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시: 6월 29일(화)
마신 양: 소주--> 맥주
어제 난 친구와 약속이 있었다. 그와 만나는 건 4개월만인데, 결혼하기 전까지는 꽤 자주 만났지만, 이젠 잘해야 일년에 두세번 볼까말까한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내가 힘들 때면 언제나 시간을 내줄 수 있는 친구라, 그 친구를 떠올리면 언제나 든든하다. 하지만 4개월만의 만남을 방해하는 세력이 있었다. 그것도 셋이나.
첫 번째 방해. 놀랍게도 아직 난 방송국에서 잘리지 않았다. 어제 방송이 무려 일곱 번째, 내가 생각해도 불가사의한 일이다. 지난주에 배두나가 대신 나온다고, 날더러 쉬라고 해서 마음의 준비를 했건만, 이번주에 또 나오라고 전화가 왔고, 빈말인진 모르지만 어제 방송 끝나고 나가는데 "다음주에 뵈요"라고 한다. 흠, 최소한 두달은 버틴 셈이군. 그렇다고 내가 방송을 잘하는 건 아니다. 일단 아는 게 없다. 모니터 시간에 이런 말이 나왔단다. "그 사람, 모른다는 말을 왜 그렇게 자주 해요? 의사 맞아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 난 방송을 시작할 때 의사면허번호를 말하고, MC는 "의사 맞습니다!"라고 말을 한다.... 게다가 유머도 낮은 평가를 받고 있다. 내가 구사하는 유머들은 대개 동네에서나 통하는 거였고, 사람들은 내 유머에 별로 웃지 않았다. 예컨대 어제 했던 유머를 보자.
나: 입냄새 때문에 헤어지는 커플이 6%에 달한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MC: 6%라, 믿을만한 통계입니까.
나: 그게 리서치 앤드 디벨롭먼트사의 통계인데요, 엊그제 부도났습니다.
이거 웃기지 않는가? 내 딴에는 웃긴데, 아무도 안웃는다. 차라리 "리서치 앤드 리서치 사의 통계인데요, 'L' 자로 시작해요"라고 하는 게 더 나았으려나. 게시판에 언제나 날 찬양하는 글을 올려, 내 측근 내지는 작전세력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고있는 홍퀸이란 분의 글이다.
[정말 매주 느끼는건데 어설픈 어정쩡한 인사말투..
정말 저분이 의사맞나 할 정도로 말이죠..
근데 그 말투와 웃음이 정말 친근감 팍팍 느껴지면서
인간미 팍팍 느껴지구 아주 좋아요~~특히 어설픈 유머..넘 잼있어요..^^]
보라. 이분도 내 유머가 어설프다지 않는가. 고도의 지적 훈련을 받아야 구사할 수 있는 내 유머가 어설프다니. 근데 내가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거지?
방향이 빗나갔는데, 하여간 어제 방송이 끝나고 PD랑 작가, 그리고 어제 나온 출연자들이 한잔하러 간단다. 나한테도 가자고 하기에 안된다고 했다. 그런 게 어딨냐고 잡아끄는 걸 겨우 뿌리치며, 친구와의 약속장소로 출발했다.
두 번째 방해. 언제나 말하지만, 난 거대한 조직을 거느리고 있다. 내가 원할 때 술을 마셔줄 거대한 조직이. 그 조직은 거의 점조직이고, 서로는 잘 모른다. 어제, 조직원 중 하나인 알파에게서 전화가 왔다. 베타, 감마를 만나는데 시간이 있냐고 묻는다. 없다고 하면서 좀 놀랐다. 알파와 감마가 만나는 건 같은 조직이니 괜찮지만, 베타가 끼다니. 그것도 조직 보스인 내게 연락도 안하고. 난 베타에게 전화를 했다.
나: 너 오늘 알파 만나?
베타: 응
나: 근데 왜 나한테 연락 안했어?
베타: 넌 맨날 바쁘잖아.
조직에 반란의 조짐이 보인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술을 끊고 조직 관리를 좀 열심히 해야지. 말해놓고 보니 이상하다. 내가 말하는 조직관리는 조직원들과 술을 열심히 마시는 건데?????
세 번째 방해. 먼저 일어난 두 번의 방해는 거절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면, 세 번째 방해는 크고도 강력한 것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나랑 동갑이지만 열 살은 어려 보이는 미녀에게서 전화가 온 것. 내가 아는 사람 중 톱3 안에 드는 미녀인 그가 나한테 전화를 해서 술을 마시자고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힘든 일이 있어서 내가 필요한 건 아닌 듯 했지만, 난 확 약속을 때려치고 그녀한테 가버릴까 하는 생각이 굴뚝같았다 (아, 나의 얄팍한 우정이여!). 이내 정신을 추스린 난 슬픈 목소리로 안된다고 했다.
나: 저, 앞으로 잘하면 안될까.
미녀: 피, 나 삐졌어. 너 맨날 앞으로 잘한다고 해놓고 한 게 뭐가 있니?
마음이 아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난 3중의 방어벽을 뚫고 그 친구를 만났는데, 그는 내가 이렇듯 어렵게 자신과 만난 것에 감격스럽지도 않는지, 내가 "밥은 내가 살께"라고 하니까 "그래라"라고 말했고, 고기도 무지 많이 먹는다. 적당한 술과 이야기가 어우러진 즐거운 술자리이긴 했지만........감격했어야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