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순이 : 식모, 버스안내양, 여공 - 시대가 만들고 역사가 잊은 이름
정찬일 지음 / 책과함께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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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많은 직업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직업에 귀천은 없지요. 하지만 사회적인 인식이 부정적이었던 직업은 있었습니다.

‘식순이’라 불린 식모와 ‘차순이’라 불린 버스안내양과 더불어 여공인 ‘공순이’들이 그것이죠

1960~70년대만 하더라도 ‘부잣집 식모살이’는 익숙한 풍경이었습니다. 동생들을 공부시키고 가난한 집안 살림을 돕기 위해 많은 맏언니, 10대 소녀들이 ‘식모’가 되었습니다.

박카스와 ‘무언지 모르는’ 주사약으로 버티며 철야 작업을 하던 외딴방의 ‘여공’과, 낯선 서울땅에 올라와 남동생과 오빠의 학비를 대고 가족들에게 생활비를 보내기 위해 ‘안내양’을 했던 영자는 그렇게 번 돈으로 남동생과 오빠의 학비를 대고 가족들에게 생활비를 보내는 어느 가족의 착한 딸이자 누나 혹은 여동생으로만 존재할 수 있었던 1960~1970년대 많은 여성노동자들의 다른 이름입니다.

저자는 식모, 버스 차장, 여공들이 겪어야 했던 차별과 투쟁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식모를 고용하는 집에서는 침식을 제공한다는 점 때문에 적은 월급을 주고 값싼 노동력을 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식모살이는 고되고 비참했습니다. 주인들로부터 욕설을 듣거나 구타를 당하기 일쑤였고 월급을 제때 받지도 못했습니다. 휴일도 거의 없었고 밥도 주인 식구들과 같이 먹지 못했습니다.

p37 임금도 최저 수준이었다. 조선인 가정의 경우 1910년대 중반까지는 월 3원정도였고, 1920년대 후반에 5-6원, 10940년대 8-10원으로 인상되었다. 1921년 기준 쌀 한 가마니 가격은 16원 4전이었다. 두 달 뼈 빠지게 일해도 쌀 한가미 살 수 없었다.

p63 전쟁으로 수많은 가정이 피해를 입었지만 그렇지 않은 곳도 있었다. 식모를 두던 습관은 전쟁 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식모 자리를 원하는 사람이 많아지니 식모를 구하기가 쉬운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전쟁까지 겹치면서 식모를 구하는 사람들이 훨씬 유리해졌다.

p103 가장 큰 고역은 겨울에 찬물로 일하는 것이다. 찬물로 밥 짓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걸레질하노라면 손이 떨어져 나갈 것 같다. 물을 데워 쓰는 건 아궁이 좋을 때고, 시간을 벌기 위해 찬물로 후닥 해치운다. 겨울에 손등이 밭이랑처럼 터도 어쩔 수 없다

식모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일도 더러 있었다. 범죄는 멸시하고 학대하는 사회에 대한 반항과 보복 심리가 원인이었다. 주인집 귀중품을 훔쳐 달아나다 절도죄로 처벌받거나 주인집 아이를 유괴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p133 신문들은 주인집의 횡포보다는 식모가 저지른 범죄를 더 많이, 더 비중있게 다루었다. 이는 실제로 식모에게 가해진 폭행이나 횡포가 많지 않음을 의미하기보다는 식모와 주인이라는 종속적 관계 속에서 주인이 식모에게 저지른 범죄가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묵인되었음을 의미한다.

p161 '식모‘라는 말도 차츰 사라지기 시작했다. 인간 대접 못 받는 인상이 워낙 강해 ’식모‘라는 말 자체가 비하하는 단어로 굳어졌다. 하녀,식순이,부엌데기보다는 나았지만, 식모들은 자신을 ’식모‘라고 부르는 데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식모가 점차 줄어든 것은 산업화로 여성들의 일자리가 많이 생겨서입니다. 아파트 중심의 주거 구조 변화와 핵가족화도 식모의 필요성을 감소시켰습니다.

 

‘버스안내양’이라는 직업이 등장한 것은 서울에서 1961년부터 버스안내원이 남자에서 여자로 바뀌면서였습니다. 1965년 전국의 버스안내양 수는 1만7160명. 대부분 18세 전후의 나이에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배움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 직업현장에 뛰어들었습니다.

