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고고학
에릭 H. 클라인 지음, 류광현 옮김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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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고고학이 걸어온 길, 그리고 균형잡힌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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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고등학교 3년을 7일만에 끝내는 수학
야니기야 아키라 지음, 김원옥 옮김, 홍두표 감수 / 한언출판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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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고등학교 수학 전반이 나와 있는 건 맞는데 그 기준이 우리나라가 아니다. 전체를 가볍게 살피는데 적당한 책으로 일본 과정이라 현행 교과 범위 밖인 복소평면도 나오는 등 흥미로운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깊은 내용을 기대 했한다면 실망할 것이고

고교과정 전체를 조망한다기엔 문과 수학 정도만 있어서 아쉽다. (특히 미적분에서 삼각함수의 미적분이나 벡터등은 없다고 봐야 한다)



 

가볍게 읽기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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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엘리 위젤 지음, 김하락 옮김 / 예담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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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을 처음 읽은 뒤 꽤 긴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표지도 바뀌고(내 기억이 맞다면 사람 얼굴 그림은 원래 표지에 없었다.) 서문도 추가되는 등 시간의 흐름을 느끼며, 그 만큼 책에 대한 내 처음 감정도 변했을 거라 생각한다.

 

 

[일상에서 시작되는 비극]

 

그때 처음으로 분노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왜 ‘그’의 이름을 송축해야하는가? 전능한 존재, 지엄하고 영원한 우주의 지배자는 침묵을 택했다. ‘그’에게 고마워해야할 이유가 대체 무엇인가. 76p

 

몸뚱이가 고요한 하늘 아래 연기로 화해버린 어린이들의 얼굴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살고자 하는 마음을 영원히 앗아간 밤의 침묵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하나님과 내 영혼을 죽이고 내 꿈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린 그 순간들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하나님만큼 오래 산다 하더라도 이것들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77p

 

    사실 이 책은 수기라 하기에는 문학적이며, 소설 같은 문학이라고 하기에는 개인의 체험이 강하게 담겨 있어 어디에 초점을 두고 읽을지 모호하다. 

 

  이야기는 신비주의에 관심 있던 자신의 과거로부터 시작한다. 자신이 추구하던 학문, 그리고 비극이 있기 전, 위험을 알리던 사람과 이를 무시하는 다수처럼 사회적으로 생각할 만한 이야기들이 종종 나오지만, 이들은 가볍게 자나간다.

  대신 서문에서 강조한 바에 따라, 저자는 사회적 분위기나 집단의 안이함, 그리고 또 다른 집단이 보여주는 광기 등에 관심을 두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런 도입부와 달리 책의 전체적인 내용은 극한 상황에서 개인의 실존과 인간의 나약함에 집중한다.

 

  우선적으로 저자는 재소자들이 죽은 이들을 위한 카디쉬를 암송했지만, 저자는 “왜 하나님을 찬미해야 하는가?”하는 저항심이 생겼다.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절대 정의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가족의 죽음을 접하고 무너져 내린 사람이나, 가족에게 버림받은 자, 또는 “하나님은 어디 있지? 나도 그렇거니와 자비로운 하나님을 믿을 사람이 어디 있나?” 라 말하는 랍비 등 책이 진행될수록 가족, 종교, 또는 그 밖에 각 사람이 의존하던 모든 것이 하나씩 무너져 내리는 모습이 그려지며, 이 모든 상실을 통해 인간의 실존 역시 하나씩 사라져 갈수록, 세상을 떠나가는 사람들의 모습들은 왠지 슬프다.

 

  무너져 가는 인간의 종점, 다시 말해 신 앞에선 인간으로서 가지는 실존마저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는 이 이야기의 절정은 비교적 초반에 나온 소년의 처형에서 극에 달한다.

“우아하고 아름다웠으며, 모든 사람에게 사랑 받던 아이, 그의 얼굴은 마치 비탄에 잠긴 천사 같았다.”(120p)

 

교수형을 선고 받았으나 몸이 가벼워 바로 죽지 못하고 목이 매달린 채 30분이 넘게 삶과 죽음 사이에서 고통당하던 그 소년.

