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악필이라도 하루에 OK!!!
최명범 지음 / 어문학사 / 200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실 하루만에 명필을 만들어주는 책은 아니라 조금 아쉬운데 일단 책 앞부분은 청천체(강의 중에는 오이체나 가지체와 유사하다고 하지만 그보다는 POP에서 사용하는 팝콘체와 정말 유사하다.) 를 통해 악필을 탈출하게 한다. 초등학교 저학년보다도 글씨를 못 쓰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 정도 만으로 상당히 만족하지만, 명필을 만들어주는 건 아니다. 어쨌든 하루만에 악필 교정에 효과를 볼 수 있다.

팝콘체 등이 글자 크기들이 조금 달라도 귀엽게 보이는 글씨체다보니 책에는 강조가 안 되는데, 글자 크기를 어떻게 잡아야 할지 등이 강조되지 않기 때문에(대충 노트 줄의 반 정도가 되도록 글자 크기를 잡으면 맞추기 편하다고 한다. ^^) 저자가 카페에 올린 것처럼 원래 이 책을 온전히 익히려면 강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보통 글씨를 가진 사람이 예쁜 글씨를 쓰기 위해서라면 추천하기 어려운데, 청천체(팝콘체와 유사) 이후 부분은 훌륭하다고는 하기 어렵다. 정자체가 나오며 한글 글자들의 틀을 최대한 간소화 시켜 보여주어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어떻게 연습해야 하는지 등 많은 대목에서 설명이 부족해 궁서체나 필기체에 대해서는 이 책이 다른 책들보다 더 뛰어나다고 하지는 못하겠다. 고시생이라면 팝콘체를 알아본 뒤 백강 고시체 등을 알아보는 것이 더 빠를 것 같다.

하지만 심한 악필이라면 금방 효과를 볼 수 있을지도,

덧: 저자 역시 이런 단점을 알고 있어서인지, 공식 출판물이 아니라 개인 주문해야 하는 책이지만 저자 카페에 이미 개정판이 나와 있다

http://cafe.daum.net/bumi65 참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서 고고학
에릭 H. 클라인 지음, 류광현 옮김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 201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성서 고고학이 걸어온 길, 그리고 균형잡힌 관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고] 고등학교 3년을 7일만에 끝내는 수학
야니기야 아키라 지음, 김원옥 옮김, 홍두표 감수 / 한언출판사 / 2005년 10월
평점 :
판매완료


일단 고등학교 수학 전반이 나와 있는 건 맞는데 그 기준이 우리나라가 아니다. 전체를 가볍게 살피는데 적당한 책으로 일본 과정이라 현행 교과 범위 밖인 복소평면도 나오는 등 흥미로운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깊은 내용을 기대 했한다면 실망할 것이고

고교과정 전체를 조망한다기엔 문과 수학 정도만 있어서 아쉽다. (특히 미적분에서 삼각함수의 미적분이나 벡터등은 없다고 봐야 한다)



 

가볍게 읽기는 좋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이트
엘리 위젤 지음, 김하락 옮김 / 예담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처음 읽은 뒤 꽤 긴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표지도 바뀌고(내 기억이 맞다면 사람 얼굴 그림은 원래 표지에 없었다.) 서문도 추가되는 등 시간의 흐름을 느끼며, 그 만큼 책에 대한 내 처음 감정도 변했을 거라 생각한다.

 

 

[일상에서 시작되는 비극]

 

그때 처음으로 분노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왜 ‘그’의 이름을 송축해야하는가? 전능한 존재, 지엄하고 영원한 우주의 지배자는 침묵을 택했다. ‘그’에게 고마워해야할 이유가 대체 무엇인가. 76p

 

몸뚱이가 고요한 하늘 아래 연기로 화해버린 어린이들의 얼굴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살고자 하는 마음을 영원히 앗아간 밤의 침묵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하나님과 내 영혼을 죽이고 내 꿈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린 그 순간들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하나님만큼 오래 산다 하더라도 이것들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77p

 

    사실 이 책은 수기라 하기에는 문학적이며, 소설 같은 문학이라고 하기에는 개인의 체험이 강하게 담겨 있어 어디에 초점을 두고 읽을지 모호하다. 

