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9일 (우리 시간으로 2월 10일) 진행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생충>과 경합을 벌였던, 제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국 샘 멘데스 감독의 <1917>이 2월 19일 우리나라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은 현대 과학이 만든 잔혹한 살상무기들이 투입되어 전쟁의 면모를 바꾼 격변이었다. 탱크가 이 때 처음으로 전선에 투입됐고, 비행기도 제한적이지만 그 쓰임새를 증명했다. 그 외, 잠수함, 독가스, 기관총, 새로운 전함, 대규모 포격 등등 전쟁은 새로운 무기와 전술의 시험장이었다. 치명적 무기 때문인지 전선은 곧 정체되어 쌍방 모두 깊은 참호를 파고 대치했으며, 이러한 비인간적 참호전은 1차 세계대전의 집단적 트라우마로 인류에게 남아 있다. 4년 3개월 2주간의 전쟁을 통해 쌍방 합쳐 약 천만 명의 군인이 죽고 2천만 명의 군인이 다쳤다. <1917>은 독일군이 전선을 단축하기 위해 행했던 퇴각(알베리흐 작전Operation Alberich)을 배경으로 한 가상의 이야기를 통해 전쟁의 참상을 보여준다. 


함정에 빠질 공격을 취소하라는 명령을 1,600명으로 이루어진 대대에게 전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두 영국군 병사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영화의 주요 줄거리인데, 실제 이러한 상황이 가능했는지에 대해서는 비판이 있다. 1,600명 정도의 손실에 고급 지휘관들은 눈도 깜빡하지 않을 정도로 당시 전쟁이 비인간적이었다는 것인데, 어찌 보면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영국판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1917>이나,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사투하는 모습은 전쟁의 참혹함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일 뿐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이건 좀 기술적인 얘기인데, 당시 총공격은 반드시 대규모 포격 뒤에 이루어졌으므로, 만약 포격이 없다면 당연히 부대는 공격 취소를 의심했을 것이라서 굳이 이렇게 힘들게 공격 취소를 알리러 갈 필요가 없다는 비판도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혹함을 알린 책 한 권을 다음에 리스트한다. 19살의 나이로 자원하여 참전했던 독일의 에른스트 윙어Ernst Jünger의 회고록이다. 





























원저는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20년 출간됐는데, 위의 제일 왼쪽 영문판은 Basil Creighton의 1929년 번역본으로서 2019년 출간됐다. 그 오른쪽 두 권은 Michael Hofmann의 번역본으로 2004년, 2016년 출간됐다. Michael Hofmann의 번역이 더 생동감 있는 번역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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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attle of Midway (Paperback)
Craig L. Symonds / Oxford Univ Pr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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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말 개봉한 영화 <미드웨이>를 보고 바람이 불어서 미드웨이 해전에 대한 책들을 찾아보며 읽고 있는데, 마지막으로 Craig Symonds의 책에 대한 평을 적는다. 이 책은 미국에서 2011년에 출간됐는데, 최근 우리말로 번역된 <Shattered Sword>(미국에서 2005년 출간)의 연구까지 포괄하여 미드웨이 해전에 대해 아주 균형 잡힌 설명을 해준다. <Shattered Sword>가 일본측 자료를 연구하여 전투에 얽힌 여러 신화를 깨는 주춧돌을 놓았다면, 이 책은 미드웨이 해전 자체에 대한 논의는 <Shattered Sword>만큼 자세하지 않지만, 그 이전의 둘리틀 공습이나 산호해 해전 등에 대해 좀 더 상세히 보여준다. 또한, 해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암호 해독에 대해서도 한 개 장을 할애하여 설명한다. 논의가 전반적으로 간략한 편이지만 해전에 얽힌 여러 면모를 종합적으로 조망하게 해주며, 특히 미국 항공모함 호넷에서 발진한 공격기들의 항로에 대해 여러 자료를 검토하여 논란을 잘 정리하고 있다. 미드웨이 해전에 대한 또 하나의 훌륭한 참고도서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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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Scientist (주간 영국판): 2019년 12월 21일 - 영어, 매주 발행
New Scientist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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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왕실천문학자(Astronomer Royal)인 마틴 리스가 이 2019 크리스마스 특집호에 글을 썼다(33 페이지). 제목은 "두 번째 거대한 도약(A second giant leap)"이다. 2019년은 인류의 달 착륙 50주년이 되는 해였는데, 2020년대에는 또 다른 우주 경쟁이 본격 시작될 조짐이다. 중국과 인도는 유인 달 탐사를 계획 중이고, 미국은 유인 화성 탐사를 위해 달에 기지를 세울 생각을 하고 있다. 일론 머스크나 제프 베조스는 SpaceX나 Blue Origin 사업을 통해 사람을 우주로 보낼 로켓을 개발 중이다. 