 

이 때 누군가가 말했다.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 (122p)

 

그리고 저자는 여기서 신의 죽음을 경험한다.

그때 내 안에서 어떤 목소리가 대답하는 것을 들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여기 교수대에 매달려 있지.” (123p)

   

다른 이들의 교수형에서는 “그날 저녁 수프는 어느 때보다 유난히 맛있었다.”(119p)던 저자는 이렇게 새로운 유형의 죽음을 체험한 뒤 수프에서 시체 맞을 느낀다.

의지하던 모든 것이 허물어지는 순간.

 

  물론 목숨과 바꾼 율리에크의 마지막 바이올린 연주 같은 아름다운 시간, 빵 하나를 위해 아버지를 죽인 아들 등 여러 이야기들이 나오지만 이미 앞에서 극단적인 죽음들, 신의 죽음까지도 체험해서일까? 대부분 이야기를 차갑다 못해 오히려 평범하게까지 전한다.

 

[아쉬움과 고민, 인간은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가]

  극단적인 상황을 직접 경험한 자가 말하는 인간의 고통과 잔혹함은, ‘과연 인간 존재란 무엇인가?’ 혹은 ‘극한 상황, 부당한 폭력 앞에선 개인의 나약함과 극한 상황에서 침묵하는 절대자는 존재 하는 것인가?’ 등에 대해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물론 이 책이 여러 가지 개인의 실존이 흔들리는 보습들이나 폭력, 학대 같은 장면을 잘 보여주고 있지만 다른 작품들보다 문학성이 뛰어나다고는 하기 어렵다. 개인 내면과 체험을 어느 작품보다 생생하게 그려내지만, 이점이 길어지면서 얼핏 단조로울 수도 있는데다가 임레 케르테스의 ‘운명’처럼 아우슈비츠의 시간을 새롭게 보여주거나 하는 독특한 작품도 아니다. 게다가 위에서 말했듯 그가 말하는 약자는 ‘유대인’에 한정 되어 있는 것도 아쉽다.

 

  다만 추락한 인간의 모습, 동전을 던지고 원주민들이 그것을 잡으려고 서로 싸우며 죽이는 모습을 바라보기 위한 위선적 자선처럼(176p) 승자도 패자도 모두 인간성을 상실한 그 현장을 보다보면 화가 나기보다 두렵고 슬퍼진다. 내 안에도 인간으로서 그런 부분이 있을 것이기에.

 

  정의란 찾아 볼 수도 없었던 살육의 현장을 무력하게 바라보던 소년, 혹은 폭력에 대한 두려움으로 아버지를 지키지 못한 개인, 아버지의 죽음에서 오히려 자유를 느끼기도 한 나약한 인간이 고통스러운 시간을 통과한 뒤 거울에서 본 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산 자나 죽은 자나 모두가 그곳에서 파괴되었을 뿐이다. 이 점이 서글프고도 두려운 것이다.

 

“거울 속에서 시체 하나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은 언제까지고 나를 떠날 줄 몰랐다.”

 

 

[하지만 그들만 피해자일까?]

  하지만 노벨 평화상을 받은 저자임에도 불구하고, 극한 상황에서의 인간 존재, 특히 개인 실존과 변질, 인간의 나약함과 추악함을 생생하게 저하지만, 그 잔혹함을 넘어 다른 민족에 대한 사랑이나 박애까지는 보여주지 못했다.

 

예를들어 85쪽(이전 판에서는 63쪽)에

집시 10여 명이 들어와서 우리를 감시했다. 곤봉과 채찍이 휙휙 주위를 날아다녔다.”

에서 보듯이 집시족 등 다른 민족을 가해가로 그리는데, 유대인들의 고통과 달리 세계 대전 중 다른 민족 역시 당했을 학대나 고통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물론 당시에 저자와 유대인을 감시하던 이들이 정말로 10여명의 집시였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구 비로 보면 나치에 의해 유대인보다 더 큰 살육을 당한 민족이 집시족인데다가, 보상에 있어서도, 각지에서 강한 세력으로 정착한 유대인과 달리 세계 각지에서 부유층으로 자리 잡지 못한 경우가 많은 집시족은 여러 부분에서 소외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폭력에 의해 희생당하는 ‘약자’의 괴로움을 그리는 과정에 단지 자신 주변만을 피해자로 묘사하는데 그쳤다는 점은 분명히 아쉽다.

