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짧지만 긴 여행을 다녀왔다. 오후 세시 비행기로 떠나 다음날 오전 9시 비행기로 돌아왔으니 짧은 게 맞지만, 그래도 비행기를 타고 멀디 먼 제주도까지 갔다 온 거니 긴 여행인 것도 사실이다. 비행기에서 보니까 집들이 성냥갑만하게 보였다는 것도 말하고 싶다.
1. 뻘쭘
지난번 예과 학생들 88명과 MT를 다녀올 때는 한번도 느끼지 못했지만, 이번에 보니까 애들이 무척이나 날 어려워한다는 걸 알았다. 자기들끼리만 얘기할 뿐 내게 말붙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버스를 탈 때도 내 옆에 앉으려 들지 않았다. 늦게 탄 애가 빈자리가 없어 내 옆에 앉기에 물어봤다. 왜 내 옆에 아무도 안앉냐고. 내가 어렵단다. 너도 어렵나니까 그렇다고 대답한다. 스스로를 젊게 생각하고, 애들 감각에 맞춘 말만 사용한다고 생각하는 나였는데, 역시나 나이는 속일 수 없는 법, 그들에게 난 어쩔 수 없는 꼰대일 뿐이었다. 이런 것이 늙어가는 서러움일까. 그전 MT 때는 어디에도 끼지 못한 채 어영부영하는 일이 없었던 것은 같이 간 동료교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유상종이란 말처럼, 내가 아무리 어린 척해도 진짜 어린 애들과 같이 놀 수는 없다.
졸업여행 때가 생각난다. 그때 성형외과 교수님이 동행을 했었는데, 아무도 그 곁에 가려고 하지 않았지만 딱 한 학생만 예외였다. 성형외과를 무지하게 하고 싶어했던 한 친구가 사흘 내내 선생님 곁에 붙어서 가방모찌를 했던 것.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친구는 성형외과를 하지 못했고, 지금은 어디서 뭐하는지 난 모른다.
2. 기민함
외환위기가 터졌을 때 우리 동네에 <IMF 호프>가 생겼었고, <쉬리>가 히트하자 같은 이름의 술집이 들어선 적이 있다. 여기에 대해 “내실을 추구하는 대신 당장의 인기에 영합한다면 잘 될 턱이 없다”라는 글을 쓴 바 있는데, 우리가 묵던 숙소 맞은편에 <독도 회 센터>라는 간판이 있는 걸 보고 아연실색했다. 전화번호가 064-746-0120이니, 왜 그런 이름을 지었는지 궁금한 분은 전화해 보시길.
3. 파산에 파산
졸업여행을 간다고 상조회에서 20만원을 받았다. 애들 뭣 좀 사주고 그러라는 뜻, 나 혼자 먹고 모른체하기 뭐해서 어제 저녁 술을 샀다. 앞에 앉은 애들한테 이랬다.
“저번 MT 때 술집에 80명이 넘게 들어오니까 겁나게 무서웠어요. 그런데 오늘은 서른일곱밖에 안되니 하나도 안무서워요”
그.런.데. 계산서를 보고 기절할 뻔했다. 역시 회는 비싸다.
4. 희망을 쏘다
혹시 학생과 마주칠까 걱정되어 아침 6시 조금 넘어 사우나를 갔다. 투숙객에게 2500원을 받는 저렴한 곳답게 시설은....대단했다. 샤워기에서는 물이 안나왔고, 플라스틱 의자는 만들 때 잘못했는지, 별 생각없이 앉았다가 히프를 찔렸다. 그런 모든 불상사에도 불구하고 내가 희망을 쐈다고 부제목을 붙인 이유는, 오랜만에 내 체중을 쟀기 때문이다.
거울 앞에 서서 내 나신을 들여다보니 배도 별로 안나오는 등 생각보다 몸매가 훌륭했기에 근 6개월만에 체중계에 올라갔다. 그간 체중계에 올라가지 못했던 이유는 무서워서 그런 거였고, 남에게 내 체중을 말해주지 못한 것은 내 체중이 얼만지 몰라서였다. 지금 말한다. 내 체중은 78.8킬로다! 내게 80이 넘을 것 같다고 나를 음해해온 사람들이여, 반성하시라!
78.8킬로도 사실 내 체중이 아니다. 머리가 뜨고 부스스한 얼굴이 내 원래 모습이 아닌 것처럼, 80 언저리에서 노는 체중도 내 체중이라 할 수 없다. 난 노력할 것이다. 내 진짜 체중에 도달할 때까지. 어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