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난사고가 여러번 있어서 그렇겠지만, 내 모교는 정보국 같다. 지문을 확인하고 비밀번호를 눌러야 문이 열린다. 바깥사람인 내 지문은, 당연히 입력이 안되어 있다. 그래서 내가 모교에 가는 방법은 다른 사람이 들어갈 때-혹은 나올 때-묻어 들어가거나, 경비실에서 왜 무엇 때문에 출입이 필요한지를 기재하고 들어가야 한다. 아쉬운 소리를 싫어하는 탓에 그동안 경비실에 가서 “일하러 왔다”고 얘기를 하고 들어갔는데, 가끔은 그 별거 아닌 권력으로 행세하려는 사람이 있어 씁쓸하다.


오늘 아침, 일을 하러 모교에 갔다. 경비실 수위 아저씨는 그동안 왔다갔다 하며 몇 번 인사를 했던 사람이지만, 그쪽에선 날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방명록에 기재를 하고 들어가려는데 오늘 따라 기분이 나쁜지 내게 시비를 건다.


(노크를 하고 문을 여니까 대뜸)

-왜? (다짜고짜 반말)

=저 기생충학교실에 가려는데요.

-누군데?

=여기 졸업생이구요, 조교로 4년 일한 적도 있어요.

-(날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뭐하러 왔는데?

=일하러 왔습니다.

-기생충학교실? 거기가 몇호실인데?

=334호실이요.

-일하러 왔다고? 무슨 일?


이쯤해서 난 더 이상 듣고 있기가 싫었다. “일이야 만들면 있겄제”라는 말이 그의 입에서 나옴과 동시에 난 몸을 돌려 그곳을 나와 버렸다. 더럽고 치사해서 그쪽으로 안들어간다. 등 뒤에서 소리가 들린다.

“어이! 문 열어줄 테니 들어가!”

평소 같으면 열 받아서 집에 가버리겠지만, 연구를 향한 내 열정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난 다른 출구로 갔고, 결국 교실원 한명의 도움을 받아 출입할 수 있었다. 그렇긴 해도 그 수위아저씨, 너무 웃긴다. 내가 무슨 일을 하던, 누구를 만나던 지가 무슨 상관이람? 그 사람 때문에 내가 연구를 포기함으로써 기생충학의 발전이 사흘 정도 늦어지면 지가 책임 질거야 뭐야.


하지만 교실에 있는 거울 앞에 서니 그 아저씨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되었다. 전날 술을 먹어서 초췌한 얼굴, 전혀 메이커처럼 안보이는 코트, 푹 눌러쓴 모자라니. 게다가 그 모자는 캔사스시티 로열스라는, 지난 20년간 최하위를 도맡아 했던 약체 팀이다. 그러니 그 인간이 날 무시할 수밖에. 앞으로 모교에 갈 때는 양키스나 보스톤처럼 돈 많고 야구 잘하는 구단 모자를 쓰고 가자. 좋은 연구는 좋은 모자에서 나온다.


댓글(23)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ooninara 2006-12-07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굴이 상하긴 하셨네요..앞으로 송년회가 줄이어 있으실텐데...몸 만들면서 술 드세요^^ 지금 쓰신 모자도 비싸 보여요.

노부후사 2006-12-07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마태우스 2006-12-07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니님/그죠? 제 피부가 원래 저렇지 않은데 흑.... 너무맘이아파요. 글구 몸은 11월까지 만들고 12월은 그 열매를 수확하는 겁니다..^^

마태우스 2006-12-07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피님/앗 이벤트 탈락하신 에피님이시다!!

Mephistopheles 2006-12-07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얼굴이..많이 상하신 듯....

비로그인 2006-12-07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연구는 좋은 모자에서 나온다."
음.. 하하 마태우스님 재밌습니다.


Mephistopheles 2006-12-07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걱...미스테리...어떻게...제가 마태님 서재에 들어온 줄 아시고...!!
먼저 댓글을 남기시다니...미스테리...