 

  이번 개정판에 추가된 노벨상 수락 연설문을 봐도 저자인 위젤은 분명히 폭력에 항거하고 있지만, 팔레스타인의 테러에 비해 이스라엘의 폭력은 그리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다는 점을 볼 때에도 사회나 민족 등 큰 틀에서는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남겨진 이들, 또는 밖에서 바라보는 이들에게]

  이 모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한 인간이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파되 되어가는 모습, 그 장면 하나 하나가 주는 인상은 변하지 않으며, 우리는 그런 이들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도록 만든다. 물론 우리가 그런 파괴된 약자들에게 해주어야 하지만 해줄 수 없는 말, 혹은 그 말 대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서문의 프랑수아 모리아크를 따르는 일 밖에는 없다.

“하나님이 정말 하나님이라면 모두를 위한 마지막 말은 ‘하나님’에게 속한다.” 이 유대인 소년에게 그 말을 해주었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그저 소년을 껴안고 흐느끼기만 했다.

(27p)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말

 

  결국 지금도 세계 각지에서, 이스라엘에서 조차 계속되고 있을 폭력 속에서 희생된 이들, 혹은 살아남았으나 결국 시체로 남겨진 자들과 다름 아닌 이들에게, 사건 밖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건 하나 뿐이다.

 

같이 울어줄 수 있을까?

 

그들을 품에 안고 흐느낄 수 있을까?

"거울 속에서 시체 하나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은 언제까지고 나를 떠날 줄 몰랐다." (195p)

내 뒤에서 아까 그 사람이 다시 묻는 소리가 들렸다.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

그때 내 안에서 어떤 목소리가 대답하는 것을 들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여기 교수대에 매달려 있지." (123p)

신비주의자였던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 사람은 하나님보다 강하고 위대하다. [중략] 당신의 배반으로 날마다 고문당하고, 학살당하고, 독가스를 마시고, 산 채로 불태워지는 이 사람들을 보라, 이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당신 앞에서 기도하고 있다! 당신의 이름을 찬양하고 있다!(12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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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고고학
에릭 H. 클라인 지음, 류광현 옮김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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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책을 읽을 때는 먼저 성서가 말하는 역사적 사실들과 이에 대한 신뢰도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들이 있으며 최대주의자 내부와 최소주의자 내부에서도 정도의 차이가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다시 말해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같은 사료를 두고도 해석들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확실한 증거가 나오기 전에는 조금 거리를 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요즘 전문가들의 글들에서도  특정 유물이 성서가 진실이라 입증한다고 주장하거나, 반대로 증거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거짓이라고 말하는 등 ‘너무 성급한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많은 게 사실이다.

[히타이트 유물이 비교적 최근인 19~20세기  안쪽에서 발굴 되었음을 생각할 때, 거짓이라는 유물이 발굴 되기 전까지는 한 걸음 물러나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최소주의의 입장을 따른다면 성서의 많은 부분을 후대 편집으로 보거나 깔끔하게 ‘역사적 근거가 없음’으로 본다. 다시말해  최소주의에서는 결정적인 사료가 나오기 전까지 성서의 역사적 가치를 거의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관점은 얼핏 객관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어떤 사료가 나온 경우 조차 이에 대해 성서와 반대되는 해석을 하려고 무리하게 주장하는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이 관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쉽지않다.

 

  그래서 지금까지 객관적이라 생각했던 최소주의자들에게서는 결정적인 사료가 나와도 이를 인정하지 않거나 혹은 무리하게 반박하려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아쉬움을 느꼈고, 반대로 최대주의자들에게서도 아직은 불확실한 사료일 뿐인데도 너무 성급하게 성경과 연결시키려 해, 이들의 책을 읽을 때마다 안타깝기까지 했다.

