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열정을 말하다>에서 류승완 감독이 한 말에 공감이 갔다. 정확한 말은 기억이 안나는데 하여간 이런 내용이었다. 취향이 맞지 않는 친구와 억지로 만날 필요가 뭐가 있느냐는.


120번째

일시: 12월 6일(수)

누구와: 과외 친구들과

마신 양: 겁나게 많이, 마시다 뻗었다...


내게는 20년 이상 된 친구들이 있다. 한때는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친구들이었다. 그랬던 그들이 싫어지게 된 건, 전에도 말한 적이 있지만 그들이 단란주점을 너무 좋아한다는 거였다. 나도 좋아하면 문제가 없겠지만 난 그런 데 가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억지로 끌려갔는데 돈을 똑같이 부담해야 하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난 1차만 끝나고 집에 가고자 했지만, 그들은 노골적으로 화를 냈다. 분위기 깨진다나 어쩐다나. 어쩌다 한번쯤 간다면 참아 보겠지만, 매번 그러니 고민이 될 수밖에. 난 그런 데가 싫다고 거듭 호소했지만 내 말은 늘 무시됐다.

“우리 나이 때 이런 데 안가는 사람이 어디 있어? 넌 도대체 어디 가고 싶은데?”

내가 맥주 마시면 안되냐고 했을 때, 친구가 보여준 반응은 경멸 그 자체였다.

“허이참 나. 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 친구들에게 부족한 건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었고, 넘쳐나는 건 타락과 방종이었다.


그런 그들을 내치지 못한 건 20년의 세월 때문이었다. 그래도 내게 가장 친하던 애들인데,란 생각이 나로 하여금 싫어 죽겠으면서도 그들의 부름에 응하고, 또 음침한 곳에 간 이유였던 거다. 결국 난 작년 어느 날 단란주점에서 그들과 대판 싸웠고, 뛰쳐나갔고, 다시 안만나기로 결심을 한다. 그로부터 일년, 내가 그들에게 연락하지 않은 것처럼, 그들 역시 내게 연락하지 않았다. 내가 작년보다 올해가 더 행복했다면 억지로 그런 곳에 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리라.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에게 이끌려 단란주점에 다니던 그 십수년을 어떻게 견뎠는지 신기할 정도다.


그 멤버 중 한명-알파라고 하자-은 내가 가끔 만나는 ‘과외팀’에도 끼어 있어서, 싫든 좋든 그의 얼굴을 볼 수밖에 없다(난 중1부터 2학년 여름방학까지 과외를 했다). 늘 단란주점을 가자고 목소리를 높이던 알파는 과외팀마저 버려놓아, 과외팀 역시 2차를 단란주점에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친구들 모임과 달리 과외팀은 매번 그러는 것에 거부감을 가졌고, “그런 데 가지 말자”고 얘기를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난 너무 감동을 해 그날 술값을 계산할 뻔했다. 그 뒤 과외팀 모임에 갈 때마저 생겼던 2차 기피증이 말끔히 치료된 건 물론이다.


어제 모임 역시 무척 즐거웠다. 난 많이 먹고, 많이 마시고, 많이 떠들었다. 누군가 말한다.

“2차 어디 갈까?”

알파는 또다시 단란주점을 가자는 뉘앙스의 말을 한다. 끈질긴 녀석. 과외팀의 리더는 대번에 그 제안을 거절한다. 내가 말했다.

“양재동 빠 갈까?”

내 간청에 이끌려 한번 거길 가봤던 알파가 한심하단 표정을 지으며 타박을 준다.

“그 후진 데 왜 가려고?”

과외팀 리더가 말한다. “야, 그래도 얘가 가자는데 한번 가 보자.”

그 말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친구들 모임에선 내 제안이 그토록 소중하게 받아들여진 적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 그전 모임에서 알파가 “단란주점 말고 다른 대안이 있느냐?”고 윽박질렀을 때, 맥주 마시러 가자는 내 제안이 얼마나 개무시를 당했던가. 억지로 끌고간 양재동 빠가 후지다며 알파가 얼마나 날 타박했던가. 그날 겪었던 수모를 생각하면 지금도 머리털이 곤두선다.


친구란, 인생이란 먼 길을 같이 걸어갈 동반자다. 가는 길이 틀린 동반자가 불가능하고, 서로에 대한 신뢰와 존경이 없는 동반자도 있을 수 없다. 20년의 세월이 중요한 게 아니라 가는 길이 맞는지, 믿을만한 사람인지가 더 중요하다. 진작에 그들과 결별하지 못한 게 후회가 되지만, 이제라도 내 길을 찾았으니 다행이다 싶다.


