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12월 8일(화)
누구와: 옛 친구들과
마신 양: 고량주--> 양주
중2 때인 1980년 전두환 장군이 과외를 전면 금지시킬 때까지, 난 1년 반동안 한 과외팀에 몸담았었다. 과외가 없어진 후에도 우린 정기적으로 만났었는데, 대학에 간 뒤 뿔뿔이 흩어졌던 그 모임은 최근 들어 극적으로 부활했다. 어느 모임이든 한 사람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어야 유지되는 법, 옛날부터 리더 역할을 하던 친구가 총대를 맸다. 술자리를 좋아하는 편인 나지만, 난 언제나 끌려가듯 그 모임에 나가고, 가끔씩 빠진다. 내가 그 모임을 내켜하지 않는 이유는 목소리가 큰 한 친구 때문이다.
어제의 예를 들어보자. 연락 날짜는 리더가 정했지만 모임 장소를 정하는 건 언제나 그 목소리 큰 친구. 사업이 잘되는 것도 아니면서 럭서리한 곳만 좋아하는 그 친구는 강남의 모 중국집에 예약을 했다.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그 집은 가격 대비 성능이 너무 떨어졌다. 단무지를 달라고 세 번쯤 말해야 갖다주는 어리버리함이나, 내 입에 전혀 맞지 않는 음식맛은 그렇다 쳐도, 양이 너무 적었다. 새우 여섯 마리가 담긴 접시가 5만원인가 했고, 닭볶음이 조금 있는 게 4만원, 양배추 몇 개가 또 몇만원. 다른 일로 점심을 굶었던 난 결국 공기밥을 두공기 추가해 먹었는데, 중국집에서 공기밥을 추가해 먹은 건 먹다 남은 짜장에 밥을 비벼먹던 어린 시절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그 짜장은 싸기라도 했지만 어젠 여섯명이 24만원이 넘는 음식값을 내고서 그랬으니 속이 상할 수밖에.
거기까지도 넘어갈 수 있다. 두명이 일이 있어 자리에서 일어나자 목소리가 큰 친구는 자기 단골로 2차를 가자고 했다. 술값이 더럽게 비싼 그 집으로. 난 반대했지만, 다른 친구들은 그냥 거기 가자고 했다. 그중 하나의 말이다. “너만 빼고 다 찬성하면 니가 희생해야지 않겠니?”
문제는 그게 매번 일어나는 일이란 거지만, 할수없이 난 그 bar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거기 술값은 얼마일까? 12년은 아예 없고 17년밖에 없다는 임페리얼 한병값은 놀랍게도 30만원. 김과 과일 몇쪽을 무료로 제공한다지만, 터무니없이 비싼 값이다. 언젠가 목소리 큰 친구의 닦달에 내가 계산을 했다가 놀라 자빠질 뻔했던 그런 가격. 그럼에도 목소리 큰 친구가 그곳을 좋아하는 이유는 뭘까. 그곳은 아가씨가 서빙을 하는 곳이고, 자기가 가면 단골 대접을 해주니까. 어제 역시 결코 이쁘지 않은 아가씨 두명이 테이블에 앉아 술을 따라줬다. 술을 따르고 이야기 상대가 되어주는 것만으로 우리가 계산해야 할 술값은 10만원이 더 늘어나니, 참 돈벌기 쉽다. 한병에 만원씩 하는 맥주에 폭탄주를 만들어서 먹으면서, 우린 시덥지 않은 농담을 주고받았다. 목소리 큰 친구는 레이싱 걸들이 서빙을 하는 다른 카페를 안다면서, 비싸긴 하지만 애들이 이쁘다고, 다음번엔 거기 가자고 안그래도 큰 목소리를 높였다.
옛날에는 이러지 않았다. 일인분에 몇천원짜리 삼겹살을 너무도 맛있게 먹었고, 한잔에 천원짜리 생맥주로 2차를 하면서도 충분히 즐거웠다. 그랬던 우리가 언제부터 여자가 없으면 술도 마시지 못하게 되었을까. 아무리 내가 반대를 하고, 빠에 와서는 말없이 술잔만 들이켰어도, 친구로부터 메일이 날라올 것이다.
[지난번 모임 때 얼마를 카드로 그었는데, 그걸 4로 나누면 얼마니까....내 계좌로 보내라]
내가 아무리 재벌 2세라 해도, 이런 돈은 정말이지 아까워 죽겠다. 오늘은 또 다른 모임에서 송년회가 있는데, 불행하게도 목소리 큰 친구는 그 모임의 멤버이며, 거기서도 가장 목소리가 크다. 보나마나 단란주점에 가자고 할 게 뻔해서 어제보다 더 나가기가 싫어지는데, 어떻게 그 모임에 안가는 방법은 없는 걸까. 도대체 난 그와 언제까지 친구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걸까.
* 그 카페는 도덕적으로도 문제가 있다. 12년은 없고 17년만 있다고 잘난체하더니, 지난번에 12년산을 17년으로 속여 팔다가 우리에게 걸렸다. 한 친구가 병 뚜껑에 써있는 ‘12’라는 숫자를 보고 이의를 제기한 것. 재고 한병이 딱 있었는데 내놨다고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한병을 자기들끼리 열나게 먹고 냉큼 치워버린 걸 보면 아무래도 속이려고 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