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년, 내가 군에 입대해 훈련을 받을 때의 일이다. 당시 우리의 숫자는 일천명이 넘었건만 우리에게 할당된 공중전화의 숫자는 달랑 두대였다. 게다가 젊은이들은 뒤에 누가 기다리건간에 쓸데없는 대화-오늘 무슨 훈련을 했고, 반찬은 뭘 먹었다는 식의-로 장시간 통화를 하는 존재, 그래서 우린 전화를 하려면 크게 맘을 먹어야 했다.

어느 일요일, 집에 별일이 없는가 걱정이 되었던 나는 아주 큰 맘을 먹고 길고긴 줄의 끄트머리에 섰다. 정확히 한시간 40분을 기다렸을 무렵, 내 차례가 왔다. 내 뒤에 선 애들의 부러움섞인 눈초리를 뒤로 한 채 난 수화기를 들었다. 그런데...이럴 수가. 전화는 통화중이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금 번호를 눌렀지만 역시 통화중. 급한김에 할머니댁에 전화를 걸었더니 거기는 아예 안받는다. 이런 젠장! 난 한시간 40분의 기다림을 허공에 날려버린 채, 쓸쓸히 공중전화 부스를 빠져나왔다.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지진 않았지만, 우리집 전화를 통화중으로 만든 사람은 아마도 어머님이었을 것이다.

대형 화재나 항공기 추락 사고가 있을 때마다, 그들이 남긴 마지막 메시지가 화제가 되곤 한다. "여보 사랑해요" "어머님 사랑합니다" 그들이 남긴 마지막 육성은 대충 이런 것이었다. 갑자기 생각을 했다. 내 삶에서 단 일분간의 시간만이 주어진다면, 난 누구에게 전화를 걸 것인가. 당연히 어머님이 일순위로 생각이 난다. 하지만 우리 어머님은, 전에도 여러 차례 언급했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전화를 너무 오래 하신다는 것. 집에 계시면 필경 통화중일테고, 밖에 계실 땐 너무 바빠서 전화를 안받으신다. 어쩌다 받으셔도 바쁘다면서 끊어 버리기 십상이다. 죽음이 임박한 순간 전화를 해서 "엄마!" 하고 불렀더니 "바쁘니까 있다가 해라!"라고 하면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문자 메시지는 확인을 못하시고, 음성 메시지는 비밀번호를 몰라 듣질 못하신다 (내게 알아달라고 했는데 아직 못알아봤다....). 시도는 해보겠지만, 그다지 미덥진 않다.

형제들과 별로 친하지 않으니 친척 중에서 떠오르는 분은 외할머니. 하지만 올해로 88세이신 할머니는 다른 건 다 괜찮으신데 결정적으로 귀가 어두우시다. "할머니!" 라고 외치면 "누구냐?"라고 답하실테고, "민이어요!"라고 하면 "기다려봐라. 보청기를 끼고오마"라고 하실 게 틀림없다. 어릴 적엔 보청기가 만능인 줄 알았지만, 옆에서 보니 보청기라는 것도 꽤 귀찮은 물건이고, 그걸 꼈다고 늘 잘들리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할머니께 전화를 드릴 경우, 내가 누구인지 파악하다가 전화를 끝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내 마지막 전화가 그렇게 끝난다면 얼마나 허무하겠는가.

친구들은 어떨까. 내 충성심을 믿는 나로서는 내가 위험하다고 하면 필경 "거기 어디야? 금방 갈께!" 하고 달려오리라 믿는다. 그래, 마지막 통화는 내가 가장 믿는 그 친구에게 하자. 이렇게 생각을 해보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게 된다. 내 마지막 통화가 그 친구랑 이루어졌다는 걸 어머님이 아시면 얼마나 서운하겠는가. "그녀석이 엄마보다 친구가 좋단 말이지!"라고 괘씸해하실 어머님의 모습이 상상이 간다. 물론 난 분명히 어머님께 먼저 통화를 시도했지만, 그걸 알 리 없는 어머님은 나만 원망하실게다.

그래서 생각했다. 좀 말이 안될 것 같지만, 절대로 사고로 죽지 말자고. 번지점프나 스키처럼 위험한 일은 하지 말고, 기사 아저씨가 속도광이거나 술에 취했으면 그냥 내려버리자. 게다가 사람에게는 육감이라는 게 있어서 웬만한 위험은 피할 수가 있다. 건강하게 오래 살련다. 알라딘도 평정하고, 안팔리는 책이지만 책도 몇권 더 내고. 쓰다보니 희한한 결론이 내려졌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 글은 머리가 아닌 손에서 나오고, 손은 이렇듯 머리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글을 전개시킨다.

* 제게 딱 30분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피씨방에 와서 글을 남깁니다. 저 폐인 맞죠?? 월요일 오전에야 다시 컴에 접속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때까지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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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마녀 2004-07-17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싸 1등!

