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7월 20일(화)

장소: 은찬이 상가에서...

'발냄새'를 주제로 한 방송프로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신발을 하나 가지고 떨어질 때까지 신는 건 안좋습니다. 1년에 한컬레 신지 말고, 두컬레 사서 3년 신는 게 더 경제적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난 신발을 하나 사면 떨어질 때까지 신는다. 당장 신을 게 있는데 또 하나를 사자니 돈이 아깝기 때문이다. 내가 새 신발을 사는 건 이런 식이었다. 아침에 출근하려고 하는데 신발이 없다. 엄마한테 "신발 어쨌어요?"라고 여쭤보면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아버지가 버렸다. 그거 너무 떨어져서 못쓰겠더라" 대충 아빠 신발을 신고 나가-아빠 신발은 내 것보다 5미리 작다-신발을 하나 사고, 그걸 또 맛이 갈 때까지 신었다.

난 구두를 싫어했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구두를 신는 친구들이 있긴 했지만, 난 구두가 너무 아저씨 같다고 생각했다. 진짜로 아저씨가 된 후로도 그건 변하지 않아, 랜드로버처럼 소년같은 신발을 즐겨 신곤 했다. 지금 내가 구두를 신는 건 3년 전인가 어머니가 상품권으로 구두를 사주셨고, 전에 신던 랜드로버가 작년 이맘때쯤 더 이상 신기가 어려울 정도로 해졌기 때문이다. 사람의 적응력은 놀랍기 그지없어, 그렇게 싫어하던 구두도 몇 달 신으니 적응이 되었다. 하지만 이게 떨어지면 또 구두를 살 것 같진 않다. 역시 난 랜드로버 체질이다.

어제, 영안실에 갔다가 나오려는데 아무리 찾아도 내 신발이 없다. 대체 누굴까. 내 구두가 좋은 거라는 걸 간파한 사람이. 신발장까지 뒤졌건만 구두는 보이지 않는다. 에라 모르겠다 싶어서 만만한 걸 골라 신고 집에 왔다. 그 구두의 주인도 "대체 어느 놈이냐? 가다가 고꾸라져라!"고 날 욕하겠지만, 나도 집에는 가야할 것 아닌가. 몇십걸음 걷다보니 구두가 영 불편했다. 굽이 있어서 하이힐을 신은 기분이랄까. 이왕 고르려면 편하고 좋은 걸 택할 걸, 하는 후회를 했다. 아침에 보니 모양도 영 흉물스럽기 짝이 없다. 도저히 신고갈 엄두가 안나, 다 떨어져서 버리기 직전에 구출해 둔 랜드로버를 신고 학교에 왔다. 역시 랜드로버가 좋다.
랜드로버는 나밖에 안신으니 잃어버릴 염려가 없지만, 구두는 그게 그거같고 해서 술만 좀 취하면 헷갈리기 십상이니까.

신발이 없어 아빠 구두를 신고나왔던 어느날, 교실 사람들과 삼겹살을 먹은 적이 있다. 술을 먹고 나오려는데 내 구두가 없다. 게다가 구두의 모양조차 기억이 안났다. 역시 아무거나 신고 집으로 갔다. 다음날 아침, 그거라도 신고 학교에 가려던 나는 너무너무 놀랐다. 아무리 노력해도 구두가 발에 안들어갔던 것. 내 사이즈보다 20 미리 정도는 작은 구두였다. 그럼 전날은 어떻게 신었을까. 그게 바로 술의 힘, 술에 취하면 발이 작아진다.