2006-12-07 17: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06-12-07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분/그럼요 그런 거가지고 속상해하믄 이 풍진 세상 어케 살려구요^^ 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메피님/그게 아니구요 에피메테우스란 분이 따로 있답니다^^ 그나저나 얼굴이 상해서 클났어요 제 피부가 원래 캡 좋았는데..
한사님/부끄럽습니다...

2006-12-07 17: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06-12-07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분/감사드립니다. 제가 큰 결례를 할 뻔했군요

플레져 2006-12-07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토닥토닥...
모교에 일하는 사람을 위한 장치를 해달라고 항의하세요.

무스탕 2006-12-07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자... 전 모자가 안어울리는 얼굴이에요.. -_- 가끔 슬프다는..
수확을 하는 12월을 잘 다독거려줘야 다음해에 상큼하게 출발하실수 있으세요.
너무 많이 들어서 귀찮으시겠지만 절주! 절주! 절주! 절주! ^^*

깍두기 2006-12-07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생충학의 발전이 사흘 늦어지는 불상사가 발생하면 어쩌려구 그 수위 아저씨는!

모1 2006-12-07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위 아저씨 너무 하시네..하셨는데 마태우스님 사진을 보니 이해도 좀....됩니다. 후후...

클리오 2006-12-07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으로 수위 아저씨가 뭐라고 하면, 공무원증을 만들어(교수증은 따로 없죠? ^^;) 노용히 보여주고 들어가세요.. 입장상 당연할 듯 하기도 하지만, 좀 제가 짜증날라고 하네요... 연구를 향한 열정, 대단하십니다.. ㅋㅋ

춤추는인생. 2006-12-07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구를 향한 님의 열정. 눈물나려고 해요 님..^^
전 야구모자 잘어울리는 남자가 좋아요 ^^ 멋지기만한걸요 마태우스님.!!

비로그인 2006-12-08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곤해보이셔요.. 술연구는 조금만하시지.. 후후

페일레스 2006-12-08 0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하십니다! 저 같으면 "별거 아닌 권력으로 행세하려" 했을텐데. ^^
사진은 항상 그렇듯이 멋지십니다. -_-)b

다락방 2006-12-08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은 연구는 좋은 모자에서 나오나요? ㅋㅋ 그럼 저도 오늘부터 모자 쓰고 일해야겠어요. 하하
마태우스님은 유머쟁이~

비로그인 2006-12-08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언제나 마태우스 님의 이러한 논리를 사랑합니다.

진/우맘 2006-12-08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헤헤헤헤...에피 & 메피~

마태우스 2006-12-09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우맘님/모니터에 따라서 'ㅇ'이 식별안될 수도 있다오^
주드님/아앗 전 주드님의 댓글에 늘 황송하옵니다^^
다락방님/주의사항. 모자를 쓰면 적응하기까지 머리가 가려울 수 있습니다^^
페일레스님/피부가 상해도 멋지다니, 전 정말 멋진 것 같아요 호호.ㅣ
무명씨님/누, 누구신지요? 하지만...술은 제 삶이고 운명입니다.
춤추는인생님/아이 그렇게노골적으로좋다고하심어떡해아이몰라남들이보잖아요^^
클리오님/안그래도 주위에서 마음 잡았냐,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호호홋. 교수증 있는데 그건 저희 학교서나 통할 뿐....그냥 묻어서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모1님/그, 그럴수가........너무하세요 흑.
깍두기님/초단위로 변하는 기생충학의 세계에서 사흘은 정말긴 시간이죠. ^^
무스탕님/전 전날 마신 술이 다음날 삶에 하등의 지장을 주지 않는 용수철 인간입니다. 저같은 사람이 절주를 한다면 술은 누가 마시나요?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전 마시렵니다 어흥
플레져님/님의 위로를 받으니 그마나 남아있던 앙금이 사라지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