 

  이야기는 신비주의에 관심 있던 자신의 과거로부터 시작한다. 자신이 추구하던 학문, 그리고 비극이 있기 전, 위험을 알리던 사람과 이를 무시하는 다수처럼 사회적으로 생각할 만한 이야기들이 종종 나오지만, 이들은 가볍게 자나간다.

  대신 서문에서 강조한 바에 따라, 저자는 사회적 분위기나 집단의 안이함, 그리고 또 다른 집단이 보여주는 광기 등에 관심을 두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런 도입부와 달리 책의 전체적인 내용은 극한 상황에서 개인의 실존과 인간의 나약함에 집중한다.

 

  우선적으로 저자는 재소자들이 죽은 이들을 위한 카디쉬를 암송했지만, 저자는 “왜 하나님을 찬미해야 하는가?”하는 저항심이 생겼다.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절대 정의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가족의 죽음을 접하고 무너져 내린 사람이나, 가족에게 버림받은 자, 또는 “하나님은 어디 있지? 나도 그렇거니와 자비로운 하나님을 믿을 사람이 어디 있나?” 라 말하는 랍비 등 책이 진행될수록 가족, 종교, 또는 그 밖에 각 사람이 의존하던 모든 것이 하나씩 무너져 내리는 모습이 그려지며, 이 모든 상실을 통해 인간의 실존 역시 하나씩 사라져 갈수록, 세상을 떠나가는 사람들의 모습들은 왠지 슬프다.

 

  무너져 가는 인간의 종점, 다시 말해 신 앞에선 인간으로서 가지는 실존마저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는 이 이야기의 절정은 비교적 초반에 나온 소년의 처형에서 극에 달한다.

“우아하고 아름다웠으며, 모든 사람에게 사랑 받던 아이, 그의 얼굴은 마치 비탄에 잠긴 천사 같았다.”(120p)

 

교수형을 선고 받았으나 몸이 가벼워 바로 죽지 못하고 목이 매달린 채 30분이 넘게 삶과 죽음 사이에서 고통당하던 그 소년.

 

이 때 누군가가 말했다.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 (122p)

 

그리고 저자는 여기서 신의 죽음을 경험한다.

그때 내 안에서 어떤 목소리가 대답하는 것을 들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여기 교수대에 매달려 있지.” (123p)

   

다른 이들의 교수형에서는 “그날 저녁 수프는 어느 때보다 유난히 맛있었다.”(119p)던 저자는 이렇게 새로운 유형의 죽음을 체험한 뒤 수프에서 시체 맞을 느낀다.

의지하던 모든 것이 허물어지는 순간.

 

  물론 목숨과 바꾼 율리에크의 마지막 바이올린 연주 같은 아름다운 시간, 빵 하나를 위해 아버지를 죽인 아들 등 여러 이야기들이 나오지만 이미 앞에서 극단적인 죽음들, 신의 죽음까지도 체험해서일까? 대부분 이야기를 차갑다 못해 오히려 평범하게까지 전한다.

 

[아쉬움과 고민, 인간은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가]

  극단적인 상황을 직접 경험한 자가 말하는 인간의 고통과 잔혹함은, ‘과연 인간 존재란 무엇인가?’ 혹은 ‘극한 상황, 부당한 폭력 앞에선 개인의 나약함과 극한 상황에서 침묵하는 절대자는 존재 하는 것인가?’ 등에 대해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물론 이 책이 여러 가지 개인의 실존이 흔들리는 보습들이나 폭력, 학대 같은 장면을 잘 보여주고 있지만 다른 작품들보다 문학성이 뛰어나다고는 하기 어렵다. 개인 내면과 체험을 어느 작품보다 생생하게 그려내지만, 이점이 길어지면서 얼핏 단조로울 수도 있는데다가 임레 케르테스의 ‘운명’처럼 아우슈비츠의 시간을 새롭게 보여주거나 하는 독특한 작품도 아니다. 게다가 위에서 말했듯 그가 말하는 약자는 ‘유대인’에 한정 되어 있는 것도 아쉽다.

 

  다만 추락한 인간의 모습, 동전을 던지고 원주민들이 그것을 잡으려고 서로 싸우며 죽이는 모습을 바라보기 위한 위선적 자선처럼(176p) 승자도 패자도 모두 인간성을 상실한 그 현장을 보다보면 화가 나기보다 두렵고 슬퍼진다. 내 안에도 인간으로서 그런 부분이 있을 것이기에.