 

  하지만 본서는 성서를 지지하지도, 혹은 반박하려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작은 입문 수준의 책이지만 전공자들에게도 이후 공부를 위한 바람직한 관점 정립이라는 측면에서 읽어볼 필요가 있으며, 입문자들에게는 성서 고고학의 첫걸음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책이기 때문에 양에 비해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성서, 그 세계를 들여다보기 위한 노력들   

  저자는 1부를 시작하기 전에 도표를 통해 항목별로 고고학 자료들과 성서 본문의 일치 여부를 간략하게 보여주는데,가나안 정복시점의 하솔 파괴불확실하고(이에 대한 논의는 뒤에 나온다) 여리고성 기록고고학 사료와 ‘일치하지 않음’ 이라 분명히 밝히면서도 다른 부분들은 일치한다거나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하는 등 중립적인 관점을 잘 보여준다.

 

(저자의 관점을 보여주기 위해 미리 이야기하자면 본서 2부에서 “주전 1천년기에 관한 성서의 내용이 성서 외의 비문에 의해서 완전히 거짓이라고 밝혀진 경우는 현재까지 없다.”(130p)고 말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책은 신앙인을 위한 신학 서적도, 성경을 반박하기 위한 책도 아니다. 따라서 본서는 ‘고고학’, 특히 성서고고학(=근동고고학) 개론서로 접근 했을 때 가치가 있으며,

“기록과 사료, 그리고 이들 사이의 불일치나 이에 대한 흥미진진한 논쟁이 펼쳐져 승패가 갈린다.”같은 자극적 내용을 기대 했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본서는 고고학 개론서답게 이런 논쟁 자체보다는 고고학계의 발견과 논쟁이 지금까지 걸어온 역사를 보여주고 어떤 시기에 어느 학자가 무슨 방법으로 발굴했는지 보여줄 뿐이다.

 

  특정 관점을 가지고 있는 두꺼운 책들과 비교할 때, 이런 부분은 자칫 지루할 수 있으나 배경 지식이 있는 경우, 예를 들어 “왕정시대 유물 해석을 두고 히브리 대학교와 텔아비브 대학 간 논쟁이 있다.”같이 피상적인 지식을 갖고 있는 경우는, 핀켈슈타인과 마자르의 논쟁을 보다 구체적으로 알 수도 있다.

 

본서의 중립적인 입장은 유물의 해석을 두고도 찾아볼 수 있는데, 텔 단 비문

(‘다윗의 집’이란 표현이 내오는 가장 오래되었을 수 있으며 가장 명확한 유물, 메사비문에도 ‘다윗의 집’이란 표현을 찾을 수 있다는 주장이 있으나 아직까지는 텔 단 비문이 가장 분명한 사료가 된다.)

  해석에서 ‘닐스 페테르 렘케’가 이 비문을 위조물이라 주장하다가 묵살당하는 이야기처럼 성급하고 극단적인 몇몇 최소주의자들의 무리수나 실수들을 지적하는 한편 여리고 발굴 작업에서 파괴 흔적을 발견했다는 가스탱이 이 발표를 후회하였다는 이야기나 노아 방주 발굴 소란처럼 극단적인 몇몇 최대주의자들의 잘못들 역시 분명하게 보여주어 독자들이 균형을 잡도록 한다.

 

이후에도 성서의 시대별로 발굴 성과나 논쟁점이 나오는데

 

유목민은 영구적인 기반시설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을 감안했을 때 그러한 출애굽에 관한 고고학적 증거를 찾기가 어려운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라고 주장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반박이라도 하듯 고고학자들은 시내(Sinai)사막에서 여러 시기에 걸쳐 유목민들의 시설들을 발굴했다.... [중략]

 

이와 같은 사실이 출애굽이 실재로 발생하지 않았을 거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고고학적 증거가 현재로서는 없다는 것뿐이다. [113~114p]

 

이처럼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시각이 돋보이며,  비교적 모호하게 보이는 출애굽 시대와 달리

 

“따라서 주전 1천년기에 관한 성서의 내용이 성서 외의 비문에 의해서 완전히 거짓이라고 밝혀진 경우는 현재까지 없다. (130p) 

 

라고 하는 왕정시대와 사해문서, 신약시대의 이야기들은 분명하여, 족장시대와 출애굽 이야기 같은 애매함은 없고 편집도 깔끔한 편이다. 하지만 역시 분량상의 아쉬움이 큰데, 필요한 경우 사진자료를 적절히 제시하지만 분량 면에서 다른 여러 고고학 서적들, 또는 성서시대의 사회와 문화를 다룬 전문서적들에 비해서는 양이 적어 아쉬움을 느낀다.

