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기독교 방송국 PD란다. 문화와 건강이 어우러진 프로그램을 하기로 했는데, 고정으로 나와 달라나?
나: 저를 택하신 이유가 뭔가요? 누가 추천이라도...
피디: 그냥 제가 오래 전부터 지켜보고 있었어요.
날 지켜봤다면 내가 방송 부적합 인간이라는 것도 알텐데. 난 혀도 짧고, 목소리도 좋지 않을뿐더러, 버벅거리는 게 특기다. 중요한 대목에선 말도 더듬을 뿐더러, 결정적으로 유머가 안된다. 남의 눈을 보는 것도 내겐 버거운 일이라, 수업 때도 교탁만 보면서 수업을 하는 실정. TV에 나가서도 그건 마찬가지다. 그러니 방송에 출연했던 얼마 안되는 기간 동안, 피디들은 나 때문에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다.

-<아침을 달린다>라는 프로에서 리포터를 한 적이 있다. 그동안 상부에서는 "저렇게 사람이 없느냐?"면서 담당피디를 질책했다는데, 높은 분들 중 한명만 날 좋게 봤단다. 그분도 나처럼 눈이 작은 건 아니었을까 싶다. 두달만에 잘렸다.
-MC가 이문세에서 이적으로 바뀌면서, '별이 빛나는 밤에'에 나간 적이 있다. 내가 맡은 코너는 '왼손잡이 클럽'이라고, 이 사회에 존재하는 특이한 사람들을 탐방하는 거였는데, 첫회는 그런대로 잘 했지만, 프로의 취지를 나는 물론 작가도, 청취자도 잘 모르는 바람에 우왕좌왕하기만 하다가 결국 잘렸다.
-"당신도 MC가 될 수 있다!"는 글을 어딘가에 쓴 적이 있다. 그걸 보고 감동한 케이블TV의 피디가 내게 방송대학 MC를 맡겼다. 그 피디는 나 때문에 무지하게 야단을 맞았고, 결국 난 딱 한번 방송을 찍고 잘렸다.
-현대방송에서 김현철과 같이 뭔가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딱 한번을 제외하고는 내가 왜 거기 앉아 있는지 모르면서 출연료만 챙기다, 결국 잘렸다.

이렇게 저렇게 잘리는 일이 반복되면서 내 가슴은 상처투성이가 되었는데, 그때의 일을 기억하는 사람을 만나면 입을 다물 것을 조건으로 돈을 줘 보내고 있다. 안되는 줄 알면서 계속 수락을 했던 이유는 매니저가 없기 때문이었다. 거절을 못하는 성격이라 온갖 잡지, 이프는 다 사가지고 집에 가곤 했던 나로서는 방송요청들을 거절할 힘이 없었다. "안하면 안되요?"라는 자세로 나오니 만만하게 보고 "해야 됩니다!"라는 답이 돌아올 수밖에. 내가 그 시절을 악몽으로 기억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럼 왜 그들은 나같은 인간을 나오라고 했을까? 가물에 콩나듯 성공한 프로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의 스튜디오>; 초창기인 12회에 출연했는데,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느냐는 질문에 "우글우글합니다"라는 대답을 해(애드립이었다) 떴다. 혹시 날 알아보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 프로 때문에 날 기억한다.
-<이소라의 프로포즈>: 가수도 아닌데 왜 거길 나갔을까, 나도 모르고, 사람들도 모른다. 그래도 내가 나온 프로 중 드물게 웃기는 데 성공했다.
-그외 이문세가 진행하던 별밤에서 그런대로 무난했다는 평을 들었고, 김현철 프로에서도 한번...그것 말고는 다들 날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방송에 적합한 인간이 되려면 최소한 절반은 성공해야 하건만, 난 결코 아니다. 그래서 오늘은 완강히 거부했지만, 피디는 -젠장-더 완강했다. 진행자가 내 책의 추천사를 써준 딴지일보 김어준이라나? 그래서 타협을 봤다. 일단 만나서 술을 같이 먹기로. 그게 오늘이다.. 잘 버텨야 할텐데. "안돼!"라고 말할 수 있는 내가 될 수 있기를.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Viewfinder 2004-04-16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죄송합니다. 본인에겐 속 쓰린 일일 텐데,,,
'그때의 일을 기억하는 사람을 만나면 입을 다물 것을 조건으로 돈을 줘 보내고 있다.
안되는 줄 알면서 계속 수락을 했던 이유는 매니저가 없기 때문이었다.' 에서 뒤집어졌습니다.

