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만이(가명. 누나 첫째아들)가 외고 붙었단다. 축하한다고 전화라도 해줘라.”

엄마의 말에 난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외고에 간 게 대단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누나가 두달이 다 되도록 엄마에게 전화조차 안한다는 사실이 떠올라서였다. 일설에 따르면 자기 아들이 외고 시험 치는데 엄마가 뭐 하나 도운 게 없다는 게 삐진 이유라던데, 그 얘기를 들으니 나도 그쪽 패밀리와는 연락을 끊는 게 좋겠다 싶었다.


엄마의 거듭된 간청에도 홍만이에게 전화를 안하던 나, 지난 목요일 갑자기 그날이 수능 날인 걸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홍만이가 집에 있을 거란 생각이 나서 드디어 녀석에게 전화를 했다. 집에 있었다.

“나랑 놀러 나갈래?”

순순히 그러잔다. 전날 새벽 4시까지 일을 하느라 무척 피곤한 상태였지만, 난 가방을 싸들고 홍만이네 집으로 향했다. 가다가 예과 학생을 만났을 때 이걸 물어봤다.

“학생은 중 3때 뭐가 제일 하고 싶었어요?”

학생의 대답, “게임방에 가고 싶었겠죠.”


어느 새 내 키보다 더 커버린 홍만이를 데리고 고속터미널에 갔고, 거기 있는 만화방에 둥지를 틀었다. 두시간쯤 만화를 보다가 아웃백에서 스테이크를 사줬고, 홍만이는 레모네이드, 난 맥주잔을 부딪히며 외고 합격을 축하해 줬다. 그러고 나서 근처 PC방에 갔는데, 누나한테 전화가 온 건 그때였다.

“너 어디서 뭐하니?”

나, “왜?”

“혹시 PC방 같은 데 간 건 아니지?”

“그--럼. 나 지금 경기도 양평이야. 밥 사먹이고 있어.”

누나는 집에서 아예 게임을 못하게 만들어 놨단다. 절대적으로 옳은 건 없지만, 애가 그렇게 게임을 좋아하는데 어느 정도는 할 수 있게 해줘야 하지 않을까? 홍만이는 게임을, 난 주 업무인 댓글달기를 하다 못다 본 만화가 있어서 다시금 만화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9시가 넘어 집에 들어가자 날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조카들이 도대체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고 아우성이다. 장난도 치고 유치한 유머로 웃겨 주면서 시간을 보냈다. 10시 반, 뭘 타고 갈까 망설이다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집에 가는 동안 피곤해 죽는 줄 알았지만, 마음만은 뿌듯했다. 간만에 좋은 삼촌 노릇을 해서. 더 중요한 이유로, 내가 그렇게 함으로써 엄마가 기뻐하셔서.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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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예진 2006-11-18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히 재미있네요~
'난 괜찮은 자식이다'하셔서 '난 효자다'라고 말하시려는 줄 알았답니다!

파란여우 2006-11-18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카 성이 설마 '최'씨는 아니죠?...아항, 가명이래두...^^*
마태님, 넘 멋져요!<==이건 부리 버전
마태님, 넘 착해요!<==이건 알라딘 아파트 아줌마들 버전
마태님, 앞으로도 잘하실꺼면서!

짱꿀라 2006-11-18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너무 로맨틱하다고 할까 아니면 멋지시다고 해야 할까 어떤 말을 붙혀야 할까 고민입니다. 정말로 굿입니다.

프레이야 2006-11-19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형제들끼리 잘 지내는 모습을 보시면 제일 행복해하시죠.. 그 반대이면 마음이 참 괴로운신가 보더군요. 괜찮은 외삼촌, 동생, 아들!!

마태우스 2006-11-19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혜경님/괜찮은 외삼촌인 건 맞다고 생각하지만...호호...좋은 동생은 결코 아니고.. 좋은 아들은....아직 부족하죠.
산타님/고맙습니다. 로맨틱, 굿, 멋지다 전부 과분한 말이옵니다^^
여우님/님께서 꼬리로 절 쓰다듬어 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어요
박예진님/어마 오랜만이네요 요즘 한창 클 텐데, 이미지 사진 바꿔주세요^^

moonnight 2006-11-19 0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멋진 외삼촌이세요! >.< 조카들이 친구들에게 얼마나 자랑을 할지.. 수고많으셨어요. ^^

모1 2006-11-19 0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디 산같은데라도 같이 가시는 줄 알았어요. 홍만군..삼촌덕에 행복한 하루였겠어요.

비로그인 2006-11-19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악관정책차관보 던가...
아무튼 한국 최초 맹인 박사님으로 유명하신 강영우 박사님 책을 보면
그런 대목이 나온답니다.

"맹인이고, 고아였던 내가 오늘날 이자리에 있을 수 있게된 것은
내 삶의 여정에서 만난 인간천사들 덕분" 이라고요.

아마 마태님이 그 "인간천사들" 중의 한분이신지도 모르죠 ^^

춤추는인생. 2006-11-19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그--럼. 나 지금 경기도 양평이야. 밥 사먹이고 있어.” 저여기서 감동먹었어요
세심하고 가슴따뜻한 멋진 남자분이시죠 마태우스님은..^^


무스탕 2006-11-19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카랑 만화방 가고 피씨방 가주는 삼촌, 정말 멋지구리~!! 세요.
분명 나중에 술도 알려주시는 진짜 멋지구리~!! 삼촌이실거에요 ^^

마태우스 2006-11-20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스탕님/안그래도 누나가 그걸 걱정합니다. 조카한테 술만 왕창 먹일까봐... 물론 오해죠. 전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저 혼자 마시지 다른 이한텐 안권한다는....
춤추는인생님/가슴이 따뜻해서 더위를 많이 탄답니다^^
고양이님/안그래도 겨드랑이가 가려운데 날개가 나려나봐요^^
모1님/산 같은 데 가자고 하면 싫어할껄요. 역시 애들은 지가 좋아하는 걸 해야..
달밤님/정말 멋진 댓글이어요. 님 댓글 다른 이들한테 자랑할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