스티븐 호킹은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우주로 진출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마틴 리스는 스티븐 호킹과 의견을 좀 달리 한다. 인류가 언젠가는 지구와 가장 비슷하다는 화성으로 진출하긴 하겠지만, 대규모 이주는 어려우며 위험을 감수할 의지가 있는 극소수만이 화성으로 갈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렇게 진출한 극소수의 사람은 새로운 환경인 화성에 적응하기 위해 여러 기술의 도움으로 굉장히 빨리 '진화'할 터이고, 이렇게 진화한 인류는 지구에 남아 있는 인류와 비교할 때 새로운 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마 실험적 진화가 성공적일수록 점점 지구의 인류와는 생물학적으로 거리가 멀어질 텐데, 여기서 재미있는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더 이상 인류라고 볼 수 없는 화성인과 지구인 사이의 갈등--아마도 자원을 둘러싼?--이 전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을까? 웰즈의 소설처럼 화성인의 지구 침공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을까?


마틴 리스의 생각은 부정적이다. 점점 진화한 화성인은 궁극적으로 유기물인 육체를 버리고 지성을 갖는 무기물로 진화할 터인데, 이들에게는 지구의 환경이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을 것이다. 지구와 같은 행성에는 중력이라는 거추장스러운 힘이 있다. 반면 행성에서 멀리 떨어진 우주 공간은 중력이 매우 작으며, 더 이상 호흡할 산소가 필요치 않은 무기 지성(inorganic intelligence)에게는 이러한 심우주 공간이 더욱 매력적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현재로는 도저히 실현 불가능한 은하간 여행을 하며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주 여행에 대한 생각--인간의 수명보다 긴 시간을 보내기 위해 '동면'을 하는 등과 같은--을 초라하게 만든다[1]. 어쩌면 이것은 물에서 살던 생물이 진화하여 뭍으로 올라온 후에는 더 이상 물이 필요치 않게 되는 것과 비슷할 수도 있겠다. 



류츠신의 과학소설 <삼체>에는 '암흑의 숲' 가정이 나온다. 소설 내용을 스포일하지 않기 위해 간략히 적자면, 우주의 모든 지적 생명체가 적대적이라는 것이 이 가정이다. 마틴 리스의 생각은 이러한 가정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한다. 


이 크리스마스 특집호에는 류츠신의 단편 소설도 실려 있다(38페이지). 제목은 <2018-04-01>인데, 유전자 조작을 통해 인간의 수명을 300년까지 늘릴 수 있게 됐을 때의 얘기를 다룬다. 중국도 류츠신을 애정하지만, 서구도 이 작가를 애정하는 것 같다. 그의 <삼체> 시리즈를 모두 읽은 나는 그를 크게 애정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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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화 <패신저스>에는 새로운 행성으로 가기 위해 동면한 5000명의 이주자들 얘기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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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0-02-01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인간의 우주 진출 전망을 언급한 호킹의 글을 읽은 적이 있어요. 저는 그 글을 읽으면서 호킹이 우주를 식민지처럼 여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저도 인간의 우주 진출과 우주 사업에 대해서 신중하게 접근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blueyonder 2020-02-02 10:24   좋아요 0 | URL
만약 외계생명체가 있는 곳으로 이주한다면 지구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주자와 원주민 사이의 문제가 발생하겠지요. 만약 외계생명체가 있다면 이들의 권리를 존중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지성까지 필요하다고 할지 등등 고민할 문제가 많을 것 같습니다. 외계생명체가 지성이 있건 없건, 이들의 입장에서 지구인은 침략자가 되겠지요. 실제 화성탐사에서는 외계생명체의 유무가 큰 관심사인데, 탐사선이 지구에서 모르고 싣고간 미생물을 화성 고유의 생명체로 오인하지 않도록 신경을 많이 쓰는 모양입니다.
이래저래 우주를 우리 맘대로 써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인류중심주의를 벗어나기 힘든 모양입니다.
 