 

그렇지만 야고보 유골함이나 비교적 최근의 이야기(라지만 벌써 8년도 더 지나간 이야기다)를 다룬 책이자 다큐인

 

예수의 무덤- 역사를 뒤집을 고고학 최대의 발견

찰스 펠리그리노 | 심차 자코보비치 (지은이) | 강주헌 (옮긴이) | 예담 | 2007-07-29 | 원제 The Jesus Family Tomb (2007년)      

 

에 대해

  “자코보비치의 다큐멘터리는 단지 신앙심으로 그러한 주장에 이르렀다는 이유로 다른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강한 비판을 받았다.”(148p) 처럼 분명하게 비판하며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알린다. 그러므로 본서를 통해 균형 잡히지 않은 책들과 근거 없는 사이비 학자들의 글이 넘치는 지금, 이들을 구분할 건전한 기본을 다질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한 ‘예수의 무덤’에 대한 다큐멘터리 평에서 한 학자(윌리엄 데버로 기억한다.)는 고고학을 너무 만만하게 봤다는 식으로 평했고, 다른 학자는 “흥미진진하고 자극적이지만 남는 건 없는 고고학 포르노”라고 평했다.]

  요즘 성서 고고학이나 구약학에서는 성경을 신학적인 가르침을 주기위한 책이라면서 역사적 사실과는 무관한 것처럼 서술하는 한쪽 극단과(최소주의 고고학자들, 진보 신학자들) 성경의 모든 것을 문자적으로 증명하려는 이들(극단적 최대주의자나 몇몇 창조과학회 사람들 등) 사이에서 현대 성서학자들 역시 받아들일 수 있으며 전문성까지 갖춘 이 책의 가치는 크다.

 

 

균형 잡힌 해석과 발굴을 생각하며

  94p 역자 주에서도 말하지만 현재 성서의 역사성에 대한 대다수 유럽과 미국 성서학자들의 입장은 성서를 있는 그대로의 문자적 의미로 해석하는 극단적 최대주의도, 성서를 후대 기록일 뿐, 역사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폄훼하는 극단적 최소주의도 아니며, 이 사이의 어딘가, 다시 말해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중도적 위치에 있다.

 

[비교적 온건한 최소주의자와 최대주의자의 책을 찾는다면 이안 프로반 외 공저: ‘이스라엘의 성경적 역사’<온건한 최대주의>와 레스터 L. 그래비의 ‘고대 이스라엘 역사’<온건한 최소주의> 정도가 있으며 두 책 모두 본서의 역자 주석 등에서 한번 이상 언급 된다.]

 

  물론 이 책은 작은 책인 만큼 제한된 유물만을 다루지만 그 고고학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보여주기 때문에, 여러 유물들만 나열, 설명하고 끝나는 몇몇 서적들에 비해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게다가 원서에는 없었던 여러 각주들과 구체적인 참고서적들(각주들과 추천서적들을 역자서문과 역자가 따로 달아놓은 각주를 통해 충실하게 안내해준다.)은 추가적인 공부를 원하는 이들의 욕구까지도 잘 채워준다.

 

[특히 번역서가 나온 경우에는 원서 제목뿐 아니라 “~는 -라는 제목으로 한국에서 출간되었다.” 같이 번역서적 제목까지 모두 표기해주어 국내 독자들이 더 깊은 공부를 위해 어느 책을 읽을 지 안내하는 데까지 세밀하게 신경 쓴 흔적이 보인다.]

 

  서평을 마무리하면서 덧붙이자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보수적인 장로교단의 신학교들에서 사용하는 트렘퍼 롱맨(저서: 창세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등) 등처럼 문서가설의 허점을 비판하고 성서의 역사성을 인정하는 보수적 최대주의 계열에서 나온 여러 구약학 서적에서도  모세오경이 본질적으로는 모세의 저작임을 인정’하지만 후기에(범위를 말하자면 비교적 초기인 사사시대는 물론이고 포로 귀환 시대나 그 이후까지도 포함한다) 편집된 부분 역시 있다면서 이 정도 이야기는 다 인정하고 가르치고 있다.

