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초등학교 때, 남자애들은 J와 L의 추종자로 양분되어 있었다. 평균적인 키에 매력이 넘치는 L은 귀염성에 호소하는 타입이었고, 라이벌인 J는 키가 크고 늘씬했으며, 미모 면에서는 더 위였다. 물론 이들에 맞설만한 미녀가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모든 것을 종합해볼 때 이들이 우리 학교의 양대산맥이었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당시 L의 추종자였던 나는 먼발치에서 L을 바라보며 한숨짓곤 했었는데, 운이 좋게도 난 6학년 때 이 둘과 같은반이 되는 행운을 누린다.
크리스마스를 즈음해서, L이 내게 카드를 보내온 적이 있다. 별 내용은 없었지만 난 감격해 마지않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카드를 만들었고, 주옥같은 말을 써가지고 다음날 아침 일찍 학교로 갔다. L이 앉는 책상 속에 카드를 넣고 내자리로 가려는데, 이런이런, 카드가 안들어간다. 책상 속은 온갖 남자들이 보내온 카드로 메워 져 있었던 것.
서른이 넘어 동창회에 나가보니 ‘아니 얘가 이렇게나 예뻤었나?’는 애들이 굉장히 많았다. 단순히 의학발전 차원이 아니라, 숨어있던 보석들이 햇빛을 받아 영롱히 빛나는 것에 비유할 만했다. 보지는 못했지만 애들 말에 의하면 J와 L은 옛날의 명성만큼 미녀가 아니라고 하고, 당시 졸업 앨범을 봐도 “내가 왜 얘한테 홀딱 빠졌을까?”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말해서 어릴 적 예쁜 것과 커서 예쁜 것은 전혀 다른 얘기라는 것.
영화 <숨바꼭질>에서 성장과 더불어 미모가 퇴색한 다코타 페닝을 보면서 얘가 커갈수록 안예뻐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아역스타가 성인이 되어 성공하는 경우가 드문 이유도 어린애와 성인에게 요구하는 미모가 엄연히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걸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배우가 바로 이재은. 2대 ‘토지’에서 서희 역을 맡은 최수지의 아역을 연기했었는데, 지금 방영하는 3대 토지에서는 봉순이로 나온다. 서희에서 봉순이로, 이만큼 그녀의 몰락을 드라마틱하게 말해주는 사연이 또 있을까. 역시 토지의 아역스타였던 안연홍은 지금은 시트콤 같은 데서 침흘리는 역으로 나오고 있다.
<ET>로 세계인들의 심금을 울렸던 귀여운 소녀 드류 배리모어, 그녀는 뚱뚱하고 미모도 그저 그런 배우가 되고 말았고, 자신의 매력으로 관객을 동원하기보다는 <미녀 삼총사>처럼 구색 맞추는 차원으로 등장하는 초라한 신세다. <초원의 집>에서 주근깨가 박힌 귀여운 얼굴로 어필하던 멜리사 길버트는 그저 그런 배우로 남아있다가 결혼했다. ‘똑순이’로 유명했던 김민희, 그녀는 더 이상 스타가 아닌, 평범한 주부다. 어릴 적에는 그녀의 영악함을 귀엽게 봐줬지만, 막상 크고 나니까 달리 내세울 게 없었던 것. 그런 면에서 <순풍 산부인과>의 마스코트였던 미달이도 배우로서의 장래가 그다지 밝지 않은 것 같다. 어릴 때야 귀엽지만 크고 나면 미모가 그다지 뛰어날 것 같지 않으니까. 그럼에도 아역 스타들이 성인이 된 뒤에도 연기를 하려는 이유는 그거 말고는 달리 할 게 없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때 받았던 스포트라이트를 잊지 못해서가 아닐까 싶다.
물론 예외가 없는 건 아니다. <프리티 베이비>로 데뷔한 브룩 쉴즈나 <택시 드라이버>의 스타 조디 포스터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변함없는 미모를 뽐냈다. 이건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게다. 유난히 조숙했던 그녀들은 영화에 나왔을 당시에도 다 큰 상태였고, 귀염성에 호소하기보다는 섹시함을 무기로 스타가 된 배우들이었다. 귀염성은 나이들면 없어지지만, 섹시함은 나이가 들수록 무르익지 않는가. 하지만 배우로서 크게 성공한 조디 포스터와 테니스 스타와 결혼해서 명성을 이어가는 브룩쉴즈의 처지를 비교해 보면, 미모에 더해서 연기력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참고로 연예 전문가 모 씨는 아역스타의 조로현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게 자기가 원해서 한 게 아니라 부모 욕심에 강제로 한 것이고, 바쁜 스케줄에 쫓기다보면 성장.발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예쁘게 자라지 못하는 거다”
이 말을 듣고 내가 한 말, “너도 아역스타였나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