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내가 바보같아서 벌어진 일이고, 다른 사람을 원망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러니 내가 이 글을 쓰는 건 남 탓을 위함이 아니다.


<앵무새 죽이기>를 영등포역 근처의 서점에서 구입한 건 한달쯤 전 일이다.

'지금 읽는 책만 읽고나면 그걸 읽어야지' 하면서 가방에 넣었는데

학교에 뒀는지 집에 있는지 도통 모르겠다.

어디 있는데 못찾는 것 역시 '잃어버림'의 범주에 속하는지라

과감하게 알라딘에서 주문을 했다.


나중에 배달된 책을 보니 뭔가가 이상하다.

"왜 이렇게 얇지?"

책을 열어보니 작품의 개요, 줄거리, 등장인물이 나오고 책 뒤쪽으로 가니까

'실전연습문제'까지 있다.

그렇다. 난 <앵무새 죽이기> 대신 '논술 가이드'를 사버린 거다....

하도 어이가 없어 5분 정도 멍하니 있었던 것 같다.

이왕 온 거니 읽어는 봐야겠다는 마음으로 가지고 있는데, 좀 씁쓸하다.

책값을 날려서가 아니라, 요즘 청소년들이 이런 류의 책을 보면서 논술준비를 한다는 생각에.



 

 

왼쪽 게 논술가이드다.

 

 

양서가 좋은 책인 이유는 줄거리가 아름다워서라기보단

인물들의 캐릭터가 입체적이고, 상황 묘사가 잘 되어 있어서,

그리고 눈물이 날 것 같은 감동을 선사하기 때문일 것이다.

책을 안읽고 논술가이드를 읽는다면 도대체 무슨 감동을 받을 수 있을까?

영화와 마찬가지로 책은 독자의 마음속에서 완성이 되며,

100명이 읽는다면 100가지의 다른 느낌이 있게 마련이다.

책을 읽고 난 뒤의 느낌이 저자의 의도와 다르다고 해도 그게 오답은 아니다.

하지만 논술 가이드는 책에 정답이 있다고 주장하며,

그럼으로써 독자의 사고를 한쪽으로 몰아넣는다.

언젠가 우리 학교 입학생들의 논술답안지를 채점하다가 천편일률적인 글들에 짜증이 난 적이 있는데

그런 획일적인 글들의 배후엔 논술가이드를 비롯한 학원들의 명강의가 있었던 거다.

이런 가이드를 읽고 직접 책을 찾아 읽는 학생은 과연 얼마나 될까?

<월든>, <분노의 포도>, <멋진 신세계>, <신곡> 등등으로 이어지는 '다락원 명작노트'의 리스트를 보고 있자니 한숨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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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8-08-02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어쩌다가 저런 실수를... 근데 실수마저도 너무 마태님 다운것 같아서 재밌어요. ㅎㅎ
근데 정말 저런 논술 가이드가 책별로 나온다는건 처음 알았네요. 대한민국 입시 가이드 정말 대단하지 않나요?

Mephistopheles 2008-08-02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따위를 읽는데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단 이야기겠죠..
기본적인 교양과 소양이 배제된 채 사회에 나온 아이들이 한국에서는 모르겠지만
과연 월드글로벌 인재에 적합할까요?? 코앞의 단수만 보는 우리나라 교육은 언제쯤이나
개선될런지..허허허허

비로그인 2008-08-02 0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논술답안지가 학원에서 가르쳐준 뻔한 내용이라는 말은 들었는데 이런 식으로 '공부'를 시키는 모양이네요.
답답합니다.

최상의발명품 2008-08-02 0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앵무새 죽이기 읽으시기까지 그렇게나 많은 사연이 있었군요.
제가 사실 어리버리하고 뭔가를 좀 잘 잃어버리고 하는데 그런포스가 마태님한테까지 닿아서 그런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ㅠㅠ 제가 추천해드린 책이니까요......
그래도 이런 우여곡절 겪으신 끝에 읽으신 책이라 마태님의 기억에 더 오래 남을 거 같네요.
비가 오네요.
좋은 주말 되세요^^

BRINY 2008-08-02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동네에서 잘나가는 논술학원은 그런 식으로 지도해서 내신성적이나 수능성적만으로 갈 수 있는 대학보다 좋은 대학 보낸 경우가 있긴 있더라구요. 비록 소수긴 하지만, 늘 그 소수의 예가 자기 일인양, 자기 아이일인양 생각하는 게 요즘 세태 아니겠어요.
그리고 실례될 지 모르지만, 마교수님 계시는 과 지원하는 저희학교 애들 얘기로는 어차피 논술이고 면접이고 다 필요없다, 수능이 최고다라고 하던걸요. 지역의학우수자로 지원해도, 수능최저등급 통과 못하면 끝이라고 말입니다.
저도 한숨만 쉽니다.

