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써온 술일기를 정리하고 싶어졌다. 내가 올해 처음으로 술을 마신 건 1월 2일이었고, 마지막으로 마시는 건 아마도 12월 29일이 될 듯 싶다. 오늘 마시고, 모레 마시면서 올 한해의 술을 마무리할 생각. 모르겠다. 12월 31일날, 맘이 싱숭생숭하기라도 하면 참치캔을 안주로 소주를 마구 들이킬지도. 어찌되었건 계획대로라면 175번의 술을 마신 것이고, 180번 이내라는 술일기의 목표는 달성한 셈이다.
1월달:
17번의 술을 마셨다. 요즘은 송년회 대시 신년회가 활성화되어 1월에 술마실 일이 점점 많아진다. 그때 쓴 술일기의 하나인데, <천국의 계단>이 유행할 때라는 걸 감안해 주시길.
[미녀 두명과 더불어 술을 마셨다....시종일관 난 권상우 흉내를 냈다. "xxx, 그렇게 웃는거야!"라든지, "그런 표정 짓지 마. 정서 같아!" 등등. 그러자 그중 하나가 이런 말을 했다. "주위 사람들이 다들 권상우 흉내만 내서 힘들어요"]
2월달:
18번을 마셨다. 28일밖에 안되는데 그리 많이 마신 건, 내 책이 나왔기 때문이다. 책 주고 술마시고, 이런 생활이 반복되었던 일상은 3월까지 이어진다. 내 생일날 썼던 술일기다.
[친구랑 중국집에서 점심을 먹은 뒤 계산할 때 주민증을 내밀고 이렇게 말했다. "저 오늘 생일인데 할인혜택 없나요?"
주인여자는 아주 냉정하게 돈을 받으며 말했다. "그런 거 없습니다"
웃으면서 말했으면 덜 무안했을텐데,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저녁도 역시 중국집에서 먹었다. 종업원에게 주민증을 보여줬다.
"저 오늘 생일인데 뭐 없나요?" 종업원은 한번 알아보겠다고 한 뒤 사라졌는데,
그 뒤로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맥주집에 가서 다시 물어봤다. "저...오늘 생일인데, 서비스 같은 거 없나요?"
종업원은 잠시 뒤 나타나 이렇게 답했다. "그런 건 없구, 음악만 틀어준대요"
빠-빠-빠---콩그래출레이션...어쩌고 하는 그 음악, 온갖 시선이 집중되고,
당사자는 쑥스러워 고개를 푹 숙이는 그런 음악.
난 그냥 됐다고 했다. 참 이상하다. 한치라도 한마리 서비스 주는 게 그렇게 어려운가?]
3월:
15번을 마셨다.
[브로커에게 부탁해 교보에서 내 책을 몇권 샀다. 아무리 바빠도 일주에 두세번 정도는 이짓을 하는데, 그 결과 우리집 구석에는 내 책이 제법 많이 쌓였다. 책이 쌓인 높이를 보면 "줄 사람이 많아서"라는 그간의 변명이 설득력을 잃게 된다]
4월: 15번을 마셨다.
[생각해보면 이런 불공평도 없다. 유부남들은 다른 것에 구애받지 않고 새벽까지 술을 마신다. 유부남이 집에 일찍 들어가야 한다면 "잡혀 사는구나"라며 핀잔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유부녀가 밤 9시까지 있다면 그건 '사건'이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집안 일은 항상 여자가 해야 하고, 남편은 그저 도와주는 사람이라는 편견이 이런 불공평을 야기한 게 아닐까?]

옆 쌍거플 사진은 진우맘님의 작품입니다.^^
......
5월: 13번밖에 안마셨다. 웬일일까?
[난 우주님과의 대작에서 여유있게 이길 줄 알았다. 176에 80킬로의 나, 167에 50킬로가 못되는 우주님, 누가 봐도 뻔한 승부였다. 하지만 난 참패했다. 그것도 체중과 정비례하는 생맥주로 붙었는데. 남은 사람들이 3차를 가서 새벽 세시까지 술을 마셨다는 대목에 이르면 스스로가 너무 왜소하고 한심하다]
6월: 14번을 마셨다.
