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 이야기 이청준 문학전집 중단편소설 10
이청준 지음 / 열림원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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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진정한 용서와 종교에 대해 생각하도록 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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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란 무엇인가
김대행 지음 / 문학사상사 / 199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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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게 느껴지는 문학을 가까이 부르며, 문학을 진짜 주인에게 돌려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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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란 무엇인가
김대행 지음 / 문학사상사 / 199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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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상적인 문학 접근>

 

문학 이론서에 속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나, 재미있다.  문학이라는 것이 담고 있는 여러 가지 속성들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 설명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객관적 상관물이나 감정 이입같은 전문적인 용어들의 사용을 피하고, 대상에서 꿈과 희망을 읽어 내려는 언어(작가의 희망과 꿈의 형상화)를 할머니의 오냐 오냐의 언어로 표현하고,  서정후유~!”서사를 “~걸랑~!”의 언어로 표현하는 등, 어려워 보이는 문학의 용어를 아주 친근하게 풀어주고 있다.

 

(그래서 교양 차원에서 이 책을 읽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며, 문학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너무 일상적이었나? ^^; 느낌은 확실히 오지만 공부한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책>

 책의 목적이 전문가의 것이 되어버린 문학을 원래의 주인인 일상의 사람들에게 돌려주기 위함이었기 때문에 문학에 대한 이론들을 예시를 통해 명확하게 쉽게 설명하고, 문학에 대한 오해에서 나오는 잘못된 생각들을 교정한다.

 

예를 들면 “11.문학은 서부 활극이다에서 비극을 설명하면서

위대한 인물이 운명 앞에 패배하는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거나 그에 대한 동정과 연민을 통해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이 비극이다. 그리고 이런 기준으로 볼 때 우리 문학에는 비극이 없다.”

 

는 몇몇 사람들의 비판에 대해, “그것은 서구 사람들의 생각일 뿐이며 우리의 문학은 원래 주인공의 운명에 걸림돌이 되는 악인으로 인한 갈등이나 중오, 운명 같은 것이 없다. 그러나 심청전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슬픈 이야기에 우는 재미를 느끼는 것으로 문학은 충분히 향유된 것이다.”고 말하면서, 한국 문학만의 깊은 특징까지 잘 다루어주고 있다.  

 

게다가 저자가 돋보기로 담뱃불 붙이는 행위처럼 머릿속에 그리기 쉽게 설명하고 있지만, 내용을 보면 문학이 가지는 암시’, ‘전형화’, ‘상징등의 이론들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일반 교양이 아니라, 깊은 공부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생각할 주제들을 던져준다.  

 

[다만, 전공자의 경우 시험지에 서정후유~!’,‘서사‘~걸랑이라고 하면 성적에 심각한 영향을 줄 수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

 

어쨌든 이 책이 말하는 가장 큰 주제는 문학은 멀리 있지 않으며 우리가 하고 있는 언어생활, 그것이 문학이다.”고 요약할 수 있다. 물론 저자가 아무거나 돋보기로 본다고 해서 모두가 좋은 문학이 되지는 않는다.”고 한 것처럼, 문학에도 전문가나 명작은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가, 내가 오늘 사용한 농담 한 마디도 문학이며, 내가 회고하여 작성하는 일기 역시 나만의 문학이 됨을 알게 되었을 때, 문학은 우리 가까운 곳에 있을 것이며, 일상은 더욱 풍요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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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이방인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30
알베르 카뮈 지음, 방곤 옮김 / 범우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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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들은 '인간 존재'에 대해 그리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들이 그리는 인간의 모습은 보는 사람들에게 여러가지 생각할 주제들을 던져준다.

 

 

[신이 없는 인간 존재, 그러나 다른 강조점]

이 두 작품에서 까뮈가 그리고 있는 세상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페스트가 창궐하고, 타인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사회 (비록 '이방인'에서 조차 배경 사회는 그렇지 않다고 해도, 저자가 주인공을 통해 보여주는 모습은 그렇게 느껴진다.) 속에서 작가는 인간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까뮈는 '허망한 인간의 존재' 그리고 그 속에서 허위 등을 벗어 던지고 모든 것에서 자유롭게 된 인간 (적어도 저자는 그렇게 그리고 있고 역자도 그렇게 보고 있다.)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하고 있다. 그러나 '이방인'과 '페스트'에 나타나는 인간상은 조금 다르게 나타난다.  