 

  다시 말해 이런 부분은 보수적인 성서신학계에서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부분인데 최근에는 극단적 최소주의’를 인용하는 몇몇 <반기독교적> 고고학 비전공자들[예: '신없는 우주' 등을 쓴 빅터 스텐저=> 텔단 비문이 위조라는 의견이 있다는 점만 하고 그 주장이 학계에서 어떻게 반박당했는지는 말하지 않음]이나

극단적 최대주의를 지지하는 <지나친 보수기독교 측>고고학 비전공자들[예: 창조과학회 등에서 나오는 몇몇 글들과 서적 등]이 더 알려져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한쪽 입장을 지지 하지 않는 책에는 관심이 적다.

  게다가 일반 독자들은 발굴의 역사나 접근법 보다 화려한 사진과 유물자료들이 넘치는 서적에 더 관심이 많아 이처럼 가장 극단적인 두 입장에서 한 걸음 물러나 볼 수 있는 책이 인기를 끌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전문 지식을 얻을 수는 없더라도 균형 잡힌 연구와 글들을 읽으며 바른 관점을 갖는 일은 바람직한 일임이 분명하다.

 

  여러 유물보다 유물의 해석을 두고 벌어지는 논쟁과 연구,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건전한 거리감이 저자가 보여주고자 하는 바람직한 고고학일 것이며, 한 걸음 더 멀리 서서 성서의 배경이라는 매력적인 장소에서 벌어진 일들, 지금은 볼 수 없는 과거를 탐구하는 학문이 걸어온 길과, 흔적을 찾아가는 일은 충분히 매력적이기까지 하다.

   

오래 전 잊혔으나 지금도 남아 우리에게 이야기 하는 과거의 흔적들과의 소통.

이러한 문제는 비단 성서 고고학만이 직면한 문제는 아니다. 호메로스(Homer)나 헤로도토스(Herodotus), 투키디데스(Thucydides), 그리스의 극작가들, 그리고 로마의 저자들, 그리고 로마 역사가들의 문서에 담긴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 관한 묘사는 각각의 문서마다 그 정확도에 있어서 판이하게 다른 게 사실이다. (22p)

비록 오늘날 성서 고고학이 더욱 과학적으로 철저해지고 고고학자들이 인류학적인 주제에 더 관심을 보인다는 점에서 100여 년 전의 성서 고고학 태동기적 모습과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위에서 언급한 기본적인 성서적 의문들은 여전히 무시될 수가 없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이러한 의문점들을 풀기가 언제나 쉽지는 않다는 것이다.(23p 서문 마지막 문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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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리피 할로의 전설 펭귄클래식 132
워싱턴 어빙 지음, 권민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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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초 미국 낭만주의 문학의 모습]

이 책에는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와 더불어 미국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워싱턴 어빙, 그의 작품집 ‘스케치북’에 실린 대표 작품들12편이 실려 있다.

소설이 많지만 약간 모호한 글들도 있기 때문에 개별 작품들 위주로 정리하려 한다.

 

책을 시작하는 ‘아내’(이 단편은 이 책에 실린 다른 작품인 ‘낚시꾼’과 더불어 소설보다 수필에 가깝다.)는 주제 면에서 조금 식상하다. 작은 시골 마을을 아름답게 그려놓는 등 작가의 특징은 살아 있지만 가난 속에서 더 빛나는 부부 간 사랑이라는 주제를 그려내는 작가의 표현은 다소 평범하기까지 해서 그다지 끌리지 않는다.