버스안내양은 인기 직종이었습니다. 별다른 훈련이 필요없는 데다 다른 직종에 비해 보수도 높은 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침식이 제공된다는 것이 매력적이었습니다. 대부분이 농촌 출신의 상경 소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숙식 제공의 실태도 들여다보면 열악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보통 2평짜리 방에 9명이 모여 살고 나머지는 차주집에서 횡포에 가까운 감시·감독을 받으며 지냈습니다.

p288 저임금과 더불어 악명을 떨친 것은 근무시간이었다. 이틀 일하고 하루 쉬는 근무 형태로서 승무하는 날 근무시간은 18시간이었다. 휴일하루를 감안하면 일일 평균 근로시간은 12시간이 된다...임금,후생복지 등이 해마다 개선되기는 했지만, 1인당 하루 18시간 근무는 버스안내양이 사라질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버스가 제 속도를 내고 달릴 때에도 버스 문은 열려 있었습니다. 사람들을 다 태우고 안전하게 문 닫고 출발하기에는 배차 시간이 밟혔습니다. 미처 문을 닫을 수가 없던 차 안에서 그 열린 문을 두 팔로 버티고 수십 명의 체중을 감당해야 했던 건 안내양들의 초인적인 힘이었습니다.

p308 달리는 차에 아슬아슬 매달려가는 안내양들은 시대의 자화상이었다. 안내양은 미어터지려는 버스의 최후 보루였다. 그가 못 버티면 승객들이 쏟아져 나와 대형사고가 날 수 있었다.

p322-323 늘 교통사고에 노출되고, 승객과 흔들리는 버스에 시달리는 안내양의 몸은 ‘종합병동’이었다. 맨손을 대면 차문에 쩍 달라붙는 겨울에는 동상에 자주 걸렸다. 손발이 트는 것을 예방하는 값산 ‘동동구리무’는 화장품이라기보다는 생활필수품이었다.

1970년대 중반 5만 명에 육박했던 안내양은 1982년 9월 10일 시민자율버스가 등장하면서 줄기 시작했습니다. 안내양이 지키던 문 하나뿐이던 시내버스에 앞문이 달리고, 승객들이 돈을 내게 된 것입니다.

 

여공들은 섬유ㆍ의류ㆍ봉제ㆍ전자업에서 주로 일했습니다. 장시간 근로와 저임금, 인권의 사각지대는 그들이 처해 있던 현주소였습니다. 수출산업의 70%를 차지할 만큼 수출에 기여했지만 세상은 그들을 ‘공순이’라 불렀습니다.

p442 여공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은 이중적이었다. ‘고향의 가족을 부양하는 소녀’가 동전의 앞면이라면 그 뒷면에는 ‘타락과 문란’이 웅크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여공들이 또래끼리 모여 생활하므로 성적으로 탈선하기 쉽다고 단정했다.

황무지나 다름없던 구로동과 가리봉동 일대에 크고 작은 공장들이 하나둘씩 들어서기 시작했다. 먼지로 가득한 공장 안에선 시골에서 갓 상경한 언니, 오빠들이 밤낮없이 기계를 돌렸다.

p383 고향을 떠나 취직한 그들의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임금 형태는 대체로 일급제였고 생산량에 따라 임금이 지불되는 도급제였다. 하루 12시간 주야 교대로 일했고 일요일만 쉬었다.

1970년대에는 노동 야학, 대학생 위장 취업 등 다양한 방법으로 노동자의 권익을 찾으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열악한 환경을 비관하지 않고 부당한 법과 제도, 사회적 편견에 맞서 싸운 여공들도 많았는데, 이들의 투쟁은 노동조합의 설립 등 한국노동운동사에 한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최근 여성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많이 달라진 느낌을 받습니다. 여성정책을 강하게 추진했던 과거 정부에 대한 반작용인지, 아니면 여성의 경제적 지위가 충분히 높아졌다는 일부의 인식인지 모르겠지만,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과 인식개선이 과거보다는 많이 변화되어가고 있는 듯합니다.