관계의 과학 - 복잡한 세상의 연결고리를 읽는 통계물리학의 경이로움
김범준 지음 / 동아시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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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물리학자인 김범준 교수님의 두 번째 책이다. 첫 번째 책인 <세상물정의 물리학>과 마찬가지로, 통계물리학의 기법을 사회 현상에 적용하여 그 현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회 물리학’ 또는 ‘네트워크 과학’에 관한 책이다. 소개되는 연구 주제도 우리 일상에 굉장히 밀접한 내용들이고 굉장히 매력적이다. ‘함께 하면 달라진다’가 책의 주제이자 김범준 교수님의 모토처럼 보이는데(내가 받은 사인본에 친필로 적혀 있다^^), 사회란 것이 수많은 개개인이 모여 이루어진 ‘집합’이므로, 굉장히 많은 입자들의 모임을 연구하는 통계물리학적 기법을 적용하는 좋은 테스트베드처럼 생각된다. 문제는 사회의 ‘원자’인 개인이 워낙 복잡하고 제각각인지라 단순하고도 완전히 똑같은 원자나 분자로 이루어진 물리계처럼 다룰 수 있느냐이다. 아마 이 부분이 많은 이들-특히 사회학하는 분들?-이 지적하는 부분이기도 하다[1]. 하지만 사회적 현상에 대한 통계물리학적 분석이 통찰을 주는 부분-영역-도 분명히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면에서, 통계물리학적 분석을 통해 의미를 끄집어 낼 수 있는 주제를 선정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것 같다. 예로 들 수 있는 것은, 책에 나와 있는 것처럼, 마구걷기(random walk)와 마찬가지인 주가지수와 그렇지 않은 DNA 염기서열 분석이다. 


사회 현상에 대한 통계물리학적 분석은 사회학적 분석이 주지 못하는 무엇을 주는 것일까? 우선, 사회학적 분석이 주지 못했던 새로운 통찰, 새로운 이해를 들 수 있겠다. 책에서 읽은 예 하나는 개봉 영화의 누적 관객 수에 관한 분석이다. 알려진 데이터를 보면 영화의 누적 관객 수는 개봉 후 선형적으로 증가하는데, 이는 전염병이 증가하는 방식인 지수함수적인 특성과 대비된다. 전염병은 최초 1명이 접촉한 또 다른 사람에게 전염시켜 2명이 되며, 또 2명이 각각 1명씩 전염시켜 4명, 이런 식으로 계속 2배로 늘어나는 지수함수적인 증가를 보인다. 영화가 이렇게 증가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영화를 주변의 평에 따른 ‘입소문’만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고, 주로 광고가 큰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으로 나아간다. 물론 예외인 영화가 있을 수 있다. 연구에서 사용한 데이터는 여러 영화의 평균값을 사용했으므로, 여기서 얻은 결론은 영화계 전반, 혹은 데이터에 포함된 비교적 흥행한 영화에 대한 일반적 이해라고 볼 수 있겠다. 


통계물리학이 주는 두 번째 장점은 수치화를 들 수 있겠다. 물리는 수치를 다루는 학문이며, 이는 사회 물리학도 예외는 아니다. 수치화의 장점은 예측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예측은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다. 맞으면 그 분석의 올바름에 대한 증거가 하나 더해지는 것이고, 틀리면 그 분석은 폐기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수치를 기반으로 한 과학의 장점이다[2]. 미래에 대한 합리적 예측은 그동안 인류가 살아남는데 엄청난 역할을 했으며, 복잡다기한 오늘날 더욱 큰 역할을 하리라 생각된다. 


