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좀 바빴다.

바빴던 주된 이유는 연구 때문이지만,

그 덕분에 논문이 많이 나와 앞으로 몇 년간은 잘릴 염려가 없어졌으니 보람은 있다.

그 바람에 이곳에 글쓰는 걸 너무 소홀히 한 듯하다.

페이퍼는 많이 못쓰더라도 리뷰는 꾸준히 써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결정적으로 어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그마저도 물거품이 되었다.

그 책은 분량이 상, 하 각 500여쪽인데,

한줄 한줄이 다 엄청난 내공을 요구하기에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타자화' '자기 초월' '수동성' 등등의 단어가 어찌나 많이 나오는지,

그냥 붉은 펜으로 줄만 박박 긋고 있는 중이다.

그 책의 이름은 바로 보부아르 여사가 쓴 <제2의 성>,

9월 내내 그 책을 가지고 다녔는데 엊그제야 겨우 상권을 떼었다.

이런 식이라면 10월 말까지 다 읽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되는데,

읽고 난 뒤에도 머리에 남는 건, "하여간 읽긴 읽었다"일 것 같아 더더욱 걱정이다.

뭐, 책의 내용에야 심하게 공감하지만,

조금만 더 쉽게 썼다면 더 좋았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갑자기 그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어느 분과 댓글로 했던 얘기였는데,

거기서 내가 '여자는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대요'라고 했더니

그분이 갑자기 이런다.

"당신, 그 말의 의미를 알고 쓰는 거야?"

갑자기 그 책을 읽지도 않은 채, 앞뒤 맥락도 전혀 모르는 채 그 문장을 인용하는 건 잘못된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게 마음의 빚이 되어 계속 기회를 엿보던 중

어느날 갑자기 책방에 가서 그 책을 샀고,

한 이삼일 뜸을 들이다 읽기 시작했다.

"여자는...만들어진다"는 말은 상권의 4분의 3이 경과될 지점에 나오는데,

어떤 단락의 시작이 그 말인지라 앞뒤 맥락이 그리 중요한 건 아니었고,

그 다음에 나오는 구절을 읽어봐도 내가 틀리게 이해한 건 아닌 것 같다.

마음의 빚이 남더라도 그냥 읽지 말 걸 하는 후회가 들었는데,

한편으로는 저 밑바닥 수준인 나의 내공을 개탄했다.


근데 그 내공이란 건 도대체 어떻게 쌓이는 걸까?

서른살부터 책을 읽기 시작해 십년이 넘는 세월을 독서에 바쳤는데,

아직도 어려운 책은 어려워 죽겠고, 쉬운 책에만 절로 손이 간다.

그러니 책을 무작정 읽기만 한다고 내공이 저절로 쌓이는 건 아닌 모양,

앞으로는 괜히 무리하지 말고 욕망이 시키는대로 책을 읽어야겠다.

여기까지 쓰고 방안을 둘러보니 어느 분이 선물한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고보니 이미 갖고 있되 읽지 않은 책 중에도 어려운 책이 꽤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역시 내공은, 기르는 게 좋다.

일단 내공을 기르는 책에는 어떤 게 있는지 알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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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장미 2008-10-08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내공(마이볼)을 기르지 않고, 굴리거나 튕기렵니다. -_-)/ ㅋㅋ 공한테 물주고 햇빛주고 거름주면 자라긴 자라나요? 기르는 게 쉽지 않을텐데- 대단한 도전인 듯 하옵니다.
맞기전에 튀어야지 ㅋㅋ -_-)~ 휘릭~

조선인 2008-10-08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다보면 유럽사람은 확실히 싫어요. 음, 왠 비약?

비로그인 2008-10-09 07:59   좋아요 0 | URL
전 악셀 하케같은 유럽 사람이 좋아요 후훗

무스탕 2008-10-08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공하고 견공하고 다른거죠?
기른다고 하셔서.. ^^*

마늘빵 2008-10-08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오래 쉬셨어요.