[<화장을 고치고>를 마지막으로, 난 신곡취입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다. 아마도 '귀찮아서'일 것이다. 테이프를 돈주고 사는 것도, 그걸 레코더에 끼워 플레이를 누르는 것도. 그렇게 몇 년이 지나자 난 내가 비웃던 그런 사람들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어져 버렸다. 젊은 애들이 부르는 몇만번대 번호의 노래들을 난 더 이상 알지 못한다. "저런 노래도 있나?"는 표정으로 그들의 노래를 감상할 뿐.]
7월: 19번이나 마셨다. 더위 탓인가?
[술을 먹고 테니스를 치는 건 그 자체가 고역이다. 술이 덜 깨서 서있기조차 힘들고, 마음은 샘프라슨데 몸은 강호동이다. ...평소 보이던 시원한 스트로크는 하나도 날리지 못했고, 대략 조졌다]
8월: 갑자기 글씨체가 왜 이렇다냐? 8월은 13번!
[합쳐서 63세인 미녀 둘을 만났다. 편의상 미녀 1과 미녀 2라고 부르기로 한다. 미녀 2는 요즘 고민이다. 5년째 친하게 지내는 동갑내기 친구(이하 친구)가 있지만, 이 인간이 도무지 결혼할 생각이 없는 것. 그때 또다른 남자(이하 그남자)가 접근해 왔다. 그는 미녀2에게 당장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가자고 보챈다. “십년도 기다리겠다”는 말까지 했다니 단단히 빠졌나보다. 미녀 2는 그래서 미러가 아프다. 우정을 버리자니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될 것 같고, 친구만 믿고 기다리다간 죽도 밥도 안될 것 같으니까]
9월: 12번을 마셨다. 그 중 하나인 알라딘 번개 때의 사진입니다.

10월: 10번으로 하향세에 접어들고 있다.
[엊그제 밤부터 벤지가 아팠다.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었고, 숨소리도 가빴다. 일찍 퇴근을 해서 벤지를 데리고 가축병원에 갔다. 톤이 높은 목소리의 의사가 말했다.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겠네요”
하염없이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마음의 준비를 오래 전부터 해왔지만, 막상 그런 말을 들으니 걷잡을 수 없이 슬픔이 몰려왔다]
11월: 12번, 하향세는 무슨...
[큰어머님은 자식들을 워낙 잘 키우셨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지만 아들 둘과 딸들의 효성이 지극하기가 이를 데 없는 것. 특히 가운데 ‘효’가 들어가는 작은형은 그 이름값에 걸맞는 효자셨다. 일이 되려고 그랬는지 작은형은 사업에서도 성공, 지금은 준재벌이 되어 있는데, 그 덕에 큰어머님은 커다란 아파트 두채의 소유자가 되었다. 우리 엄마는 거의 못가본 해외여행을 해마다 가시는 등 말년의 영화를 누리고 있는 중인데, 얼마 전 있던 고희연은 바로 그 하이라이트라 할만했다...]
12월: 현재까지 13번, 15번 예상
[옛날에는 이러지 않았다. 일인분에 몇천원짜리 삼겹살을 너무도 맛있게 먹었고, 한잔에 천원짜리 생맥주로 2차를 하면서도 충분히 즐거웠다. 그랬던 우리가 언제부터 여자가 없으면 술도 마시지 못하게 되었을까]
이상이 올해 마신 술의 월별 분석도다. 난 내년 목표를 100번으로 잡았다. 하지만 급진적인 여친은 50번으로 더 내릴 것을 요구했고, 난 순순히 따랐다. 강제성을 부여하기 위해 50번을 넘으면 1회당 얼마씩의 벌금을 여친에게 내야 하는데, 난 그걸 1만원으로 하자고 하고, 여친은 그 벌금을 모아 거한 것을 사려고 해서 협상이 원만하게 진행되지 않고 있다. 어찌되었건 내년에는 이 술일기란에 새 글을 알리는 파란불이 많이 들어오지 않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2005년, 50번을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