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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리피 할로의 전설 ㅣ 펭귄클래식 132
워싱턴 어빙 지음, 권민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2년 4월
평점 :
품절
[19세기 초 미국 낭만주의 문학의 모습]
이 책에는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와 더불어 미국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워싱턴 어빙, 그의 작품집 ‘스케치북’에 실린 대표 작품들12편이 실려 있다.
소설이 많지만 약간 모호한 글들도 있기 때문에 개별 작품들 위주로 정리하려 한다.
책을 시작하는 ‘아내’(이 단편은 이 책에 실린 다른 작품인 ‘낚시꾼’과 더불어 소설보다 수필에 가깝다.)는 주제 면에서 조금 식상하다. 작은 시골 마을을 아름답게 그려놓는 등 작가의 특징은 살아 있지만 가난 속에서 더 빛나는 부부 간 사랑이라는 주제를 그려내는 작가의 표현은 다소 평범하기까지 해서 그다지 끌리지 않는다.
다만 어빙이 작품들 전체에 걸쳐 지역 문화나 전원생활처럼 얼핏 소박해 보일 수 있는 이야기들을 감상적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은 눈에 띄는데 예를 들면
큰길에서 벗어난 뒤, 너무나 빽빽한 수림에 가려 바깥과 완전히 격리된 듯한 좁은 시골 길로 접어들자 친구의 오두막이 눈에 들어왔다. 외관상으로는 대부분의 전원시인들이 노래하기에 부족함 없이 소박했으나 뭔가 즐거운 전원미가 느껴졌다....(22p)
같이 집주변의 모습을 아름답게 그리는 등 낭만주의가 가지는 특성을 잘 살리고 있다. 하지만 주제나 내용 전개에서 조금은 진부한 작품들이 종종 보인다는 점은 분명히 아쉽다, 분량상의 문제일까, 처형당한 사랑을 잊지 못하고 결국은 세상을 떠난 여인의 이야기인 ‘실연’이나, 아들을 먼저 보내고 뒤이어 세상을 떠난 노파를 다룬 ‘과부와 아들’은 주제 면에서 아름답지만 ‘소설’이란 작품 자체를 볼 때 문학적으로 특별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포카노켓의 필립’처럼 쓰러져간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영웅적이며 숭고한 이들로 그려내는 등 독특하게 보이는 작품들이 더 끌린다고 해야 할까?
다른 이야기들도 민담 형식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특히 ‘실연’, ‘과부와 아내’, ‘시골장례식’, ‘마을의 자랑거리’ 등은 전해지는 이야기들을 정리한 듯 보인다.
저자 역시
이상이 내가 전해들은 이 사건의 전부다. 내용이 빈약하고, 그다지 내세울 만한 참신함이 없다는 사실을 나도 알고 있다. 게다가 요즘처럼 기묘한 사건이나 노련한 화술에 열광하는 시대에, 위의 이야기는 진부하고 하찮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162p 마을의 자랑거리 중)
라 말하듯이 문학적으로 특별하지 않아 보이는 작품이 분명히 있다. (아니면 이런 이야기에 움직이지 않는 내 감정이 말라버린 건지도…)
작품집의 진가는 어빙의 대표작인 ‘립 반 윙클’과 ‘슬리피 할로의 전설’에서 드러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두 작품은 따로 정리해 본다.
(문학적으론 ‘립 반 윙클’이 더 높게 평가 받는다지만 개인적으로는 ‘슬리피 할로의 전설’이 더 끌린다.)
[립 반 윙클, 짧은 시간에 달라져버린 미국의 모습]
영국의 신민으로 평범하고 여유롭게(=게으르게) 살다 마누라의 구박을 피해 사냥을 나간 주인공, 우연히 만난 술자리에 초대되어, 취해 잠들게 되고, 깨어 보니 약20년이 지나버린 당황스러운 상황을 다룬 립 반 윙클은 ‘미국 독립’이라는 거대한 사건으로 인해 변해버린 미국을 무겁지 않게, 다만 극적으로 보여준다.
"저는 불쌍하고 조용한 사람입니다. 이 마을 토박이고, 국왕의 충실한 종입지요. 국왕께 신의 은총이 있으소서!" (41p)
리 외치던 식민지 시대의 사람에게
“왕당파다! 왕당파! 첩자다! 도망자다! 끌어내려! 쫓아버려!”
라 반응하는 시대의 변화상은 개인의 변화와 더불어 유쾌하게 제시된다.
이 변화는 긍정적일까?
사실 소시민적 사람들에게는 폭정이나 학대가 없다면 크게 달라지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직접 지지하는 정당을 선택하는 정도가 아니면 큰 차이가 없다.