 

  정의란 찾아 볼 수도 없었던 살육의 현장을 무력하게 바라보던 소년, 혹은 폭력에 대한 두려움으로 아버지를 지키지 못한 개인, 아버지의 죽음에서 오히려 자유를 느끼기도 한 나약한 인간이 고통스러운 시간을 통과한 뒤 거울에서 본 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산 자나 죽은 자나 모두가 그곳에서 파괴되었을 뿐이다. 이 점이 서글프고도 두려운 것이다.

 

“거울 속에서 시체 하나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은 언제까지고 나를 떠날 줄 몰랐다.”

 

 

[하지만 그들만 피해자일까?]

  하지만 노벨 평화상을 받은 저자임에도 불구하고, 극한 상황에서의 인간 존재, 특히 개인 실존과 변질, 인간의 나약함과 추악함을 생생하게 저하지만, 그 잔혹함을 넘어 다른 민족에 대한 사랑이나 박애까지는 보여주지 못했다.

 

예를들어 85쪽(이전 판에서는 63쪽)에

집시 10여 명이 들어와서 우리를 감시했다. 곤봉과 채찍이 휙휙 주위를 날아다녔다.”

에서 보듯이 집시족 등 다른 민족을 가해가로 그리는데, 유대인들의 고통과 달리 세계 대전 중 다른 민족 역시 당했을 학대나 고통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물론 당시에 저자와 유대인을 감시하던 이들이 정말로 10여명의 집시였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구 비로 보면 나치에 의해 유대인보다 더 큰 살육을 당한 민족이 집시족인데다가, 보상에 있어서도, 각지에서 강한 세력으로 정착한 유대인과 달리 세계 각지에서 부유층으로 자리 잡지 못한 경우가 많은 집시족은 여러 부분에서 소외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폭력에 의해 희생당하는 ‘약자’의 괴로움을 그리는 과정에 단지 자신 주변만을 피해자로 묘사하는데 그쳤다는 점은 분명히 아쉽다.

 

  이번 개정판에 추가된 노벨상 수락 연설문을 봐도 저자인 위젤은 분명히 폭력에 항거하고 있지만, 팔레스타인의 테러에 비해 이스라엘의 폭력은 그리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다는 점을 볼 때에도 사회나 민족 등 큰 틀에서는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남겨진 이들, 또는 밖에서 바라보는 이들에게]

  이 모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한 인간이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파되 되어가는 모습, 그 장면 하나 하나가 주는 인상은 변하지 않으며, 우리는 그런 이들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도록 만든다. 물론 우리가 그런 파괴된 약자들에게 해주어야 하지만 해줄 수 없는 말, 혹은 그 말 대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서문의 프랑수아 모리아크를 따르는 일 밖에는 없다.

“하나님이 정말 하나님이라면 모두를 위한 마지막 말은 ‘하나님’에게 속한다.” 이 유대인 소년에게 그 말을 해주었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그저 소년을 껴안고 흐느끼기만 했다.

(27p)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말

 

  결국 지금도 세계 각지에서, 이스라엘에서 조차 계속되고 있을 폭력 속에서 희생된 이들, 혹은 살아남았으나 결국 시체로 남겨진 자들과 다름 아닌 이들에게, 사건 밖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건 하나 뿐이다.

 

같이 울어줄 수 있을까?

 

그들을 품에 안고 흐느낄 수 있을까?

"거울 속에서 시체 하나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은 언제까지고 나를 떠날 줄 몰랐다." (195p)

내 뒤에서 아까 그 사람이 다시 묻는 소리가 들렸다.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

그때 내 안에서 어떤 목소리가 대답하는 것을 들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여기 교수대에 매달려 있지." (123p)

신비주의자였던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 사람은 하나님보다 강하고 위대하다. [중략] 당신의 배반으로 날마다 고문당하고, 학살당하고, 독가스를 마시고, 산 채로 불태워지는 이 사람들을 보라, 이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당신 앞에서 기도하고 있다! 당신의 이름을 찬양하고 있다!(127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서 고고학
에릭 H. 클라인 지음, 류광현 옮김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 201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런 책을 읽을 때는 먼저 성서가 말하는 역사적 사실들과 이에 대한 신뢰도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들이 있으며 최대주의자 내부와 최소주의자 내부에서도 정도의 차이가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다시 말해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같은 사료를 두고도 해석들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확실한 증거가 나오기 전에는 조금 거리를 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요즘 전문가들의 글들에서도  특정 유물이 성서가 진실이라 입증한다고 주장하거나, 반대로 증거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거짓이라고 말하는 등 ‘너무 성급한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많은 게 사실이다.