‘여성상위시대’니 ‘남성역차별’이니 하는 용어가 스스럼없이 사용되고 있지만, 직업 전선에서 많은 여성들이 부딪치는 현실은 아직 냉혹하기만 합니다. 일부 여성의 사회경제적 약진 뒤에는 아직도 저임금과 차별로 고민하는 수많은 여성들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과거의 역사 속에만 존재했던, 이제는 사라진 ‘식모, 여공, 버스안내양’은 우리의 어머니일수도 있고, 우리의 언니(누나)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계를 위한 처절함과 가족을 위해 희생을 무릅쓴 그녀들의 숭고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당시 여성들이 겪었던 고초를 인터뷰, 신문 기사, 대중 문화, 사진 등으로 생생하게 고증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고, 특히 당시의 신문 기사를 읽을 수 있어서 흥미로웠습니다.

지금의 여성들이 가진 직업이 30년,50년 후에는 어떤 모습으로 남겨질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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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 - 감정 오작동 사회에서 나를 지키는 실천 인문학
오찬호 지음 / 블랙피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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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한국 사회는 부끄러워해야 할 일은 부끄러워하지 않고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할 일에 대해서는 과하게 부끄러워합니다. 저자는 부끄러움을 회피하고, 사과하기보다 변명하고 다른 사람이나 사회를 탓하기 바쁜 사람들이 상식의 기준을 비틀어가며 타인에 대한 차별, 혐오, 폭력으로 자존감을 부여잡으려는 사람들의 악다구니 속에서 어떻게 해야 끌려들어가지 않고 자기를 보호할 줄 아는 개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part 1에서는 괜찮지 않은 일에 대해 소제목을 달아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구조적 불평등을 보지 못하게 하는 긍정성의 과잉과 사회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자기 아집에 빠져 자기의 가치관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꼰대기질을 비판한 부분이 인상깊었습니다. 특히 꼰대는 나이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 젊은 꼰대 또한 꼰대질에서는 늙은 꼰대 못지 않다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p56-57 특정한 권력관계를 악용해 상대의 모든 걸 간섭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꼰대다. 나이가 젊다고 다 꼰대가 아닐 이유도 없다. 자유라는 명목으로 주변의 타당한 비판에 귀를 닫거나 개성이라는 달짝지근한 단어를 남발하며 자신의 기준 ‘외’의 것을 다 구린 것으로 바라본다면 그 사람이 꼰대다.

 

part2에서는 앞장과는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부끄러워하지 않아야할 항목에 대해 과하게 부끄러워하는 이유는 강박 때문이라고 합니다. 남자다움과 여자다움, 혼족 강박, 평범함,긍정성,몸관리,인맥,소비,중립 강박 등 강박의 종류도 다양했습니다.

p135 독해져서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나간 예외적 개인들은 정확히는 ‘독함’만이 자신의 상황을 현재에 이르게 했다고 철저하게 믿는 개인들은 이런 이야기에 현혹당하는 데 익숙한 타인을 만나 삶의 비법을 전수하기 바쁘다. 독해지면 안 될 것이 없다는, 그러니까 모든 문제의 원인을 개인에게서 찾아야한다는 사람들이 늘어나니 원래 엉망인 세상은 더 엉망이 된다.

p148 혼자는 중심으로부터 ’배제된 홀로‘가 아니라 사회적 관습을 잠시라도 거부하는 ’적극적 자아‘다. 이들은 평범한 사람들하고 함께하지 못하는 소극적 인물이 아니라 평범을 가장한 일상의 폭력이 연속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단절한다.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함께 밥먹고 술마시면 피곤하기 때문이다...’함께‘가 되면 관성적으로 주고 받는 이야기들이 싫어서다. 내세울 것 많은 사람들의 무용담에 고개를 과하게 끄덕거리는 청중 역할을 피하고플 뿐이다.

p178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을 모른다‘는 말은 인간 관계가 수학공식처럼 이루어질 수 없음을 뜻한다. 서로 간의 갈등은 당연지사며 인맥이 넓든 좁든 각자만의 이유가 있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한국에선 타인과의 관계가 ’많고 원만할수록‘좋은 사람으로 규정된다.

 

part 3에서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고 있습니다.

저자가 말하는 요지는 ‘내가 괜찮다고 여기던 것들이 남들에게는 괜찮지 않았다.’인데 우리는 이 문제를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까요?