이제 그는 조지 3세를 섬기는 종이 아니라 미합중국의 자유 시민이 되었다는... (중략) 국가와 제국의 변화는 그에게 큰 감흥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오랜 기간 그를 신음케 했던 독재정치 형태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엄처시하였다. 다행히도 그 시절은 막을 내렸다. (중략) 부인의 폭정을 두려워할 필요 없이 마음껏 나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부인의 이름이 언급되면, 그는 여전히 고개를 젓고.. (중략).. 이게 운명에 대한 체념인지 아니면 해방의 기쁨인지는 양쪽 다 해석이 가능하겠다. (47p)
독립이라는 사회적 변화가 가져온 자유는 립 같은 개인에게는 별 감흥이 없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야기 말미에 나오는 것처럼
"마누라에게 쥐여사는 마을 남정내들은 세상살이가 무척 고달플 때 공통된 소망을 품었으니, 바로 립 벤 윙클의 술병에서 평온을 안겨다 주는 술을 한 모금 마시는 것이었다."(47p)
독립은 평범한 소시민에게 소박한 술 같이 달콤한 자유를 가져다 준 것임에는 분명하다. 그 자유가 받아들일 운명인지, 기쁨인지는 알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슬리피 할로의 전설, 개화와 전통의 대립, 또는 인간 내면에 있는 비합리적인 두려움]
영화로도 제작되어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자 책의 제목이기도 한 대표작 슬리피 할로의 전설은 다분히 몽환적이다. 외부 인물이자 학식과 깔끔한 모습, 다시 말해 문명을 나타내는 이카보드 크레인(책에는 이커보드라 음역하지만 일반적인 음역을 따른다)과 건장한 몸에 토착 세력인 브롬의 외적인 갈등은 우스꽝스럽고 재미있으나 몰입되진 않는다.
그러나 이런 가벼운 분위기 속에서도 난롯가에서 마을사람들이 들려주던 악령 이야기들, 그리고 슬리피 할로의 기괴한 분위기 묘사가 어우러져 주인공에게 공포심을 느끼게 하며.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그저 어둠 속에 걸어 다니는 밤의 공포, 마음의 환영일 뿐이었다.(184p)
하지만 이 지역에 초자연적인 이야기가 유행하는 직접적 원인은 뭐니 뭐니 해도 슬리피 할로가 근처에 있기 때문이었다. 유령의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그 자체에도 전염력이 있어, 꿈과 환상의 기운을 뿜어내면서 온 지역에 주문을 걸었다. (202p)
개인 내부의 비합리적인 두려움과 분위기 묘사를 통해 혼란스러울 수 있는 절정부분의 이야기를 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이야기의 절정은 목 없는 기병과 이카보드의 경주, 그리고 이후 이어지는 정리는 비합리적인 면을 드러내는 낭만주의가 가지는 특색을 유감없이 나타낸다.
이카보드가 유령에게 끌려갔다는 마을 사람들의 결론과 달리 책의 말미에 뉴욕에 다녀간 농부의 입을 통해 저자는 이카보드가 살아 판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한다.
밴 태슬 가문의 상속녀에게 퇴짜를 맞은 굴욕감 때문에 마을을 떠난 것이지 유령 때문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카보드의 이야기는 목 없는 기병의 머리로 사용된 것이 호박이었다는 사실, 또는 브롬이 목없는 기명의 머리가 호박이었다는 대목에서 웃음을 터드린다는 사실과는 부합하지만
‘저기까지만 가면 안전하다’ 이카보드는 생각했다. 그때 바로 뒤에서 유령의 흑마가 씩씩 내뿜는 숨소리가 들렸다... (중략) 요괴는 등자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머리를 던지고 있었다... (중략).. 유령의 머리는 엄청난 굉음과 함께 이카보드의 두골을 맞혔고, 그는 그대로 진흙 속에 고꾸라졌다. 이어 건파우더와 흑마와, 유령 기수는 회오리바람처럼 그를 지나쳐 갔다. (210p)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마치 정말 있었던 일처럼 묘사되는 목 없는 기병과의 경주 이야기와는 대치되어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도록 만든다. 하지만 이런 이유 없는 두려움이나 비합리적인 모습들이 인간의, 삶의 일부임은 분명하다.
바람직함이나 합리적인 믿음 너머에 있는 인간이란 골짜기, 그 깊은 곳의 두려움, 슬리피 할로
[사실 비교적 초기의 문학이라 그런지 현대적인 작품에 비해 단순한 점들이 없진 않다. 등장인물의 이름 번역도 아쉬웠고, 대표작을 제외하면 주제도 독특하지 않다. 하지만 긴 시간 견뎌온 작품들은 대부분 읽을 가치가 있다.]
"믿음이죠, 나리." 화자가 대답했다. "그 문제에 관한 한 저 자신도 절반은 믿지 않는답니다." 215p(마지막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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