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는 남들 볼 때 봐야한다. 특히 수백만을 동원한 영화라면 더더욱 그렇다. 나중에 비디오로 보고나서 그 영화 얘기를 해봤자, 다들 시큰둥해 할거니까. 그래서 철지난 영화에 대한 리뷰를 쓰는 데는 노하우가 필요하다. 뭔가 그럴듯한 얘기를 잡아 썰을 푸는 것. 난 한가인(은주)과 권상우(현수), 그리고 우식(이정진)의 삼각관계에 주목하고자 했다. 영화에서 은주를 본 현수는 첫눈에 그녀에게 반하지만, 현수는 싸움짱인 우식과 맺어진다. 하지만 가인은 날라리인 우식과 사사건건 다투고, 우식은 "쫑내!"를 선언한다. 그 틈을 비집고 현수가 대쉬하지만, 잘 될 듯 했던 둘의 관계는 은주가 우식과 잠적하면서 끝이 난다. 은주는 왜 현수를 거듭 버림으로써 그를 슬픔에 젖게 하는 걸까? 현수와 우식의 전력을 비교해 본다.
1. 공부
전학온 현수는 공부를 곧잘 했다. 하지만 사귀는 친구들의 영향 때문인지 성적이 떨어진다. 담임의 말이다. "20등이나 떨어져? 기록이다, 기록! 곧잘 하더니 왜그래?"
그래도 우식보다는 공부를 잘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영화에서 난 우식이 공부하는 걸 한번도 본 적이 없다.
2. 싸움
학생들에게 있어 싸움을 잘하는 건 대단한 권력이다. 우리반에도 깡패 같은 애들이 많아 이따금씩 공포 분위기를 연출하곤 했는데, 영화에 나오는 학교는 정말 좀 심하다. 특히 악의 상징으로 나오는 선도부장은 진짜 나쁜 놈이라, 선량한 애들을 괴롭히며 군림한다. 하지만 그도 우식에게 꼼짝을 못하는데, 3학년들도 손을 들 정도로 우식은 그 학교의 싸움짱이다.
태권도장 관장인 아버지를 둬서인지 현수도 싸움은 꽤 하는 편이다. 심지어 우식과의 맞대결에서도 밀리지 않았다는 게 내 관전평이다. 선도부장과의 한판대결을 위해 몸을 만든 후에는 웬만큼 실력이 안되면 하기 힘든 다대 일의 싸움도 성공적으로 해냈다. 선도부장을 쌍절권으로, 그것도 뒤에서 가격한 것이 옥이 티긴 하다. 전반적으로 봤을 때 우식의 우세.
3. 매너
매너가 없는 남자가 여자에게 사랑받을 수 있을까? 만난지 얼마 안되어 한학년 위인 은주에게 반말을 하는 우식은 은주로부터 "좀 무례하네요"라는 핀잔을 듣는다. 하지만 우식은 결국 은주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집앞에서 밤새 기다리는 고전적 수법을 쓴 결과다. 벽을 주먹으로 치면서 이렇게 말했단다. "널 위해선 죽을 수도 있어!" 블루스를 출 때는 터프하게 키스도 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고고장에 가는 걸 은주가 문제삼자 "니가 뭔데 간섭이야!"라고 하는 뻔뻔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주 컨셉이 터프다.
은주가 다니는 학원에 찾아간 현수,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걸 보면서도 선뜻 용기를 내지 못한다. 친해지기 전까지 존대말을 썼고, 키스도 분위기가 무르익고 난 뒤에야 한다. 매너면에서 상대가 안됨에도 가인은 터프한 우식에게 가며, 좌절한 권상우는 떡볶이집 아줌마와 떡을 치며 우울함을 달랜다.
4. 용기 & 의리
버스에서 은주를 괴롭히는 3학년 선배에게 "그만하라"고 한 건 현수였다.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리라. 그는 선도부에게도 기죽지 않았고-눈 깔아, 그랬을 때 오래 버텼다-우식이 가인을 모독하자 그와도 맞장을 뜬다. 그의 짝인 햄버거가 야한 책을 권상우에게 떠넘겨 같이 벌을 받았을 때, 그는 짝을 원망하지 않는다. 우식을 비겁하게 물리친 선도부에게 복수를 하는 등, 의리와 용기 면에서 권상우는 높이 쳐줄 만한다.
우식의 의리는 단 한번 발휘된다. 버스에서 권상우를 도와 3학년들을 물리칠 때. 그것 말고는 별로 의리랄 게 없다. 나이트클럽에서 자기만 잽싸게 도망쳤고, 햄버거에게 야한 책을 빌려보다 걸리자 출처가 햄버거라고 고자질하기도 한다. 싸움 잘하는 것만 믿고 급우들을 괴롭혔고, 그건 결국 햄버거의 배신으로 이어진다. 주먹은 쓸 때 써야지, 맨날 그것만 믿고 설치면 밥맛이다.
5. 외모
몸매 하나로 2, 300만 관객을 동원하는 권상우의 몸매는 그야말로 짱이다. 막판에 몸을 만들며 벗은 몸을 노출하는데, 그것만 봐도 돈이 안아까울 듯 싶다. <천국의 계단>에서도 익히 보여줬던 우는 모습은 남자인 나도 껴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애처롭다. 우식도 그런대로 생기긴 했고, 키도 더 크지만, 현수의 압승이다.
6. 결론
그런데 왜 은주는 우식을 택했을까? 그건 아마도 고교생이라는 통제된 시절엔 터프함이 훨씬 더 어필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시절에 이성을 사귄다는 건, 노는 애들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도 그래서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착각은 금물이다. 시대는 이미 바뀌었고, 이젠 고교생에게도 터프함보다는 유머와 매너가 훨씬 더 인기있는 덕목이 되버렸다. 이 영화를 보고 한 터프 하려는 사람들, 차라리 유머를 갈고 닦고, 여자에 대한 배려를 잘할 방법을 생각하는 게 어떨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