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준비
방송에 나갈 때, 최소한 그 프로를 한번은 보는 게 예의입니다. 특히 퀴즈프로의 경우 좋은 성적을 거두려면 미리 문제유형을 봐두는 게 좋겠지요. 하지만 제가 너무 나이가 많은 탓인가요? 전 끝내 아무런 준비 없이 방송국에 갔습니다. 그건 표진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작가가 메일로 보내준 오리엔테이션조차 열어보지 않았다네요. 방송국에 가서 작가로부터 설명을 들었을 때, 우리가 잔뜩 긴장한 건 당연하겠지요.
나: 와, 겁나게 어렵네요
표진인: 1라운드 통과도 어렵겠는걸...
2) 나와 우리말
돌이켜보면 그렇게 걱정할 일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저는 올바른 우리말을 쓰는 데 일가견이 있었으니까요. 모교 선생님이 학회지 편집장이었기에 논문 교정 같은 걸 저한테 맡기곤 했답니다. 95년부터는 영문으로 바뀌었지만 그 전에는 국문논문도 꽤 많았고, 학위논문은 전부 한글로 씌여졌었어요. 그래서 전 글자만 딱 보면 오자만 눈에 띌 정도로 교정의 대가가 되어 버렸습니다.
3) 아쉬운 탈락
그런데 제가 가장 자신있던 맞춤법 테스트에서 떨어질 게 뭡니까. '줏어온'을 '주워 온'이라고 바꾸는 것 등 어려운 것들은 대충 다 맞춰놓고서, "담아두기에"를 띄어서 써야 한다는 걸 틀렸다니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전 몰랐는데 그전까지 5라운드에 진출한 사람이 없었다고 하더군요. 어제도 보니까 MC에게 5라운드 문제가 전달되지 않았었는데, 한 팀이 4라운드에 진출하니까 그제서야 5라운드 문제를 가져오라고 연락을 하고 그러더군요. 떨어질 때는 아깝다는 생각만 잠깐 들었을 뿐 담담했는데, 저녁에 집에 오면서, 그리고 집 앞에서 술을 마시면서 점점 아까운 겁니다. 나중에는 속이 상해서 잠도 안올 지경이 되더군요. 꼭 상금이 탐나서는 아니지만, 4라운드를 통과하면 상금이 100만원이 되고, 5라운드를 통과해 우리말 달인이 되면 최초로 1000만원을 받는 거였거든요. 1000만원이 아니라도 5라운드까지 간 최초의 팀이 되는 것도 좋았을 텐데....
4) 게스트
저와 표진인은 게스트였어요. 알고보니 그 프로는 꼭 게스트가 한팀씩 나왔었더군요. 지금까지 게스트는 1라운드를 통과한 적이 없었기에, 우리가 1라운드를 통과하자 정재환이 "기록"이라고 했지요. 하지만 홍록기, 박준형 등 이전의 게스트들과는 달리 표진인은 일반인에 가까운 게스트고, 브레인 서바이벌을 제패한 데 이어 왕중왕전까지 석권한 친구라 4라운드까지 갔다고 해서 크게 놀랄 일은 아닐 겁니다. 참고로 제가 쉬운 걸 주로 맞추고, 어려운 건 표진인이 도와 줬습니다. 같이 술만 먹었었는데, 호흡도 잘 맞더군요. 참, 이런 일도 있었어요. 출연진 대기실에 갔더니 열명 정도의 출연자가 앉아 있는데, 작가가 저희보고 따라오라고 하더니 큰방에 데려가는 겁니다. 문 앞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어요. "표진인 선생님, 서민 선생님 대기실, 출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흐음, 게스트는 이렇게 대접하는구나 싶었어요. 친구 덕분에 비행기 일등석 비슷한 대접을 받았지요.
5) 유머
원래 제 목표는 "두 번은 웃기자"였는데, 방청객 반응도 그렇고, 표진인 말로도 제가 별로 웃기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제 유머가 좀 억지스러웠고, 오버를 많이 했어요. 안웃긴 말들은 편집을 다 했으면 좋겠다 싶네요. 제 생각에 딱 한번 웃긴 것 같아요^^
6) 돈
출연자 전원에게 상금을 받으면 어디다 쓸건지 묻고는 공언한대로 쓰겠다는 각서를 받더군요. 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제게도 물었어요. 어디다 쓸거냐고. 이건 웃기려고 그런 게 아니라 제 평소 소신대로 대답한 거랍니다.
나: 경제를 살리는 데 쓰겠습니다.
정재환: 그건 너무 포괄적이지 않나요?
나: 우리나라가 내수가 부족하잖아요. 그래서 술집에서 열심히 술을....
아무튼 <우리말 겨루기>의 상금은 천만원인데요, 위에서도 말한 것처럼 아직까지 해당자가 나온 적이 없답니다. 왜일까요? 모 작가의 말입니다. "천만원 당첨자가 나오면 그건 방송사고야!" 후후, 그렇습니다. 스폰서가 튼튼하면 몰라도 한시간 짜리 프로가 매주 천만원씩을 줘야 한다면 배겨 내겠습니까? 더구나 예심도 안거친 게스트가 상금을 타면 더더욱 안되죠. 그래서 잘 떨어졌다고 위안하고 있는 중입니다. 편집이나 잘 되어서 이쁘게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내일저녁 7시, KBS 2TV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