저자가 본문에서 다뤘던 여러가지 사회 문제들을 되새겨 보았습니다. 노키즈존, 맘충, 여성 혐오, 성차별 등. 대부분의 문제가 ‘배려’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노키즈존은 유아나 어린이들과 그의 부모들을 배려하지 않는 것에서 비롯되었고, 맘충은 아이를 너무 우선시 하다 보니 다른 부분의 배려를 버린 경우이고, 여성 혐오와 성차별은 맥락이 다소 다르나 기본적으로는 같은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배려가 부족한 사회에 살다 보니 각종 차별이 일어나고, 부끄러움을 등한시 하고, 타인의 희생 없이는 자신을 드러내기 힘들어 합니다. 심지어 스스로 왕따를 예방해야 하는 지경까지 이릅니다.

저자는 ‘빌어먹을 사회를 만든 건 우리’라고 말합니다.

p208 행동의 기준을 과거를 귀감삼아 마련하는 것은 분명 중요하다... 내 삶의 방향이 그릇됨을 직시하고 그 반대 방향으로 한걸음씩 걸어가는 것만이 대안이다. 모호하게 들리겠지만 이것만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유일하고도 구체적인 방법이다.

p220 성공해야지만 살아남는 문제 많은 사회에서 실패해도 죽지 않을 상식적인 사회로의 객관적인 변화는 이를 희망하는 나와 너의 구체적인 실천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그렇게 세상이 달라지면 우리들은 대단한 결심 없이 평범하게 살아도 존엄할 수 있다.

 

지금 같은 사회를 만든 건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옛 세대들을 지적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이야말로 바뀌어야 하고 노력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현 사회를 만든 만큼 변화를 줄 수 있는 존재 또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들 모든 차별을 없앨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노력을 게을리 한다면 지금보다 더 좋지 않은 사회가 될 거라고 감히 추측해 봅니다.

 

p37 딱 한걸음만 떨어져 보면 말도 안되는 생각과 행동을 타인을 향해 할 수 있는 용기, 이것이 혐오다. 그럴만한 이유를 상대를 가려서 주장하는 사람, 혹시 당신 아닌가?

p40 간절해도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사람이 흑인이기 때문입니다. 여자이기 때문입니다. 장애인이기 때문입니다. 비정규직이기 때문입니다. 지방대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난하기 때문입니다. 사회학은 같은 조건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 성공한 ‘예외’에 주목하여 인생은 개인이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결론 내지 않습니다.

p43 강자의 문화를 옹호하고 직장의 꽃이 되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주도하는 그런 사람, 하지만 위기가 닥치면 제일 먼저 꺾여 버리는 그런 꽃으로서 여자는 존재한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두꺼운 유리천장 아래서 여성들은 ‘평범한 삶을 우연에 맡겨야 하는’약자다.

p62 한국은 차별을 차별이 아니라고 하는 부끄러운 사람이 그냥 많다. 그냥 많다는 말은 사회의 시스템이 차별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런 곳에서 자연스럽게 살다보면 누구나 차별에 둔감한 사람이 된다.

p84 통계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다. 그저 여성의 '근속기간, 노동시간'이 짧으니 급여가 낮을 뿐이다. 문정희의 시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을까>의 한 구절처럼 배울 만큼 배운 여성들이 "크고 넓은 세상에 끼지 못하고 부엌과 안방에 갇혀"있기 때문 아니겠는가. 내 아내도 결혼한다고 경력단절이요, 애를 키워야 하니 노동시간이 길 수가 없었다. 이런 커리어로는 무슨 일을 악착같이 하더라도 급여가 낮은 일자리를 구할 가능성이 높으니 전업주부에 충실한 게 가정의 화목을 위해서 차라리 나은 역설이 발생한다.

p94 성실해야만 하는 그 절박한 상황이 겹쳐진 사람일수록 투자한 대가를 얻기란 쉽지 않다. 나는 첫 차를 탔기에 논문을 쓸 시간이 없었고 그러니 대학 안에서 제때 월급 받는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출퇴근에만 7시간을 허비하는 일정이 일주일에 꼬박꼬박 한 번씩 반복되는데 무슨 연구를 한단 말인가.

