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며칠 전, 아니 그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 미루기만 한 일을 오늘 했다.
1) 벤지 털을 깎다
털이 있는 동물은 여름이 힘들다. 그래서 더워질 때면 털을 다 깎아줘야 하고, 나도 해마다 그렇게 해 왔지만, 이번 여름엔 아직까지 벤지 털을 깎아주지 않았다. 이유는 내 이기심 때문. 벤지의 피부에 뭔가가 돋아난 게 몇 년 전인데, 딱지가 질 만하면 녀석이 유연한 허리를 이용해 상처를 물어뜯는 바람에 크기가 꽤 커져 버렸다. 그 부위 말고도 두세군데 더 딱지가 져 있어 털을 깎을 경우 그게 다 드러나 버리게 생긴 거다. 사람들은 개를 좋아하지만, 아픈 개는 피한다. 찬사의 대상이던 벤지가 기피대상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 털을 깎으면 난 벤지와 산책도 못할 것이며, 벤지가 주로 대소변을 보던 골목길에 나가는 것도 더 못할 것이었다. 그래선 난 벤지가 더위에 지쳐 심난한 표정으로 헥헥거리는 걸 안타깝게 바라보기만 했다. 가끔 찬물에 샤워를 시켜 주지만, 밍크코트를 입은 녀석에게 그건 별 도움이 안된 것 같다.
엊그제부터 털을 깎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벤지를 저렇게 덥게 내버려두는 게 옳지 않은 거다, 벤지가 기피대상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건 이쁜 벤지를 자랑하고픈 내 이기심이 아니냐, 자신의 외양이 어떻든 벤지는 시원한 걸 원할 거다... 오늘 전화로 예약을 하고 벤지를 맡겼다. 털을 완전히 다 깎은 벤지는 정말 하나도 안이뻤다. 그래도 내가 반가운지 날 보고 꼬리를 치는 녀석의 모습이 짠해 가슴이 미어졌다. 누군가를 책임진다는 것, 그의 고통을 옆에서 지켜본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털을 깎은 스트레스 때문에 옆에서 떨고 있는 벤지가 올 여름을 무사히 보내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2) 한글 2002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난 한글 97을 써왔다. 물론 별 불편은 없었다. 하지만 한글과 컴퓨터는 뭐가 불만인지 특별히 좋아 보이지 않는 2002를 만들었다. 난 모든 사용자들이 나처럼 97을 계속 쓰기를 바랐지만, 컴퓨터를 새로 사면 한글 2002가 의무적으로 깔리는 탓인지 많은 사람들이 배신을 때리며 한글 2002로 전향해 갔다. 그들이 보내는 한글 파일을 내 컴에선 열 수가 없어서, 그때마다 난 다른 사람의 컴퓨터 신세를 졌다. 그 빈도가 높아짐에 따라 한글 2002를 사려는 열망이 조금씩 생겼고, 학교 일이 밀어닥친 이번주엔 한글 2002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 샀다. 한컴 쇼핑몰이 우리집 근처에 있기에 물어물어 갔는데, 세상에 16만 5천원이나 된다. 이 돈을 아껴 보려고 그토록 버텼건만... 다음달 카드청구서가 점점 겁이 난다. 이왕 이리 된 거 한컴의 자립에 기여했다고 자위나 해야지. 게다가 오늘 난 한글 2002를 산 게 아니었다. 2002를 달라는 내 말에 직원은 “이미 단종되었다”며 2004를 내민다. 결국 난 그토록 내게 스트레스를 준-나와 논문을 같이 쓴 모 교수는 제발 좀 사라고 애원과 협박을 교대로 했었다-2002를 끝내 사용하지 못하고 만 것이다.
3) <내 남자의 로맨스>
김정은의 팬이면서 <파리의 연인>을 안봐서 미안했기에 그녀가 나오는 영화는 꼭 보려고 했었다. 그런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못보고 있었는데, 오늘 봤다... 고 썼어야 했다. 그런데 그리하지 못했다. 눈이 아프다는 어머니를 모시고 안과에 다녀오느라. 엄마는 2주 전부터 눈이 아팠다는데, 오늘도 다 나았다며 안간다는 걸 강제로 끌고 갔다. 친구의 말에 의하면 “각막이 많이 손상되었다”며 며칠 더 병원을 다녀야 한단다. 병원에 간 건 보람있는 일이지만, 곧 영화가 막을 내릴지 모르는데 큰일이다. 내일도 영화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내일은 꼭 영화를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