 잘하시기 바랍니다^^

플라시보 2005-05-14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료가 끝난 후 님의 화려한 술생활로의 복귀를 기다리겠습니다. 뭐 이참에 끊으시라는 말을 하고 싶기는 하지만. 이미 술은 님 인생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니 더더욱 열심히 그러나 몸 상하지 않게 재미나게 드시란 말을 할께요^^

날개 2005-05-14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술을 포기하니 술자리가 생긴게 아니고, 그 전에도 늘 술자리가 있었잖아요! 말은 바로 해야죠~ ㅎㅎ
그나저나, 제발 유혹을 이기세요.. 틀림없이 한두잔은 괜찮다고 꼬시는 사람이 나올겁니다..^^

panda78 2005-05-14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유혹을 이겨내셔요! 이 참에 술을 끊으시라고 하기엔 그렇고.,, 줄이시죠? ^^;;

moonnight 2005-05-15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고하셨어요. ^^ 어째 수술의 고통보다 술먹자는 지인들의 유혹을 뿌리치는 일이 더 힘들 것만 같애요. ㅜㅜ 그래도 이겨내셔야 합니다. 불끈!

paviana 2005-05-16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요..잇몸 수술이라는게 모에요? 잇몸을 어떻게 수술하지요?
그리고 왜 술을 마시면 안되는 건가요?
술 마시면 쇼크사라도 하나요? (은근히 술을 권하는 듯 ^^;; )
마태님의 술읽기를 못 읽는다고 생각하니 알라딘이 넘 쓸쓸해요..
부리님은 계속해서 올려주시겠지요? (순 염장성 댓글만 달고 있네요 ㅎㅎ)

마태우스 2005-05-16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비아나님/한달만 참으세요. 글구 제가 그동안 추억의 술자리, 란 걸 연재하겠습니다. 잇몸수술은 별거 아니어요. 잇몸에 있는 치석을 없애는 거죠. 저도 잘 몰라요. 술은 왜 마시면 안되냐면 사랑니를 뺐기 때문에....실로 꿰매 놨거든요.
문나이트님/그건 자신있습니다. 제가 워낙 의지가 강해서요
판다님/줄여 보겠습니다. 술이란 건 안마시면 또 안마시게 되더이다
날개님/예리하신 날개님...사실 저도 쓰면서 양심에 찔렸는데 그걸 콕 찍어주시네요
플라시보님/이 기간 중 몸을 열심히 만들어서 복귀 후 잘마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만두님/위로 감사합니다
클리오님/오늘 술자리가 있어요. 안마시고 있어야 하는데 잘 될지...으으...
진주님/추천 감사합니다. 요즘은 님 말고 추천하는 분이 안계시네요^^
라일라님/저를 믿으십시오! 음하하하.

maverick 2005-05-16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 한편에는 치료가 끝난 뒤부터 무시무시하게 술을 먹음으로써 복수를 하겠다는 생각도 자리잡고 있다-> 얘가 이긴다에 올인! ㅎㅎ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