 

다만 어빙이 작품들 전체에 걸쳐 지역 문화나 전원생활처럼 얼핏 소박해 보일 수 있는 이야기들을 감상적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은 눈에 띄는데 예를 들면

 

큰길에서 벗어난 뒤, 너무나 빽빽한 수림에 가려 바깥과 완전히 격리된 듯한 좁은 시골 길로 접어들자 친구의 오두막이 눈에 들어왔다. 외관상으로는 대부분의 전원시인들이 노래하기에 부족함 없이 소박했으나 뭔가 즐거운 전원미가 느껴졌다....(22p)

 

같이 집주변의 모습을 아름답게 그리는 등 낭만주의가 가지는 특성을 잘 살리고 있다. 하지만 주제나 내용 전개에서 조금은 진부한 작품들이 종종 보인다는 점은 분명히 아쉽다, 분량상의 문제일까, 처형당한 사랑을 잊지 못하고 결국은 세상을 떠난 여인의 이야기인 ‘실연’이나, 아들을 먼저 보내고 뒤이어 세상을 떠난 노파를 다룬 ‘과부와 아들’은 주제 면에서 아름답지만 ‘소설’이란 작품 자체를 볼 때 문학적으로 특별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포카노켓의 필립’처럼 쓰러져간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영웅적이며 숭고한 이들로 그려내는 등 독특하게 보이는 작품들이 더 끌린다고 해야 할까?

다른 이야기들도 민담 형식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특히 ‘실연’, ‘과부와 아내’, ‘시골장례식’, ‘마을의 자랑거리’ 등은 전해지는 이야기들을 정리한 듯 보인다.

 

저자 역시

 

이상이 내가 전해들은 이 사건의 전부다. 내용이 빈약하고, 그다지 내세울 만한 참신함이 없다는 사실을 나도 알고 있다. 게다가 요즘처럼 기묘한 사건이나 노련한 화술에 열광하는 시대에, 위의 이야기는 진부하고 하찮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162p 마을의 자랑거리 중)

 

라 말하듯이 문학적으로 특별하지 않아 보이는 작품이 분명히 있다. (아니면 이런 이야기에 움직이지 않는 내 감정이 말라버린 건지도…)

 

작품집의 진가는 어빙의 대표작인 ‘립 반 윙클’과 ‘슬리피 할로의 전설’에서 드러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두 작품은 따로 정리해 본다.

(문학적으론 ‘립 반 윙클’이 더 높게 평가 받는다지만 개인적으로는 ‘슬리피 할로의 전설’이 더 끌린다.)

 

[립 반 윙클, 짧은 시간에 달라져버린 미국의 모습]

영국의 신민으로 평범하고 여유롭게(=게으르게) 살다 마누라의 구박을 피해 사냥을 나간 주인공, 우연히 만난 술자리에 초대되어, 취해 잠들게 되고, 깨어 보니 약20년이 지나버린 당황스러운 상황을 다룬 립 반 윙클은 ‘미국 독립’이라는 거대한 사건으로 인해 변해버린 미국을 무겁지 않게, 다만 극적으로 보여준다.

 

 

"저는 불쌍하고 조용한 사람입니다. 이 마을 토박이고, 국왕의 충실한 종입지요. 국왕께 신의 은총이 있으소서!" (41p)

 

리 외치던 식민지 시대의 사람에게

 

“왕당파다! 왕당파! 첩자다! 도망자다! 끌어내려! 쫓아버려!”

 

라 반응하는 시대의 변화상은 개인의 변화와 더불어 유쾌하게 제시된다.

 

이 변화는 긍정적일까?

사실 소시민적 사람들에게는 폭정이나 학대가 없다면 크게 달라지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직접 지지하는 정당을 선택하는 정도가 아니면 큰 차이가 없다.

 

 이제 그는 조지 3세를 섬기는 종이 아니라 미합중국의 자유 시민이 되었다는... (중략) 국가와 제국의 변화는 그에게 큰 감흥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오랜 기간 그를 신음케 했던 독재정치 형태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엄처시하였다. 다행히도 그 시절은 막을 내렸다. (중략) 부인의 폭정을 두려워할 필요 없이 마음껏 나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부인의 이름이 언급되면, 그는 여전히 고개를 젓고.. (중략).. 이게 운명에 대한 체념인지 아니면 해방의 기쁨인지는 양쪽 다 해석이 가능하겠다. (47p)   

 

독립이라는 사회적 변화가 가져온 자유는 립 같은 개인에게는 별 감흥이 없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야기 말미에 나오는 것처럼