술을 안마셔도 구두는 분실된다. 조교 때 지도교수랑 점심을 먹고 나가려는데, 신발이 없어졌다고 하신다. 너무 속상해하시는 우리 지도교수, 용의자를 색출하고 혹시 연락이 오면 알려달라고 하신 뒤 교실로 갔다. 열심히 일을 하려는데 지도교수가 날 부른다.
"찾으려고 노력해야지 뭐하고 있는거야???"
난 다시 그 식당으로 갔다. 물론 연락온 곳은 없었다. 식당 옆에 세워진 오토바이에 기대어 서 있다가, 나온 김에 전자오락을 몇판 하고 교실로 갔다.
"아무리 찾아봐도 없는데요?"
결국 선생님은 구두를 잃어버리셨다. 천편일률적인 모양에 전부다 까만색인 구두들, 그걸 어떻게 하면 안잃어버릴 수가 있을까? 하여간 비싼 구두는 신을 필요가 없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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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엄마 2004-07-21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명한 마태우스님 글에 일등을 다 해 보네요~

sweetmagic 2004-07-21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웬지 구두랑 님은 안 어울리는 것 같아요.


딸기엄마 2004-07-21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운문사 비구니들은 똑같은 고무신인데도 귀신같이 자기 신을 찾아 신는건 고무신 뒷쪽에 자기만의 비표를 해둔 까닭이라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한 귀절이 생각나네요~

아영엄마 2004-07-21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지 않아도 언제 글 올라오나 기다리고 있었어요!! 잘 치르고 오셨나 했더니, 저런 ..신발을 분실하시다니... 님의 신발이 새신이라서 누가 신고 간 것이 아니길 바랍니다.. 정말 큰 맘 먹고 제 남편에게 메이커 운동화 사줬더니 이튿날 고깃집(술 마시러..ㅠㅠ)갔는데 누가 무지무지 낡아 빠진 신발 남겨 놓고 바꿔 신고 가버렸더랍니다. 나쁜.. 크흑~ (고깃집에서 변상을 해 주긴 했는데 남편은 그 돈으로 술 마셔 버렸다는...쩝)

플라시보 2004-07-21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한번도 신발을 잃어버린적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만약 어디 들어갔다가 나오는데 내 구두가 사라지면 무척 당혹스러울것 같습니다. 근데 아무거나 신고 오면 다음 사람도 또 그럴것이고 그 다음 사람도 또 그래서 결국 악순환의 연속이 되겠네요^^ 뭐 그렇다고 해서 여벌로 구두를 가지고 다니거나 슬리퍼를 가방속에 넣어둘수도 없겠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구두를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구두를 껴안고 실내에 들어가는 수 밖에는 없겠네요^^ 참 그리고 저도 랜드로바 좋아합니다. 어릴때는 늘 그 구두만 사주는 아빠한테 불만이 대단했었는데 (그래서 대학 들어가자 마자 랜드로바는 평생 안신어 하고 선언했었는데) 나이가 드니 다시 찾게 되는군요. 오늘도 랜드로바를 신고 출근했습니다. 작년 추석에 들어온 상품권으로 샀는데 아주 튼튼하고 발도 편합니다. 제가 이 나이에도 하이힐이랄지 여성용 구두를 신을 엄두를 못내는건 아마도 랜드로바처럼 너무도 편한 신발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네요^^

2004-07-21 1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파리 2004-07-21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이미지로 사용한 시집(유홍준-상가에 모인 구두들) 읽어 보셨나요?

아영엄마 2004-07-21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방금 진/우맘님 서재에 갔는데 방문자 수가 님의 숫자보다 무려 열 배나 많습니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런 대 반란이 일어나다니!! 무슨 일이야~~

마태우스 2004-07-21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영엄마님/진우맘님이 그러신 게 어디 한두번입니까. 그럴 때일수록 우리 침착합시다. 그분, 원래 인기 많으세요!!
이파리님/아, 아니요... 안읽어봤구요, 유홍준이 시도 썼나 싶었어요.
플라시보님/감사합니다. 추천도 해주시고...
딸기엄마님/저만 알아보게 표식을 해도 남이 가져가면 끝이라는 생각이...
스윗매직님/그죠? 역시 전 하이힐을 신어야....

메시지 2004-07-21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번사면 끝까지 신는 편입니다. 대신 전 구두, 운동화, 슬리퍼, 샌들 등 다양한 종류를 갖추고 있습니다. 운동화를 제일 좋아하지요.