* 알파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반성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반성을 해야 할 쪽이 나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그럴 마음이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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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6-12-07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슬픈 일이에요..성인 남성들이 여흥을 여자끼고 술먹는 곳에 꼭 가야만 한다는
현실이요..^^ 그만큼 놀문화가 단단히 잘못되도 보통 잘못된게 아니에요..

무스탕 2006-12-07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20년이 훨 넘은 친구들이 있지만 여인네들이어서 그런지 맘은 아주 잘 맞는 편입니다.
놀이 문화도 비슷해서 서로가 편한 부분이지요..
마태님. 친구란 서로에게 신경을 써줘야지 신경이 쓰이게 하면 그건 친구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신경을 써주고 싶냐 신경 쓰이냐의 차이랄까나..? 자의냐 타의냐.. 하여간 그런거...)

꼬마요정 2006-12-07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르는 여자 끼고 술 마시면 맛있나요? 그런 곳에 가서 신나게 놀다가 나중에는 그런 곳에서 일하는 여자들 색안경 끼고 보고... 정말 슬픈 일이에요...
마태님은 그런 곳 안 좋아한다니 다행이네요...

또또유스또 2006-12-07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늦은 나이에 그런 동반자 친구를 만났답니다...
정말 소중하고 소중한 친구지요...
님의 글을 읽으니 더욱 그 친구가 고맙네요...
과감히 뿌리칠 수 있었던 님의 용기에..(십몇년이 걸렸지만..^^) 찬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추천도...

balmas 2006-12-07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저는 누가 그런데 가자고 한번 얘기나 좀 해줬으면 좋겠어요. 구경 좀 하게. ^^;
주위에 있는 애들이 다 가난한지라 ...

모1 2006-12-07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오래 참으셨구나...싶네요. 단란주점도 그렇지만 친구의 말을 그렇게 무시하는 행동은 좀 그렇네요.

비로그인 2006-12-07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반성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음.. 담대한 분입니다..


깐따삐야 2006-12-07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파는 무슨 알파... 엑스네요, 엑스!

2006-12-07 2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클리오 2006-12-07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친구랑 말하지 말아버리세요!! ^^ =3=3=3

2006-12-08 0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일레스 2006-12-08 0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가서 발로 차버리고 싶습니다. 이런 씨뻘...건 립스틱 짙게 바르고 -_-;;;

진/우맘 2006-12-08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반성하고 돌아오기를.......웃음밖에 안 나옵니다. ^^;;;

짱꿀라 2006-12-08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란 말을 떠올리면 이런 말이 생각이 나네요. '너 나랑 같이 죽을 수 있어'

2006-12-08 2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06-12-09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분/아앗 그게 보내셨단 말씀이군요 마음만 고운 게 아니라 손도 고우시네^^
산타님/글쎄요...전 옛날이면 몰라도 지금은....자신 없습니다. 제가 이기적으로되었다는..
진우맘님/와와, 님을 웃게 했으니 이번 페이퍼도 성공
페일레스님/립스틱을 바르면 발의 힘이 세진다고 모 박사가 그랬었죠^^
속삭이신 분/잘못한 걸 말했는데 거기에 공감하면 화해의 여지는 있죠. 다시 잘 지낸다니 다행이구요...제 경우는 취향이 너무 다른 거라......

마태우스 2006-12-09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클리오님/근데요...대판 싸우고 두달도 안되어 친구 중 한명의 부친상이 있었어요. 그때 어찌나 뻘쭘하든지...계속 마주칠 일이 있는지라 싸우면 불편하더라구요...
깐따삐야님/로마자의 알파를 알파벳의 엑스보다 더 높게 치시는 건 부당한 차별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사님/그러게 말입니다. 일관성이 있더군요^^
새벽별님/그죠? 멋진 친구입니다^^
모1님/제말이 그말입니다. 근데모1님, 궁금한 게 있었어요. 님 동생분은 모2님인가요?
발마스님/아..네..... 죄송합니다. 제가 위화감을조성했군요.... 하지만 저희들은 마음이 가난해요. 책 읽는 애가 하나도 없다는....
유스또님/감사합니다. 님의 추천에 힘입어 3주 연속 서재달인의 길로...아자아자
꼬마요정님/남자들끼리 얘기하는 것에 아무런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자들이 겁나게 많습니다. 놀이문화가 굉장히 기형적이 되었죠
무스탕님/님 말씀에 동의해요. 다만 같이보낸 세월이 워낙 길어서 그걸 뿌리치지 못했어요...
메피님/그러게요... 단란주점을 다 없애면 좋겠어요. 그곳 여자분들의 수입이 문제겠지만요....


2006-12-09 1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