[히타이트 유물이 비교적 최근인 19~20세기  안쪽에서 발굴 되었음을 생각할 때, 거짓이라는 유물이 발굴 되기 전까지는 한 걸음 물러나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최소주의의 입장을 따른다면 성서의 많은 부분을 후대 편집으로 보거나 깔끔하게 ‘역사적 근거가 없음’으로 본다. 다시말해  최소주의에서는 결정적인 사료가 나오기 전까지 성서의 역사적 가치를 거의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관점은 얼핏 객관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어떤 사료가 나온 경우 조차 이에 대해 성서와 반대되는 해석을 하려고 무리하게 주장하는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이 관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쉽지않다.

 

  그래서 지금까지 객관적이라 생각했던 최소주의자들에게서는 결정적인 사료가 나와도 이를 인정하지 않거나 혹은 무리하게 반박하려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아쉬움을 느꼈고, 반대로 최대주의자들에게서도 아직은 불확실한 사료일 뿐인데도 너무 성급하게 성경과 연결시키려 해, 이들의 책을 읽을 때마다 안타깝기까지 했다.

 

  하지만 본서는 성서를 지지하지도, 혹은 반박하려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작은 입문 수준의 책이지만 전공자들에게도 이후 공부를 위한 바람직한 관점 정립이라는 측면에서 읽어볼 필요가 있으며, 입문자들에게는 성서 고고학의 첫걸음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책이기 때문에 양에 비해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성서, 그 세계를 들여다보기 위한 노력들   

  저자는 1부를 시작하기 전에 도표를 통해 항목별로 고고학 자료들과 성서 본문의 일치 여부를 간략하게 보여주는데,가나안 정복시점의 하솔 파괴불확실하고(이에 대한 논의는 뒤에 나온다) 여리고성 기록고고학 사료와 ‘일치하지 않음’ 이라 분명히 밝히면서도 다른 부분들은 일치한다거나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하는 등 중립적인 관점을 잘 보여준다.

 

(저자의 관점을 보여주기 위해 미리 이야기하자면 본서 2부에서 “주전 1천년기에 관한 성서의 내용이 성서 외의 비문에 의해서 완전히 거짓이라고 밝혀진 경우는 현재까지 없다.”(130p)고 말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책은 신앙인을 위한 신학 서적도, 성경을 반박하기 위한 책도 아니다. 따라서 본서는 ‘고고학’, 특히 성서고고학(=근동고고학) 개론서로 접근 했을 때 가치가 있으며,

“기록과 사료, 그리고 이들 사이의 불일치나 이에 대한 흥미진진한 논쟁이 펼쳐져 승패가 갈린다.”같은 자극적 내용을 기대 했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본서는 고고학 개론서답게 이런 논쟁 자체보다는 고고학계의 발견과 논쟁이 지금까지 걸어온 역사를 보여주고 어떤 시기에 어느 학자가 무슨 방법으로 발굴했는지 보여줄 뿐이다.

 

  특정 관점을 가지고 있는 두꺼운 책들과 비교할 때, 이런 부분은 자칫 지루할 수 있으나 배경 지식이 있는 경우, 예를 들어 “왕정시대 유물 해석을 두고 히브리 대학교와 텔아비브 대학 간 논쟁이 있다.”같이 피상적인 지식을 갖고 있는 경우는, 핀켈슈타인과 마자르의 논쟁을 보다 구체적으로 알 수도 있다.

 

본서의 중립적인 입장은 유물의 해석을 두고도 찾아볼 수 있는데, 텔 단 비문

(‘다윗의 집’이란 표현이 내오는 가장 오래되었을 수 있으며 가장 명확한 유물, 메사비문에도 ‘다윗의 집’이란 표현을 찾을 수 있다는 주장이 있으나 아직까지는 텔 단 비문이 가장 분명한 사료가 된다.)