p102 내가 아파도 무너지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어야지만 노력할 의지가 북돋아지고 그래야 사회는 정체되지 않는다. 건강한 ‘우리’가 많아야 사회는 발전하며 ‘내’가 그 혜택을 받는 건 당연하다.

p113 차별을 차별이 아니라 하는 폭력도 때론 필요하다는, 혐오를 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가난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자꾸만 예외적인 이야기를 꺼내며 성실, 노력같은 단어로 우롱하고 자기 권리랍시고 타인을 조롱하는 사람들이 만연하는 이유는 다 그래도 되기 때문이다.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사는 사람만 바보가 될 뿐.

p126 남자는 군대 갔다 왔으니 극한의 일을 경험한다. 남자는 자연스럽게 리더십을 배우고 도전정신은 물론 주어진 일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체계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능력을 갖춘다. 기업은 남녀를 차별하지 않고 ‘리더십’, ‘열정’, ‘구체적인 문제 해결 능력’을 중요하게 평가한다. 그러니까, 그게 결국은 남녀차별이 된 셈이다

p153-154 내세울 것이 있다는 것은 타인을 괴롭혔다는 징표일 가능성이 크다. 성공한 사람들 중 가족의 희생이 없었던 경우가 있을까? 미장원에서 잡지책 몇 장만 넘기면 ‘내가 일에만 전념하도록 뒷바라지를 해 준 아내에게 미안하다’는 말이 등장한다. 누군가의 삶이 ‘마이너스’되는 걸 당연 삼아 자신의 ‘플러스’ 인생을 마련하는 우스운 태도도 ‘결정적인 배경’을 애써 감추는 경우에 비하면 그나마 봐줄 만하다. 조금이라도 잘난 사람들은 죄다 ‘혼자서’ 그 경지에 이르렀다고 자화자찬하면 ‘배경이 달라서’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들을 기만한다.

p169 냉정하게 말해 초등학생까지 화장에 관심을 보인다는 건 예쁘지 않다는 이유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시점이 과거보다 빨라진 시대의 결과물이다.

p215 하지만 이런 비판이 불편하다는 사람을 자주 만난다. 이들은 내게 “우리나라가 이렇게 성장한 것을 폄훼 말라!”면서 사회구조에 대한 합리적 비판을 부정하고, “왜 그렇게 부정적으로 살려고 하느냐?”면서 사회를 바꾸기 위한 개인의 효과적인 실천 방안을 거부한다.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만의 레퍼토리가 아니다. 대학생도, 고등학생도 판에 박힌 질문을 던진다.

p230 대한민국 곳곳에서 인공지능이 지배하는 미래를 대비하여 자녀 교육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강의가 성행했다. 그런데 다른 나라에선 알파고 돌풍과 비례하여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돈을 주는 복지 정책인 ‘기본 소득’에 대한 관심이 늘었다고 한다. 인공지능의 세계에서 일자리를 잃어 자존감을 상실할 다수에 대한 걱정을 함께하기에 가능한 관심이었을 것이다. 자존감이 무너지지 않길 원하는가? 그럼 자신감 좀 없어도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면 된다.

p248 공감의 시작은 자신이 타인의 상황에 쉽사리 공감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다. 공감의 실천은 “나도 네 마음 안다”는 기만적인 사람이 되길 거부하고, 아픈 것도 서러운 사람에게 “어쩌다가 그랬어!”라고 묻는 황당한 사람이 되지 않는 거다. “내가 감히 너의 슬픔을 알 순 없겠지만, 노력할게” 라고 말하면서 상대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려는 성찰적 사람이 되는게 중요하지, 입으로만 '공감'을 말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p251 한국사람 중 집단주의의 단점이 장점보다 훨씬 많음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정상적인 개인주의자라 할지라도 한국에서는 ‘너로 인해 다른 사람이 피해를 보았다’는 핀잔을 들으며 비정상적인 사람이나 사회생활을 잘 못하는 인간으로 취급당하는 경우가 많다.

