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7월 24일(토)
누구와: 사촌형, 동생, 그리고 매제와
마신 양: 중국 술--> 보드카

나이가 들고난 뒤에야 혈연의 중요성을 깨달은 나는 친척들간의 모임을 주선하곤 한다. 하지만 올 상반기엔 내가 워낙 맘의 여유가 없어서 거의 모이지 못했었는데, 사촌형의 거듭된 독촉을 받고서야 이번 모임을 개최하게 되었다. 원주에서 일하다 서울로 복귀한 내 남동생을 환영하는 취지라고는 하지만, 말이 그렇다는 거지 여느 모임처럼 술만 디립다 먹다가 새벽을 지나서야 파장이 났다.

사건은 2차에서 생겼다. 사촌형이 잘 아는 카페에서 보드카를 마시는데, 단골이라 그런지 미모의 아가씨가 서빙 겸 왔다갔다 했다. 사촌형은 우리를 가족이라고 소개한 뒤 "니 친구들이랑 우리랑 4대 4로 미팅을 하자"고 했고, 우린 좋아서 "헤--" 하고 웃었다. 그러자 그 아가씨는 "그 가족 콩가루네요"라는 어설픈 농담을 하곤 주방으로 갔는데, 이게 문제였다. 평소 착하디 착하던 내 매제가 갑자기 열이 받은 것. 유머와 미모를 숭상하는 나와 사촌형은 그 말을 유머로 알아듣고 넘어갔지만, 매제와 한성질 하는 남동생은 그냥 넘어가지 못했다. 누구한테 감히 콩가루라고 하냐고 펄펄 뛰던 매제는 지배인을 부른 데 이어 문제의 그 아가씨를 불러 "무릎 꿇고 사과해라"며 호통을 쳤다. 욕까지 먹어 자존심이 상한 아가씨는 속으로 설움을 삼키며, 결국 "죄송합니다"라고 사과를 해야 했다.

내 타입은 아니지만, 미녀가 그렇게 당하니 마음이 아팠다. 어설프긴 하지만 유머는 유머로 관대하게 넘어가 줄 수도 있는 건데. 사실 모두가 유부남인 우리가 종업원의 여자친구를 소개해 달라고 하는 건 충분히 콩가루로 불릴 일이고, 사과를 받는다고 우리 가족이 콩가루가 아닌 게 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콩가루냐 아니냐는 우리 하기에 달렸지, 종업원의 한마디에 달린 것도 아니잖는가?

봉창을 뚫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흥분하는 매제를 말린다고 했던 말이 이라크 파병이었으니까. "이라크에 군대 보내는 건 찍소리도 못하면서, 술집 아가씨한테는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무릎을 꿇게 하면 니 자존심이 회복되느냐"는 게 내 나름의 논리였지만, 내 말은 다른 사람들에게 뜬금없이 받아들여졌다.
-동생: 그 얘기가 지금 여기서 왜 나와? 그리고 형은 콩가루란 말 듣고 속상하지도 않아?
-매제: 콩가루라고 불린 게 별거 아닌 거냐?

솔직히 고백하자면, 우리 집은 콩가루다. 밖에서 봐서는 그럴 듯 할지 모르겠지만, 안에서 보면 이런 집구석이 있나 싶다. 거기에는 콩가루에 과민한 반응을 보였던 내 남동생-물론 나도-도 큰 공헌을 했다. 우리가 민감했던 건 그 여자가 사실을 말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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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4-07-26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마태님네 집에 찰떡만 갖고 가면 되는거죠? 그럼 콩고물 마음껏 묻힐 수 있으니..
썰렁한 농담입니다. 날이 더워서 좀 시원해지시라고요....너무 상심 마셔요..시간이 해결해 줄껍니다...

2004-07-26 12: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04-07-26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의 솔직 담백함이 좋긴 하지만, 정말 그 상황에서 왜 이라크 파병 얘기가 나왔어야 했는지, 저도 좀 납득이...? 흐흐.