무스탕 2008-08-02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책들은 강남엄마가 권하는 권장도서목록에 들어있겠군요 --

다락방 2008-08-02 11: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어떡해. 저..저....저런 책이 있단 말입니까!
마태님 삽질하셨군요. orz


춤추는인생. 2008-08-02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님 그런책이 있다는 사실이 굉장히 씁쓸한 일이지만, 하필이면 내가 좋아하는 마태우스님께서 그런일을 당하셨다는 생각에 웃음이 나요^^
제게 웃음을 주셔서 감사해요. 비가오네요. 고즈넉한 주말 보내시길요^^

마노아 2008-08-02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씁쓸한 오주문이군요. 그나저나 저 책을 무에 쓸까요. 그냥 반품 시키셔요. 고객의 단순 변심에 의한 반품...;;;

순오기 2008-08-03 0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학교 학부모독서회 8월도서가 '앵무새 죽이기'인데, 푸른색의 앵무새는 이미 봤는지라 일부러 논술가이드를 주문했어요. 대체 어떤 식으로 되어 있는지 비교해 볼려고요. 제가 세계문학 다이제스트나 한국문학이 어린이용으로 나오는 걸 결사 반대하는 이유가 바로 저런거라고요~ 저런 걸 읽고 책 읽었다고 정말 봐야 할 시기에 봐야 할만한 책으로 안 보거든요. 대한민국 교육의 현주소 수준이지요.ㅜㅜ

마태우스 2008-08-02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오기님/맞습니다. 저도 돈키호테 같은 거 계림문고 축약본으로 봤거든요. 그걸 보고 느낀 건, 돈키호테 좀 한심한 인간이다 이런 거... 알고보니 세르반테스의 의도는 그게 아니더군요. 하지만 어릴 적 읽었으니 커서 안읽잖아요. 저도 그랬지만요...
마노아님/호호, 어젯밤에 논술 문제 좀 풀다 잤습니다 정리가 되던데요 호호.
춤인생님/어머머 제가 좋아하는 춤인생님이시다! 님이 웃으셨다니 저도 기쁩니다. 세상엔 참 별의별 책이 많지요?
다락방님/맞습니다. 삽질! 적절한 단어입니다 !
무스탕님/아마도 그렇겠죠? 속독이 아무 효과 없다는 게 발표된 적 있잖아요. 그럼에도 속성교육은 각광받고 있더군요
브리니님/그니까 어떤 이들에겐 도움이 되는 거군요... 글구 님 말씀이 맞습니다. 수능최저등급을 통과해야 하는데, 거기 통과가 어렵죠... 그 중에서는 결국 면접과 논술이 중요하겠지만, 갑자기 죄송하단 말밖에 생각이 안나네요...
최상의 발명품님/그런 일이 없었다해도 무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님이 추천해주셨다는 것두요^^ 근데 저 우산은 잘 안잊어버립니다^^
승연님/제마리그말입니다... 세상은 넓고 책은 많아요
메피님/아..님이 교육감선거에 나왔다면...... 미국에 있다가도 와서 투표했을 거예요.
바람돌이님/입시가이드 정말 대단하죠? 갑자기 논술공부 하고 싶더라구요^^

노이에자이트 2008-08-02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논술은 논에서 마시는 술 아닌가요?

하루(春) 2008-08-03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웃겨. 얼마나 급히 주문했길래... 원래 그러신 건 아니죠?

비연 2008-08-03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큭큭...마태님. 오랜만에 크게 웃었습니다..^^

마태우스 2008-08-04 0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연님/아직 제 유머가 안죽었군요!
하루님/어..저 원래 그런 놈은 아니어요! 아닌가...^^
노이에자이트님/안녕하세요. 그렇게 심오한 댓글을 달아주시다니... ^^ 다음 댓글을 기대합니다 꾸벅.

무해한모리군 2008-08-12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 논술채점 아르바이트를 한적이 있습니다. 한 논술학원 수강생들이 쓴 답안지를 읽는데, 처음에는 깜짝 놀랬습니다. 고등학생들이 알기어려운 철학서들이 언급이 되어 있어서요.. 그러다 나중엔 화가 버럭 나더라구요.. 모두 비슷비슷한 답들.. 아마 환경문제에 대해 지문이 나오면 이렇게 저렇게 쓰라고 가르친 모양이더군요. 어찌나 씁쓸하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