  해석에서 ‘닐스 페테르 렘케’가 이 비문을 위조물이라 주장하다가 묵살당하는 이야기처럼 성급하고 극단적인 몇몇 최소주의자들의 무리수나 실수들을 지적하는 한편 여리고 발굴 작업에서 파괴 흔적을 발견했다는 가스탱이 이 발표를 후회하였다는 이야기나 노아 방주 발굴 소란처럼 극단적인 몇몇 최대주의자들의 잘못들 역시 분명하게 보여주어 독자들이 균형을 잡도록 한다.

 

이후에도 성서의 시대별로 발굴 성과나 논쟁점이 나오는데

 

유목민은 영구적인 기반시설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을 감안했을 때 그러한 출애굽에 관한 고고학적 증거를 찾기가 어려운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라고 주장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반박이라도 하듯 고고학자들은 시내(Sinai)사막에서 여러 시기에 걸쳐 유목민들의 시설들을 발굴했다.... [중략]

 

이와 같은 사실이 출애굽이 실재로 발생하지 않았을 거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고고학적 증거가 현재로서는 없다는 것뿐이다. [113~114p]

 

이처럼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시각이 돋보이며,  비교적 모호하게 보이는 출애굽 시대와 달리

 

“따라서 주전 1천년기에 관한 성서의 내용이 성서 외의 비문에 의해서 완전히 거짓이라고 밝혀진 경우는 현재까지 없다. (130p) 

 

라고 하는 왕정시대와 사해문서, 신약시대의 이야기들은 분명하여, 족장시대와 출애굽 이야기 같은 애매함은 없고 편집도 깔끔한 편이다. 하지만 역시 분량상의 아쉬움이 큰데, 필요한 경우 사진자료를 적절히 제시하지만 분량 면에서 다른 여러 고고학 서적들, 또는 성서시대의 사회와 문화를 다룬 전문서적들에 비해서는 양이 적어 아쉬움을 느낀다.

 

그렇지만 야고보 유골함이나 비교적 최근의 이야기(라지만 벌써 8년도 더 지나간 이야기다)를 다룬 책이자 다큐인

 

예수의 무덤- 역사를 뒤집을 고고학 최대의 발견

찰스 펠리그리노 | 심차 자코보비치 (지은이) | 강주헌 (옮긴이) | 예담 | 2007-07-29 | 원제 The Jesus Family Tomb (2007년)      

 

에 대해

  “자코보비치의 다큐멘터리는 단지 신앙심으로 그러한 주장에 이르렀다는 이유로 다른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강한 비판을 받았다.”(148p) 처럼 분명하게 비판하며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알린다. 그러므로 본서를 통해 균형 잡히지 않은 책들과 근거 없는 사이비 학자들의 글이 넘치는 지금, 이들을 구분할 건전한 기본을 다질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한 ‘예수의 무덤’에 대한 다큐멘터리 평에서 한 학자(윌리엄 데버로 기억한다.)는 고고학을 너무 만만하게 봤다는 식으로 평했고, 다른 학자는 “흥미진진하고 자극적이지만 남는 건 없는 고고학 포르노”라고 평했다.]

  요즘 성서 고고학이나 구약학에서는 성경을 신학적인 가르침을 주기위한 책이라면서 역사적 사실과는 무관한 것처럼 서술하는 한쪽 극단과(최소주의 고고학자들, 진보 신학자들) 성경의 모든 것을 문자적으로 증명하려는 이들(극단적 최대주의자나 몇몇 창조과학회 사람들 등) 사이에서 현대 성서학자들 역시 받아들일 수 있으며 전문성까지 갖춘 이 책의 가치는 크다.

 

 

균형 잡힌 해석과 발굴을 생각하며

  94p 역자 주에서도 말하지만 현재 성서의 역사성에 대한 대다수 유럽과 미국 성서학자들의 입장은 성서를 있는 그대로의 문자적 의미로 해석하는 극단적 최대주의도, 성서를 후대 기록일 뿐, 역사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폄훼하는 극단적 최소주의도 아니며, 이 사이의 어딘가, 다시 말해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중도적 위치에 있다.

 

[비교적 온건한 최소주의자와 최대주의자의 책을 찾는다면 이안 프로반 외 공저: ‘이스라엘의 성경적 역사’<온건한 최대주의>와 레스터 L. 그래비의 ‘고대 이스라엘 역사’<온건한 최소주의> 정도가 있으며 두 책 모두 본서의 역자 주석 등에서 한번 이상 언급 된다.]