미완성 2004-07-26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혈연'이란 인연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직 서로를 견디고 만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콩가루'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진짜 콩가루는...별일도 아닌데, 무자르듯 식칼로다가 인연을 확 잘라버린 집안 아닐까요..?
대한민국의 많은 '가족'들이...참 다들 해체 직전의 위기에 놓인 것같아서, 전 제 주위만 둘러봐도 아찔합니다. 시간도 해결할 수가 없잖아요. 시간이 흐르면 아예 끝장을 내버릴테니까..

마냐 2004-07-26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이 즐겁게 놀아보자고 한건데...그걸 왜 콩가루라 하겠슴까. 물론, 장소가 좀 거시기하긴 합니다만...그런걸 가족간 즐겁게 노는데 좋다고 여기는 분도 있을 수 있겠죠...마태우스님은 그렇지 않으신걸루 알고 있지만서두...ㅋㅋ

비로그인 2004-07-26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은 소개 안시켜줘서 화낸거 아닙니까??? 흐흐흐

LAYLA 2004-07-26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사과님 말씀대로...명절에 모이지 않는 가족들도 얼마나 많은데요~

panda78 2004-07-26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촌철살인 댓글의 폭스님, 여전하십니다,녜. ㅋㅋㅋ >.<

조선인 2004-07-26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로선 그 아가씨가 애당초 잘못한 건 사실이다...로 마음이 기웁니다.
잘못한 건 난데, 꼭 거기에 부모교육이나 집안뼈대 들먹이는 사람들 있잖아요.
전 그런 사람 정말 싫어욧!!! (아, 갑자기 왠 흥분 -.-;;)

starrysky 2004-07-26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가게로 안내도 하고, 또 먼저 여자분께 농담을 거셔서 사태의 발단을 만드신 사촌형님이 많이 뻘쭘하셨겠어요.. 사촌형님이 한 농담이나 그 아가씨가 받아친 말이나 서로 비슷한 수준의 농담인데 왜 님의 매제분과 남동생분이 아가씨에게만 그토록 불같이 화를 내셨는지는 정말 이해가 안 가는군요. 유부남이 술김에 젊은 아가씨들과 미팅하자는 건 100% 말이 되지만, 그 제의를 거절한다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다? 어머, 댓글 쓰다가 왜 이렇게 갑자기 화가 나는 걸까요.. -_-;; (착하고 이쁜 스타리, 진정해라.. 후우후우)

털짱 2004-07-26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정한 콩가루란 인연을 끊고 아예 만나지 않는 것이라는 사과님의 말씀에 한표!

sweetmagic 2004-07-26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농담치고는 좀 그러네요. 무릎 꿇어도 싸다 정도는 아니지만...
미녀에게는 언제나 한없이 관대하신 우리 마태님~ @. @*~~

마태우스 2004-07-26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윗매직님/아, 제가 미녀라서 봐줘야 한다는 건 아닙니다. 어설픈 유머, 그렇습니다. 유머의 초기 단계에서는 저렇게 오버를 하게 되지요. 하지만 거기에 대해 화를 내버리면 그 사람은 영영 유머와 멀어지게 되지요. 유머라서 관대해야 한다는 거죠.
털짱님/전 털짱님께 한표입니다.
스타리님/전 그래서 스타리님이 좋아요
조선인님/사실은 조선인님이 좋아요
판다님/알죠? 제가 누굴 좋아하는지?
라일라님/님의 코멘트에서는 라일락 향기가 나요
폭스바겐님/하하, 간만에 듣는 님의 촌철살인이네요. 폭스바겐님, 부활하신 겁니까?
마냐님/둘다 농담인데 우리가 화를 낸 게 보기 안좋았다는 거죠. 하여간 전 마냐님이 좋아요
멍든사과님/아아, 우리는 정말 운명이라니까요
스텔라님/그러게 말입니다. 이라크 파병 얘기는 좀 뜬금없지요? 제 봉창을 지적해주는 스텔라님이 전 좋아요
파란여우님/님이 돌아오신 게 최근의 일 중가장 기쁜 일이었다는...아시죠? 제 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