 

1.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모든 것에 대해서 관조하지만 스토아 학파 등 특정 철학의 관조와는 다르다. 일종의 냉소랄까? 그의 생각에 따르면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특별하게 생각할 이유가 없어진다. 죽음은 인간에게 당연한 것이니까. 그리고 뫼르소의 생각처럼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자신의 태도가 '전혀 다른 사건'인 '살인'까지 영향을 주는 것도 합리적이지 않다.

 

그러나 이방인의 뫼르소는 위와 같은 부조리를 드러내는 데는 성공 했지만, '인긴이 보여줘야 할 진정한 모습의 전형'을 보여주는데는 실패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에게는 어머니를 비롯한 '타인의 죽음' 역시 별거 아닌 듯 보이며,  미행은 아랍인들이 했지만 먼저 습격한 것은 뫼르소의 일행들이었다. 그러므로 '칼을 가진 아랍인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정당방위'로 보기도 어렵고, 그가 살인을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허위를 벗어 던지면 살인할 자유도 얻어지는 것일까?  

아니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책에 나오는 것처럼 그는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일까? 혹은 그가 가진 삶에 대한 관조에는 타인이 들어갈 자리가 없는 것일까?.

 

(몰론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뒤에 이어서 "그러나 신은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하여 '신이 없는 세상의 무질서'를 경고했다. 이걸 샤르트르가 뒤집어서 "신이 없기 때문에 인간은 모든게 가능하다"고 바꾸어 나타냈고 이 표현이 유명해져서 대표적인 무신론 명언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 )

 

[덧 붙이면 위와 같은 이유로, 까뮈가 정말로 그리고자 했던 '신에서 벗어난 진정한 인간 존재'를 알기 위해서는 '페스트'까지 읽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두 작품을 엮어 놓은 이 책의 구성은 뛰어나다.]

 

2.

반대로 페스트가 그리는 종교나 기존 질서(억압)들은  여전히 허식이지면 여기에 나타난는 인간만은 숭고하다.  이 이야기의 인간에게 '신'이라는 것은 '있어서 나쁘지는 않으나, 필요하지도 않으며, 도움이 되지도 않는 것으로, '인간 존재'라는 책의 주제와 상관 없기 때문에, 이 책에는 신이 허상인지, 아니면 실존 하는지에 대한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저자는 그저 담담하게 '신을 믿는 자들'도 페스트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일반 사람들과 같다는 점을 보여주는 한편, "어린 아이의 고통에도 움직이지 않는 신의 덧없음."을 말한다.

 

리외와 파눌루의 대화를 비롯한 책의 곳곳에서 저자가 보여주는 인간의 모습은 "신이 없는 상황"에서도 충분히 "숭고한 것 처럼" 보인다. 저자는 작품 곳곳에 종교인(정확히는 신부)들을 자주 보여주면서 그들의 무능함을 담담하게 말한다. 

 

따라서 이 작품은 기존의 과학적 무신론자들이 하지 못했던 "신 없는 인간을 위한 방향 제시"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타 다른 무신론 작품들보다 더 큰 의미를 던진다.

 

('우주에는 신이없다''물리학의 세계에 신의 공간은 없다' 같은 과학계의 무신론 서적들이 "과학을 통한 신 존재 반박"이라는 헛수고를 하고 있는 것에 비해 이 책은 이런 의미를 던져줌으로  다른 길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p.s1] 왜 과학으로는 신 존재 반박이 안 되는지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잘 나와 있다. 물질 세계의 밖에 있는 '신'이라는 존재는 과학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과학적 방법으로는 증명도, 반박도 안 된다. 위에서 말한 '물리학의 세계에~'가 "신을 증명하기 위한 가설을 검증하고, 실패 했음을 들어 신은 없다."고 주장하는데, 이건 칸트가 오래전에 했던 말이다. 다시 말하면 과학으로는 '형이상학' 또는 그 이상의 존재인 '신'을 증명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다.

 

p.s2] 이 작품에서 까뮈가 그리는 '신에 대한 부정'은 "다른 것에 의지 하지 읺기에 독립적이면서도,  그 자체로 숭고한 인간" 을 가져온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형제들에 나타나는 스메르자꼬프(표도로비치 포함)의 모습을 보면   '신 없는 세상'은 까뮈의 작품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두 명작은 모두 읽어볼 필요가 있다. 

 

 

어쨋든 이 작품은 고립된 사람들의 생각을 잘 그리고 있는 한편, 독자들이 생각하도록 만들고 있는 명작이며, 뛰어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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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실 언니 - 개정판
권정생 지음, 이철수 그림 / 창비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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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생 선생님의 글들은 일반 동화들과는 달리 어른이 되어 읽는데도 조금 어려운 감이 없지 않다. 단편은 단편대로 생각할 것이 많지만 이번 장편은 동화를 읽는다는 느낌이 안 들었다. 주인공이 아이일 뿐, 오히려 "소설"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이제 이 책을 읽고나니 둘의 차이를 구별하는건 너무 어려운 문제가 되어버렸다.)