p272-273 그래도 ‘어떻게’를 추상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아서 확실한 방법을 소개한다. 가장 자본주의에 어울리는 방법인데, 객관적으로 정치 영역에 돈을 지출해야 한다. … ‘부끄러움’의 본질을 망각시키는 현실이 싫다면 그 반대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지향하는 단체에 구체적인 도움을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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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어서 밤새 읽는 해부학 이야기 ㅣ 재밌밤 시리즈
사카이 다츠오 지음, 전지혜 옮김, 박경한 감수 / 더숲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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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해 전 인터넷 커뮤니티를 뜨겁게 달구었던 사진이 있었습니다. 바로 5명의 남성이 카데바(해부용시신)을 앞에 두고 기념사진을 찍은 것이었죠 실제 병원에서 의사들이 찍은 것인데 망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점에서 논란이 일었습니다.

p104 시신 기부운동으로 얻은 최대 성과는 근본적으로 시신해부를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었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아무리 의학을 위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시신을 해부하는 일은 징벌에 가까운 잔인한 짓이라 여겼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기 몸을 직접 제공하겠다고 시신 기증의 뜻을 열정적으로 밝히면서, 해부를 위해서 시신을 제공하는 일은 인간으로서 자랑스러운 행위로 인식이 바뀌었다.

시신을 처음 대하는 것은 의대생들의 해부학실습시간의 첫 관문입니다. 의과대학을 다니지 않는 이상 잘 모를 수 밖에 없는 해부학이야기, 해부에 대해 쉽고 흥미롭게 풀어놓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일본 아마존 청소년과학 분야 베스트셀러라고 하는데요, 해부 실습의 사전준비 작업부터 해부학의 역사와 발전, 해부학으로 바라본 몸의 형태까지 상세히 나와있습니다.

또한, 해부학 용어를 쉽게 설명해주고, 인체의 골격과 근육의 위치와 그 역할에 대해 전체적으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신문기사에서 종종 보도되는 ‘무릎인대파열’에 대해 책에서는 이렇게 설명해줍니다.

p194 운동선수가 인대가 파열되었다고 보도할 때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인대가 파열되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 이유는 인대가 파열하면 인대 뿐만 아니라 관절포를 포함한 주변 섬유조직도 끊어질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인체의 구조에 대해서 배우는 과목인데, 의학에서 가장 오래된 기초의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체의 근육과 뼈의 이름은 어렵게 느껴지고, ‘해부학은 무섭고 잔인하다’ 혹은 ‘의학 분야는 딱딱하고 재미없다’, ‘해부학은 전문 분야다’라는 생각했었는데, 해부학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독자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책입니다.

새로운 기술이나 치료법이 개발되면 자연스럽게 사람의 몸을 새롭게 봐야 하는데, 이때 해부학이 필요합니다. 첨단 의학은 아니지만 발전된 의료 기술에 있어서 꼭 필요한 기초의학분야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일상 생활에서 과학 지식은 많은 활용도가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생소하고 어렵기만 합니다. 인체의 근육과 뼈의 이름을 줄줄 외우기보다 이런 책을 통해 우선 흥미를 가지는 것으로 시작해보시기 바랍니다.

인체라는 우주를 여행하면서 장기나 조직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도록 길을 가르쳐주고, 그 작용과 성질 등을 알려주는 인체 지도, 그것이 바로 해부학이다 - P6

폐를 살펴보면 오른쪽허파는 셋, 왼쪽 허파는 둘로 나뉜다, 이를 폐엽(허파엽)이라 부르는데 실제로 관찰해도 오른쪽 그림에 묘사된 것처럼 둘, 셋으로 나뉘어 있다. 이는 흉막이 폐엽의 틈새로 들어가서 경계를 명확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 P150

심장은 심장 아래쪽의 두꺼운 벽으로 이루어진 심실과 심장 위쪽의 얇은 벽으로 이루어진 심방으로 나뉜다. 이 심실과 심방 사이에는 수평 방향의 벽이 있다. 쉽게 말해 심장은 수직 방향(좌우)으로 나뉜 것이 아니라 수평 방향(상하)으로 나뉘다는 뜻이다. 심실과 심방의 경계에는 관상동맥(심장동맥)이 지나고 있어서, 외부에서 봤을 때도 경계면은 쉽게 구분할 수 있다 - P156

"연골은 훌륭한 신체 부위이지만, 내부에 혈관이 지나가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다. 즉 이 부위는 다치거나 상하면 저절로 회복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 P196

눈이나 신장이 지방에 둘러싸여 있다는 점, 지면을 강하게 차려면 뒤꿈치가 튀어나와야 한다는 점 등 인체 구조에는 저마다 그렇게 생긴 이유가 있고, 무엇 하나 쓸모없는 부위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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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어서 밤새 읽는 인체 이야기 ㅣ 재밌밤 시리즈
사카이 다츠오 지음, 조미량 옮김, 정성헌 감수 / 더숲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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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마시면 왜 취하는가?