 

  물론 이 책은 작은 책인 만큼 제한된 유물만을 다루지만 그 고고학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보여주기 때문에, 여러 유물들만 나열, 설명하고 끝나는 몇몇 서적들에 비해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게다가 원서에는 없었던 여러 각주들과 구체적인 참고서적들(각주들과 추천서적들을 역자서문과 역자가 따로 달아놓은 각주를 통해 충실하게 안내해준다.)은 추가적인 공부를 원하는 이들의 욕구까지도 잘 채워준다.

 

[특히 번역서가 나온 경우에는 원서 제목뿐 아니라 “~는 -라는 제목으로 한국에서 출간되었다.” 같이 번역서적 제목까지 모두 표기해주어 국내 독자들이 더 깊은 공부를 위해 어느 책을 읽을 지 안내하는 데까지 세밀하게 신경 쓴 흔적이 보인다.]

 

  서평을 마무리하면서 덧붙이자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보수적인 장로교단의 신학교들에서 사용하는 트렘퍼 롱맨(저서: 창세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등) 등처럼 문서가설의 허점을 비판하고 성서의 역사성을 인정하는 보수적 최대주의 계열에서 나온 여러 구약학 서적에서도  모세오경이 본질적으로는 모세의 저작임을 인정’하지만 후기에(범위를 말하자면 비교적 초기인 사사시대는 물론이고 포로 귀환 시대나 그 이후까지도 포함한다) 편집된 부분 역시 있다면서 이 정도 이야기는 다 인정하고 가르치고 있다.

 

  다시 말해 이런 부분은 보수적인 성서신학계에서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부분인데 최근에는 극단적 최소주의’를 인용하는 몇몇 <반기독교적> 고고학 비전공자들[예: '신없는 우주' 등을 쓴 빅터 스텐저=> 텔단 비문이 위조라는 의견이 있다는 점만 하고 그 주장이 학계에서 어떻게 반박당했는지는 말하지 않음]이나

극단적 최대주의를 지지하는 <지나친 보수기독교 측>고고학 비전공자들[예: 창조과학회 등에서 나오는 몇몇 글들과 서적 등]이 더 알려져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한쪽 입장을 지지 하지 않는 책에는 관심이 적다.

  게다가 일반 독자들은 발굴의 역사나 접근법 보다 화려한 사진과 유물자료들이 넘치는 서적에 더 관심이 많아 이처럼 가장 극단적인 두 입장에서 한 걸음 물러나 볼 수 있는 책이 인기를 끌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전문 지식을 얻을 수는 없더라도 균형 잡힌 연구와 글들을 읽으며 바른 관점을 갖는 일은 바람직한 일임이 분명하다.

 

  여러 유물보다 유물의 해석을 두고 벌어지는 논쟁과 연구,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건전한 거리감이 저자가 보여주고자 하는 바람직한 고고학일 것이며, 한 걸음 더 멀리 서서 성서의 배경이라는 매력적인 장소에서 벌어진 일들, 지금은 볼 수 없는 과거를 탐구하는 학문이 걸어온 길과, 흔적을 찾아가는 일은 충분히 매력적이기까지 하다.

   

오래 전 잊혔으나 지금도 남아 우리에게 이야기 하는 과거의 흔적들과의 소통.

이러한 문제는 비단 성서 고고학만이 직면한 문제는 아니다. 호메로스(Homer)나 헤로도토스(Herodotus), 투키디데스(Thucydides), 그리스의 극작가들, 그리고 로마의 저자들, 그리고 로마 역사가들의 문서에 담긴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 관한 묘사는 각각의 문서마다 그 정확도에 있어서 판이하게 다른 게 사실이다. (22p)

비록 오늘날 성서 고고학이 더욱 과학적으로 철저해지고 고고학자들이 인류학적인 주제에 더 관심을 보인다는 점에서 100여 년 전의 성서 고고학 태동기적 모습과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위에서 언급한 기본적인 성서적 의문들은 여전히 무시될 수가 없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이러한 의문점들을 풀기가 언제나 쉽지는 않다는 것이다.(23p 서문 마지막 문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