 

우리내 식민시절의 끝자락과  6.25를 살아오신 우리의 할머니(할아버지 포함)들의 모습을 글로 그려낸 몽실언니는 어떤 고상한 개념이나 주제를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그저 주인공이 겪는 가난과 고통, 이별과 방황, 그리고 개인의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을 어린아이의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그 주인공은 어떤 고상한 관념이나 이상향을 보여주진 않는다. 다만 저는 다리로, 누군가를 용서해가거나, 선한이들의 고통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일들보며 울 수 있는, 그런 작은 존재일 뿐.

 

동화에서 주인공은 어찌보면 무능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당시 삶의 모습이었으며, 주인공이 느끼는 울분과 슬픔, 그리고 그 속에 있던 작은 기쁨은 자신들의 잘못 없이 어떤 흐름에, 물결에 쓸려서  '막막할 수밖에 없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이 느꼈던 감정일 것이다..

동화가 외부의 압력으로 단절 되어서인지 이야기의 결말 부분은 조금 모호하다. '희생을 통한 자기 존재 가치 발견'이라는 주제가 보이는 '강아지 똥'이나 그외 다른 동화들에 비해서도 이 책이 가지는 확실한 주제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작가가 그려내는 몽실이의 사회(시대)는 정말 암울 했으며, 그런 삶 앞에서의  막막한 감정에도  소녀는(몽실이는) 이겨왔고, 동생들을 지키고, 자녀들을 돌보면서 살아왔다. 그리고 그 동생들 역시 어려움은 있었으나 결국은 버림받음과 이별 등 여러 어려움을 거치며, 여기(지금, 오늘)까지 살아왔다.

 

이것이 우리의 할머니,할아버지들 삶의 모습이었고, 힘든 걸음으로 그 시대를 살아간 몽실이와 난남이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삶을 버텨왔을 모습으로 생각하면 한편으론 그들의 삶 자체를 두고서도 고개가 숙여진다.

[6.25당시에도 돈 많은 사람들은 의료 혜택을 받는데 우선권이 있었던 점이 동화 속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상위1%의 사람들은 이런 세월을 겪지 않았을 확률이 높지만, 당장 우리의 할머니들만 봐도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동화가 그리는 이 사회의 문제는, 각 단체를 구성하는 개인이 악해서도 아니며, 그들 모두가 나쁜 것은 더욱 아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일까, 어디서부터 살펴야 할까.......

 

그 전에,  몽실이와는 다른 조건이고 훨씬 편한 세상이이지만,  나 역시 서로에게 열린 마음을 가지고, 끝까지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야겠지.....  참 어렵다..

 

저자의 말이 생각난다.

 "동화가 왜 그렇게 어둡냐고요? 그게 진실이기에 아이들에게 감추는 것만이 대수가 아니지요. 좋은 글은 읽고 나면 불편한 느낌이 드는 글입니다." -권정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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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이런 내용의 서평을 썼었다. 하지만 다시 읽어서인지, 아니면 개정판(내용에는 변화 없음)에서 변한 그림들 때문인지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묘한 느낌이 든다. 이전의 내용과 그림들이 오래된 흑백 사진이나, 남의 이야기 같은 '먼 과거의 어떤 사건'이라는 느낌이 들었다면 이번 개정판은 조금 더 생생하다. '회상'이라는 느낌이 난달까? 

 

아니면 그림의 차이 외에도, 옛날 책의 표지 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는 세상의 모든 폭력'이 변하여 찾아오기 때문일까?

 

아니면 몽실이가 말했던 "사람들을 나쁘게 만들고, 서로 죽고 죽이게 하는 진짜 나쁜 것"이서 비롯된 사회의 문제는 언제나 모습을 바꾸어 찾아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몽실이처럼 그저 인내하며 살아가는 것이 최선의 저항일까? 그건 아직 잘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좀 더 적극적으로 개선의 노력을 하는 것이 의미 있어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개인이 무능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결국 개정판에 맞추어 이 소설(동화이나 소설같은 느낌이 든다)을 세 번 이상 읽고 난 후, 얻게된 가장 큰 소득은 '세상의 부조리함을 새롭게 알기'보다, '그런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생명들에 대한 따스한 시각'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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