병원의 수술복은 왜 녹색일까?

왜 심장은 하트모양이라는 이미지가 생긴걸까?

살다보면 한두번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것 같아요.

이 책은 우리가 쉽게 접하고 막연하게 알고 있는 인체 관련 내용을 쉽고 재미있게 풀어놓았습니다.

1. 술을 마시면 왜 취하는가?

p17 뇌에서 급하게 ‘알코올 탈수소 효소’가 알코올을 분해하지만, 분해 속도가 음주 속도를 다라잡지 못할 경우에는 신경전달물질에도 영향을 미쳐 정보처리 능력이 엉망이 된다. 이것이 ‘취한 상태’다

2. 병원의 수술복은 왜 녹색일까?

p100 한 가지 색을 오랫동안 본다음에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면 그 색이 눈앞에 그대로 보인다. 이것이 잔상이다.

p101 수술 중에 잔상이 보이면 눈이 피로해져 수술에 집중할 수 없어 실수할 위험이 있다. 즉, 수술의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 녹색 수술복을 입게 된 것이다

3. 왜 심장은 하트모양이라는 이미지가 생긴걸까?

p155 심장에는 심실과 심방이 있는데, 심장을 하트 모양으로 묘사했을 당시에는 심실만 심장이라 여겼다. 심실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확실히 하트모양과 비슷하다

의학 지식과 정보가 인터넷에 넘쳐나고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범람하는 잘못된 의학정보,지식의 부작용은 개개인의 건강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큰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듯 합니다. 여전히 현대과학으로도 모든 것이 밝혀지지 않았고 모르는 것이 여전히 무궁무진하지만 그만큼 신비스러운 것이 우리의 몸입니다.

막연하고 어렵게만 느껴지기 마련인 ‘의학’, ‘인체’에 대하여 조금이나마 감을 잡을 수 있는 책이었습니다.

인체는 마치 작은 우주와 같고, 그런 인체에 대해 아는 것은 자신의 몸에 대해 알아가는 시작입니다. 그동안 몰랐던 인체에 관련된 내용들과 대강 알고는 있었던 내용이지만 이 책에서는 더 전문적이고 깊은 내용을 설명하니, 그동안 알고 있었던 지식이 너무 초라해보였습니다. 앞으로 인체 또는 의학에 관련된 책들을 더 많이 접하여 좀 더 많은 정보들을 습득하고 배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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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3
알베르 카뮈 지음, 유호식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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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치사율이 매우 높은 전염병이 마을에 몰아칠 때 인간들은 살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합니다. 가족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다른 마을에 있는 자신의 사랑하는 이를 보기 위해서 섬을 탈출하기 위해 애를 쓰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무슨 짓이던 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살아남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알제리의 오랑시에는 페스트가 만연하자 오랑시는 외부로부터 완전히 차단됩니다. 모든 것이 봉쇄된 한계 상황 속에서 역병은 더욱 기승을 부리고 도시는 커다란 혼란에 빠집니다. 의사 리유와 지식인 타루는 혼란에도 불구하고 질병과 싸움을 벌이며 묵묵히 자신의 임무를 수행합니다.

의사라는 자신의 사명감과 다른 이유없이 자신 앞에 있는 환자들을 살리겠다는 의지만 있을 뿐입니다. 그 외에도 타루는 보건대를 스스로 조직합니다. 그리고 페스트가 심해져 사람들이 장례 절차도 없이 땅에 묻히기 위해 수송되어 질 때 사람들은 전동차에 꽃을 던집니다. 먼저 떠나는 이에 대한 인간애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페스트라는 부조리에 각자 나름대로 반항합니다. 희망을 가지고 행동을 합니다. 그것이 부조리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임을 알게 됩니다.