바람돌이 2008-10-08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읽기 어려우면 그냥 이건 번역탓이야 하는데...ㅠ.ㅠ
그래도 한국책은 특별한 전공서적이 아니면 열심히 읽으면 왠만큼은 이해가 가잖아요. 근데 유럽쪽 책(특히 프랑스)은 으~~~ 저는 이제 이게 내 한계구나 하면서 이해되는 책만 보려구요. 이제 살아온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작은 것 같은데 모르는 책 보면서 씨름하는건 자기 학대같은 느낌이.... (말하다보니 전 자기합리화에 너무 능한것 같아요.^^;;)

세실 2008-10-08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바람돌이님 전 앞으로 살아올 날이 더 많다고 생각하는데 ㅎㅎ
마태님 오랜만입니다. 아직도 깨소금 볶으시는줄 알았습니다.
저두 아동도서나 문학에만 머무르고 있습니다.
어려운 책 읽으면 졸려요.

하늘바람 2008-10-09 0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셨죠? 깨소금냄새때문에 샘나서 잘 못왔어요.
전 내공도 없고 2000년 이후로 거의 8년가가이 어린이책을 주로 보다보니 유치차란해지는거같아요

2008-10-09 1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mogulkor 2008-10-09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림위즈쪽 홈피가 닫혀서 어디 가셨는지 찾다가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이곳에 들러야 겠지요? -유진홍..

mogulkor 2008-10-09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께서 좋아하시는 미미 여사는 어쩐 셈인지 제게는 별로였거든요. 그 재미있게 읽으셨다는 '모방범'이 저는 영... 그런데, 최근에 읽은 두 작품은 너무나 마음에 들더군요. '괴이'와 '혼조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 인데요. 단순한 괴담 수준이 아닌 치밀한 구성력에 솔직히 많이 놀랐습니다. 그정도 완성도로 그렇게 다작을 하다니, 미미여사는 천재가 아닌가 해요..

마태우스 2008-10-10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ogulkor님/앗 죄송합니다. 예까지 찾아오게 만들다니.. 미미여사가 별로였다구요...죄송합니다. 근데 괴이가 맘에 드셨다구요? 흠, 전 단편은 별루인 것 같아 아직 안읽었는데, 함 읽어 볼까봐요. 글구...조만간 연락 드리겠습니다.
속삭님/안그래도 작업 중입니다. 제가 아니라 어느 분께서 해주신다고 해서요. 연락 드릴께요.
하늘바람님/그간 안녕하셨어요? 글에서 제가 내공 기르고프다고 했지만, 사실 내공 없는 게 더 좋을지 몰라요. 제가 내공이 없으니 쉽게 쓰고 쉽게 말하잖아요^^
세실님/그죠? 저도 그런데... 제가 책읽기 시작하면서 십년 후엔 자본론에 도전하겠다, 이랬었는데 십년이 금방 가더군요. 그냥 하던대로 살아야겠어요^^
바람돌이님/음, 번역 문제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 책은 원체 어렵기도 한 것 같아요. 번역자는 아마도 머리에 쥐가 났을 것 같아요. 생판 처음 보는 단어가 꽤 나오던데요. 하여간 지금 하권 59쪽까지 읽었는데, 어여 다 읽고 싶어요
아프님/그죠? 죄송합니다 앞으로 열심히! 불끈!
무스탕님/어맛 그런 멋진 유머를... 저희 애들, 갈수록 이뻐 죽겠답니다 흐뭇.
조선인님/그래두...님은 내공 많지 않으시나요??
주드님/아앗 오랜만입니다! 미모는 여전하시죠???? 음, 전 악셀하케보단 호어스트가 좋습니다
장미님/잘 지내시나요? 신혼재미는 어떤지요. 사실 저도 제가 현재 내공으로 생을 마감할 걸 알고 있습니다. 그냥 투정 한번 부려본 거죠^^

비로그인 2008-10-11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된 책을 그것도 어려운 책을 굳이 읽을 필요가 있나 싶을 때가 있습니다.
정말 읽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저는 대학 1학년때 여성학을 배우며 저 책을 읽었어요.
그.런.데.....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요.
님께서 말씀하셨다던 말조차도 기억이 나지 않고 읽으면서
아 ....그런 말이 있었지...했었답니다.
대학생이었기에 시험에 혹시라도 나올까봐 약간의 흑심을 품고 읽었던
어린 시절이 다시금 생각나는 밤입니다.
좋은 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