하얀마녀 2004-07-17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순간에 대한 생각으로도 이런 재밌는 글을 쓰실 수 있군요. 저도 마태우스님처럼 손가락이 알아서 재밌는 글을 써줬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번지점프는 한번 해봤는데 - 별로 안 높은 높이었습니다. - 기회가 된다면 한번 더 해보고 싶어요. 그것도 아주 높은 높이에서. 올리버 스톤의 킬러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다리를 보고 그 다리에서 번지점프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영화는 재미 없어서 보다가 말았었지만 그 장면만은 또렷이 기억합니다. 그 높디 높은 다리...

꼬마요정 2004-07-17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위험한 건 안 하려는 주의랍니다. 오래 살고 싶은 마음에서.. 물론 길 지나다니다가 교통사고 등 각종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부모님보다는 오래 살아야 효도지요..^^

아영엄마 2004-07-17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 드디어 오늘, 마태우스님의 외출이 시작되었군요.. 서재 지인들 만나서 즐겁게 이야기 나누다 오세요~~

책읽는나무 2004-07-17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그럼......새러데이맨을 할수 없단거죠??
아싸~~~
라이벌들이 다 모임에 나간다면.....전 이제 40위안에 들수있겠군요..ㅎㅎㅎ

stella.K 2004-07-17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상해요. 왠지 오늘은 힘없고 외로워 보이는 글이라고 느껴지는건...?
그래도 저는 사고사가 병들어 죽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해요. 고통도 한방에 끝나버리니까.
아파서 죽으면 본인도 괴로울뿐만 아니라, 곁에서 보는 사람도 괴로운 법이거든요. 질질 오래 앓다가 죽으면, 나의 죽음을 기려주는 사람도 비례해서 줄어들 것 같아요. "걔 이제 죽었데."이런 소리 안 들으면 다행이죠.
전, 이중섭이나, 기형도 같이 죽었으면 하는데,가능할까 모르겠어요.

진/우맘 2004-07-17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없이 과연, 그 삼겹살이 맛있을까요? 맛있을까요??? TT

stella.K 2004-07-17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잊고 있었군요. 지금쯤 서재쥔장들 만나고 계시겠군요. 좋은 시간 되시길...^^

근데 진우맘님, 섭섭하시겠지만 진우맘님 안 계셔도 잘 드시고 계실 것 같은데요. 서재 쥔장들 강적이잖아요.^^

LAYLA 2004-07-17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가의 마지막 순간에 내가 떠오를수 있다면 참 행복할거 같아요.
적어도 내가 무의미한 존재는 아니었다는걸 말해주는거 같아서요.
그래서 사람들이 자식을 낳는거 같기도 하고...ㅋㅋ

비로그인 2004-07-17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사이 글을 보니 마태우스님께서 주렁주렁 달린 코멘트를 무척이나 아끼시는 듯 해서..저도 눈팅은 고만두고 종종 코멘트를 달까 합니다. 내맘대로 팬클럽 회장으로써 투데이 힛만 주구장창 올리는 것만으론 너무 소극적인 활동이 아니었나,하는 생각도 들고. 양질의 코멘트를 위해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쓸랬더니 주말 내내 바쁘시군요. 그럼 월욜부터 저도 활동개시! 짜잔-

비로그인 2004-07-17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니 글과 너무 상관없는 코멘드였군요. 킁;

음..마지막 순간.
저는 마지막 순간에 특정인에게 메시지를 남기지 않겠습니다.
가족? 친구? 애인? (현재론 없지만 죽는 순간에도 애인 하나 없을 거란 상상은 하기도 싫어요)
아니, 아닙니다.. 전 동시대를 살고있는 인류를 향해 다음과 같은 평화의 메시지를 남기고 죽겠습니다.

"세계평화! 전쟁반대! 드디어 닥쳐온 미인박명. 그러나 유감은 없다, 안녕-"

털짱 2004-07-17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광별예술가님...
제 생각에는요...
미인박명은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기..
원래
미인들은 뒤에서 욕을 먹거든요.
그런 엄청난 뒷담화가 그네들의 생명을 연장시켜주니까
저한테 감사해야하지 않을까요...??

미완성 2004-07-17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020489

마태우스님, 제가 오늘 100번째로 서재를 방문했어요.
이건 어떤 계시인 것같지 않아요?
우린, 천생연분인 거예요...ㅠㅠ


비로그인 2004-07-18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털짱님,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털짱님도 조심하셔요. 미인은 털이 많다,고 하지 않습니까?
저야 털 없는 미인으로써 세계미인분류표에 희귀미인으로 분류되었지만서도..

클리오 2004-07-18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마태님이 잠시 외출한 서재는 미인들이 접수하셨군요. 미인 대열에 못끼는 저는 흔적 남기는 걸 그만 둬야 될까 봐요.(^^ 농담입니다.. 혹시나 누군가 신경쓰실까 하여..)

털짱 2004-08-08 0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광별예술가님... 역시 아셨구나, 미인의 필수조건이 털임을... 아, 나도 내 털에 보험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