파리에 아내를 남겨 둔 채 아랍인의 생활상을 취재하러 오랑시에 들렀던 신문사 특파원 랑베르는 탈출을 시도하다가 포기하고 리유와 함께 페스트퇴치작업을 벌입니다. 파늘루 신부는 페스트를 신의 형벌로 생각하고 기도에 전념하지만 결국 페스트에 감염되어 사망합니다. 그리고 타루도 페스트에 희생됩니다. 그리고, 리유는 그의 아내도 병사했다는 전부를 받습니다.

드디어 목숨을 걸고 페스트와 싸운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페스트는 완전히 퇴치되고 오랑시는 해방의 기쁨에 휩싸입니다. 열차는 다시 들어오고 랑베르의 아내도 오랑시를 찾아와 그와 플랫폼에서 감격의 재회를 합니다.

소설 속에는 의사, 공무원, 저널리스트, 죄수, 종교인 등 수많은 인간군상이 등장합니다.한다. 페스트라는 질병 앞에 인간은 다양한 형태로 자신을 표출합니다. 의사 리유처럼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헌신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수백 마리의 쥐가 이상한 증상을 보이며 떼죽음을 당하며 죽어나가는 현상을 보고서도 오직 수거하여 소각하라는 명령만 내리고 낙관하다가 페스트를 초기진압하지 못한 무능한 공무원들도 있습니다. 그러한 시당국의 안이한 대처에 분노하며 항의하는 리유로 인해 시당국은 페스트로 확정을 지을 수는 없다면서도 방역대책에 소극적으로 나서게 됩니다. 마치 2015년 메르스 발생당시 초기 대한민국 방역당국의 현상을 다시 보는 듯 했습니다.

반면, 전염병의 와중에도 묵묵히 자기 일을 해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에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습니다. 역경에 처했을 때 자신이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모습도 인간의 모습이지만, 그 과정을 극복하고 타인을 위해서 몸을 내던지는 것 또한 인간군상의 한 면이라는 것을 작가는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부의 대응이나 언론의 반응, 시민들의 피해 등을 살펴볼 때 지금의 우리 모습과 별다를바가 없어 보였고, 페스트로 인한 사람들의 절망이나 자포자기, 무질서와 타락한 모습이 자주 등장하지만, 한편으로 인간에 대한 믿음 또한 잃지 않았습니다.

고전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메시지가 주는 감동과 공감이 있는 듯 합니다.

작가는 우리에게 ‘삶은 부조리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갈 수 밖에 없다. 부조리를 응시하여 인식하고, 이겨내기 위해 서로 도와야 하지 않을까’라는 메시지를 주고 싶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p165-166 그러나 서사시 같은 어투나 수상식의 연설 같은 어투 때문에 의사는 매번 짜증이 났다. 그런 따뜻한 마음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쯤은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런 마음은 인간들이 자신을 인류와 연결해주는 어떤 것을 표현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상투어로 표현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언어로는 예를 들어 그랑이 매일같이 기울이고 있는 작은 노력들을 드러낼 수 없기에, 페스트 속에서 그랑 같은 사람이 의미하는 바를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다. 이따금 자정에 이제 인적이 끊긴 도시를 둘러싼 깊은 침묵 속에서 잠시 눈이라도 붙여볼까 하고 자리에 누우면서 의사는 라디오의 스위치를 돌려보곤 했다. 그러면 세계의 저 끝에서, 수천 킬로미터를 가로 질러서,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서투르게나마 연대의식을 표현하려고 애쓰는 우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랑! 오랑!’ 그러나 그 음성은 연대의식을 표현하면서도 동시에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진정으로 고통을 나눌 수 없다는 끔찍한 무력감을 증명하듯 보여주고 있었다. 후원하는 목소리가 바다를 건너와도 소용없고, 리외가 주의를 기울여봐도 소용없었다. 목소리가 곧 웅변조로 높아지면서, 그랑과 그 웅변가를 서로 낯선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본질적인 거리가 더욱 뚜렷이 드러났다. ‘오랑! 오랑! 천만의 말씀.’ 리외는 생각했다. ‘함께 사랑하거나 함께 죽는 거야. 그 외에 다른 방법은 없어. 그런데 그들은 너무 멀리 있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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