하얀마녀 2004-07-21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헤어져서 버리기보단 발냄새가 신발에 배어서 버리게 되더군요. 저도 운동화를 제일 좋아해요. 가끔 구두 신다가 운동화를 신으면 어찌나 발이 편한지. 기분마저 가뿐해집니다.

로드무비 2004-07-21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喪家에 모인 구두들

저녁 喪家에 구두들이 모인다
아무리 단정히 벗어놓아도
문상을 하고 나면 흐트러져 있는 신발들
젠장, 구두가 구두를
짓밟는 게 삶이다.
밟히지 않는 건 亡者의 신발뿐이다
정리가 되지 않는 喪家의 구두들이여
저건 네 구두고
저건 네 슬리퍼야
돼지고기 삶는 마당 가에
어울리지 않는 화환 몇 개 세워놓고
봉투 받아라 봉투,
화투짝처럼 배를 까뒤집는 구두들
밤 깊어 헐렁한 구두 하나 아무렇게나 꿰 신고
담장 가에 가서 오줌을 누면, 보인다
北天에 새로 생긴 신발자리 별 몇 개

nugool 2004-07-21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마태우스님께는 랜드로버가 훨씬 잘 어울릴 거 같아요. ^^ 저도 구두는 안신는데... 키도 작은 데(우리세대에서 160은 작은 키도 아니건만...) 신발도 땅바닥에 붙은 것만 신고 다닌다고.. 서방이 맨날 구박이죠...

갈대 2004-07-21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렌드로바에 중독돼서 이제 다른 신발 못 신어요. 어찌나 편한지...^^

sweetrain 2004-07-21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발은 랜드로바가 최고지요..^^ 저는 신발을 사면 누가 가져가지도 않을 수준이 될때까지 신어요...^^+

ceylontea 2004-07-21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구두보다는 랜로바가 좋아요... 그리고 운동화는 더 좋아해요...
옷도 청바지가 제일 좋아요...
그런데... 요즘은 출근할때 정장에 준하는 옷을 입으려하니... 신발도 운동화,랜드로바는 안되겠더라구요... 그래서.. 구두를 신으려 노력중인데... 쉽지 않더이다...그래도 예쁜 신발은 무척 많아서 나름대로 그것으로 위안을 삼습니다..
마태우스님... 그래서 지난 토요일엔 운동화 신으셨지요? 무척 편해보이더군요...
그런데.. 구두도 요즘 젊은 사람들 신는 것은 예쁜것이 많던데요... 그런 아저씨 구두같은 거 말고 조금 젊은 취향의구두로 고르시면 어쩌다 마태우스님이 구두 신으실때 만족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전.. 그러고보니 신발이 많은 편이네요.. 옷에 따라 이 신발 저 신발.. 색깔도 골라신고 하다보니... 그래도... 자주 신는 신발이 정해져 있답니다.. 거의 그 신발만 자주 신게되더라구요...(발에 편한..발모양이 우껴서 신발 고르기가 어려워요.. 내 발에 편한 신발 고르기가 쉽지 않더라구요.)

미완성 2004-07-21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늘....술집에서 모르고 신발 바꿔신고 가면 다음 날 바리바리 전화가 오던데.....ㅠ.ㅠ
아니 주위 사람들은 신발을 챙겨주지는 못했으면 남의 전화번호라도 불질 말던가, 그쵸?

마태님이 구두가 불편하신 건....구두에 맞춰진 정형화된 마음을 갖고 계시지 않아서예요..
자유로운 영혼이시기때문일 거여요~ 오호호~ 뭔 소린지;;;

마냐 2004-07-21 1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옷, 로드무비님, 시 좋네요.
마태우스님...어딜가든, 남자들이 자기 구두 찾아 신는거 보면, 음..과연 저게 자기꺼 맞을까? 항상 의심스러웠슴다. ㅋㅋㅋ 그렇다고 해서...에라, 다른 사람거라도 신고 가야지...라고 하는지는 정말 몰랐슴다...허긴, 어쩌겠슴까...ㅋㅋ

진/우맘 2004-07-21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태님이 주신 소재를 얼른 우려내야 할텐데...^^
님의 소재는 정말 무궁무진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