"마누라에게 쥐여사는 마을 남정내들은 세상살이가 무척 고달플 때 공통된 소망을 품었으니, 바로 립 벤 윙클의 술병에서 평온을 안겨다 주는 술을 한 모금 마시는 것이었다."(47p)

 

독립은 평범한 소시민에게 소박한 술 같이 달콤한 자유를 가져다 준 것임에는 분명하다. 그 자유가 받아들일 운명인지, 기쁨인지는 알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슬리피 할로의 전설, 개화와 전통의 대립, 또는 인간 내면에 있는 비합리적인 두려움]

영화로도 제작되어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자 책의 제목이기도 한 대표작 슬리피 할로의 전설은 다분히 몽환적이다. 외부 인물이자 학식과 깔끔한 모습, 다시 말해 문명을 나타내는 이카보드 크레인(책에는 이커보드라 음역하지만 일반적인 음역을 따른다)과 건장한 몸에 토착 세력인 브롬의 외적인 갈등은 우스꽝스럽고 재미있으나 몰입되진 않는다.

그러나 이런 가벼운 분위기 속에서도 난롯가에서 마을사람들이 들려주던 악령 이야기들, 그리고 슬리피 할로의 기괴한 분위기 묘사가 어우러져 주인공에게 공포심을 느끼게 하며.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그저 어둠 속에 걸어 다니는 밤의 공포, 마음의 환영일 뿐이었다.(184p)

 

 

하지만 이 지역에 초자연적인 이야기가 유행하는 직접적 원인은 뭐니 뭐니 해도 슬리피 할로가 근처에 있기 때문이었다. 유령의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그 자체에도 전염력이 있어, 꿈과 환상의 기운을 뿜어내면서 온 지역에 주문을 걸었다. (202p)

 

 개인 내부의 비합리적인 두려움과 분위기 묘사를 통해 혼란스러울 수 있는 절정부분의 이야기를 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이야기의 절정은 목 없는 기병과 이카보드의 경주, 그리고 이후 이어지는 정리는 비합리적인 면을 드러내는 낭만주의가 가지는 특색을 유감없이 나타낸다.

 

  이카보드가 유령에게 끌려갔다는 마을 사람들의 결론과 달리 책의 말미에 뉴욕에 다녀간 농부의 입을 통해 저자는 이카보드가 살아 판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한다.

 밴 태슬 가문의 상속녀에게 퇴짜를 맞은 굴욕감 때문에 마을을 떠난 것이지 유령 때문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카보드의 이야기는 목 없는 기병의 머리로 사용된 것이 호박이었다는 사실, 또는 브롬이 목없는 기명의 머리가 호박이었다는 대목에서 웃음을 터드린다는 사실과는 부합하지만

 

 

‘저기까지만 가면 안전하다’ 이카보드는 생각했다. 그때 바로 뒤에서 유령의 흑마가 씩씩 내뿜는 숨소리가 들렸다... (중략) 요괴는 등자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머리를 던지고 있었다... (중략).. 유령의 머리는 엄청난 굉음과 함께 이카보드의 두골을 맞혔고, 그는 그대로 진흙 속에 고꾸라졌다. 이어 건파우더와 흑마와, 유령 기수는 회오리바람처럼 그를 지나쳐 갔다. (210p)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마치 정말 있었던 일처럼 묘사되는 목 없는 기병과의 경주 이야기와는 대치되어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도록 만든다. 하지만 이런 이유 없는 두려움이나 비합리적인 모습들이 인간의, 삶의 일부임은 분명하다.

바람직함이나 합리적인 믿음 너머에 있는 인간이란 골짜기, 그 깊은 곳의 두려움, 슬리피 할로

 

 

 

 [사실 비교적 초기의 문학이라 그런지 현대적인 작품에 비해 단순한 점들이 없진 않다. 등장인물의 이름 번역도 아쉬웠고, 대표작을 제외하면 주제도 독특하지 않다. 하지만 긴 시간 견뎌온 작품들은 대부분 읽을 가치가 있다.]   

 

"믿음이죠, 나리." 화자가 대답했다. "그 문제에 관한 한 저 자신도 절반은 믿지 않는답니다." 215p(마지막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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