ceylontea 2004-04-16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죄송합니다만.. 읽다가 툭 웃고 말았답니다...
이렇게 글은 재미나게 쓰시는데..유머가 안되시다니요... 전 정말 유머 안되는데...
그래도 칠전팔기라고 계속 방송하시면 결국은 잘 하시지 않을까여?

sooninara 2004-04-16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험이 가장 좋은 선생님이죠..대중이 항상 재미만을 찾는것은 아니잖아요? 한번 해보세요..
열심히 봐서 시청률 올려드릴께요..알라딘 식구만 풀어도 시청률 1%는 올라갈걸요^^
저도 앞에 나가서 말하면 덜덜떨면서 말더듬는 사람인데..
이번에 차고지문제에 참여하면서 많이 좋아졌습니다..대중앞에서 연설이란것도 해보고..물론 목소리가 떨리긴했죠^^ 우리동 통장님이 제가 연설한다니까..저목소리로 어떻게 소리지를지 걱정을 했는데 그런데로 무난했다고 감상평을 해주시더군요..
그래도 아직도 대중앞에서는 말을 못하겠어요..ㅠ.ㅠ..
참 저도 차고지문제로 경인방송에서 인터뷰할뻔했는데..목소리가 떨릴까봐서 다른언니를 추천해버렸습니다..목소리 떨리던 말건 인터뷰 해볼걸 그랬나???

다이죠-브 2004-04-16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많이 출연하셨네요. 전 우굴우굴->이 대목을 신문에서 본 것 같아요^^ 근데 이소라 거긴 어떤 연유로 출연하신건지요? 아무리 생각해도 잘..,음.. 그리고, 제 생각도 더 부딪혀 보는 게 좋지 않을까 쪽으로 의견이 가는데요. 마태우스님의 지식을 살려서 건강과 문화가 어우러진 프로그램을 해보시는 것도..괜찮을 것 같은데요? 굳이 웃기지 않아도 말예요.

2004-04-16 1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4-04-16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사랑의 스튜디오랑 이소라 프로포즈 과거는 이전에도 많이 밝히셨지만, 더욱더 화려한 경력들이 숨어있었군요~ 사랑의 스튜디오는 자주 봤는데도 왜 기억이 안나는지...^^;; 오늘 타협을 잘 보시길 바랄께요!! ^^

파란여우 2004-04-16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일 술일기 제목=>"결국...하기로 했다".

panda78 2004-04-16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 TV에서 뵌 기억이 없네요, 꼭 보고 싶어요. "결국.. 하기로 했다" 기다리고 있을께요! ^^ 으흐흐흐

*^^*에너 2004-04-16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에 대해서 알지는 못하지만 글쓰시는 거보면 정말 유머이있고 말도 잘하고 그러실꺼 같은데...

비로그인 2004-04-16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티비 잘 안보는 데요...님이 TV에 출연하신담 TV랑 친해지고 싶어 질 것 같은데요...
그 PD님....마태우스라는 보물로 많은 사람들을 TV에 정신팔리게 하고 싶으신가 봅니다~
대단히...... 탁월하신것 같다는.....^^
님은 님 특유의 눈웃음과 예쁜 입꼬리가 잘 어울려 따땃한 봄날 벚꽃잎 날리 듯
흐드러지는..마태우스 표 살인 미소가 정말 압권이라니깐요.
온 세계에 님의 미소를 유행 시켜주세요~~~모두모두 행복할 것 같아요~~~~!!!

2004-04-16 18: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LAYLA 2004-04-16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여우님 말에 넘어가고 말았음!! ㅎㅎ 결국....하기로 했다. ....하하하하하 기대 합니다 ㅎㅎ
정말 글은 이렇게 재미나게 쓰시는데 말재주가 없다니 믿기지 않아요!^^

▶◀소굼 2004-04-16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 다양한 경력을 갖고 계시는군요. 금새금새 잘리셔도 계속 섭외가 들어오는 걸 보면 다들 '언젠가 터뜨릴테지'란 마음을 갖고 있는게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연우주 2004-04-17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거절 못해서 인생 무척 피곤하게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끔 몸도 사릴 줄 아는데, 마태우스님은 더 심하시네요. 걱정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