책을 읽으면 김범준 교수님이 얼마나 즐겁게 일하는지가 상상이 된다(개인적으로 매우 부럽다). ‘취미를 직업으로 삼지 말라’는 말이 있는데, 아마 김범준 교수님은 예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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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과학은 논쟁이다>에서 이상욱 교수가 이와 비슷한 입장을 대변했다. 

[2] 숫자라는 것은 놀라운 힘을 지녔으며 때때로 신비하게 보이기도 한다. 요즘은 특히 인공지능 관련하여 많은 것들이 수치로 표현된다. 이러한 수치를 어느 정도까지 믿을 것이며, 특히 어떻게 검증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수치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좋지 않다. 항상 오차(또는 오류)가 있기 때문이다. 


책 속의 글귀 몇 구절:

... 저항운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한 사람이 인구의 3.5%가 넘은 ‘모든’ 저항운동은 성공했다는 것이다. 3.5%가 적은 숫자는 아니다. 5,000만 명이 넘는 우리나라라면 거의 200만 명, 미국이라면 무려 1,000만 명이 넘는 숫자다. 흥미로운 점은 더 있다. 3.5%를 넘긴 모든 저항운동은 하나같이 다 비폭력적이었다는 점이다. 즉, 비폭력 저항운동의 성공률이 더 높을 뿐 아니라, 참여자의 숫자도 더 많았다. 비폭력 저항운동의 평균 참여자 수는 폭력적인 저항운동의 무려 4배였다. (40~41 페이지)

  단순한 컴퓨터 모형으로 살펴봤다... 10만 명으로 구성된 집단에서... 사업 성공 확률은 누구나 50%라고 가정했고, 성공한 사람은 자본이 2배가 되고, 실패한 사람은 절반으로 줄어든다... 부의 불평등은 ...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누구나 똑같은 재주를 가지고 있더라도, 누군가는 부자가 되고 누군가는 가난해질 수 있다는 결론이다. 현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실패했다고 해서, 그 사람의 능력이나 노력이 부족하다고 결론내릴 수는 없다. (63 페이지)


물리와 친해지면 가능한 일: 

길들여야 할 것은 여우만이 아니다


  클래식 음악을 귀 기울여 듣게 된 것은 대학생 때 ‘음악의 이해’라는 과목을 수강한 일이 계기가 되었다. 교수님의 조언을 지금도 기억한다. 곡을 하나 고른 후 무조건 반복해 여러 번 들어보라는 충고였다. 브람스 4번 교향곡 1악장을 골랐다. 정말 여러 번 들었다. 지금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 중 하나다. 한 번, 두 번, 횟수를 거듭해 수십 번쯤 들었을 때, 머리에서 발끝까지 내 몸을 관통하는 감동을 느꼈다. 그때 알았다. 아름다움은 대상의 속성이 아니다. 아름다움은 대상과 나 사이의, 사랑과 비슷한 상호작용이다. 내가 준비되었을 때에만 찾아오는 관계 맺음이다. 길들여야 할 것은 여우만이 아니다. 스스로를 길들인 후에야 아름다움은 나를 찾아온다.

...

  물리학도 아름답다. 음악이나 그림과 마찬가지로, 물리학의 아름다움도 친해져야 드러난다. 친해지는 과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 긴 시간을 보내며, 선배 물리학자들이 만들어낸 이론체계에 스스로를 길들여야 한다... 빤짝빤짝 깨달음의 순간들이 계단으로 이어져 지루할 틈이 없다. 뉴턴 운동법칙의 결정론적 성격을 깨달아 깜짝 놀라기도, 시공간의 대칭성으로 보존 법칙이 정해진다는 것을 처음 알고는 등골이 오싹하는 전율을 느끼기도 했다.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의 자명함을 처음 깨달았던 순간, 수소 원자의 바닥상태 에너지를 처음 구했을 때의 감동은 지금도 생생하다. 


... 물리학자도 ... 다른 모든 이와 마찬가지로 온갖 것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감동을 한다... 붉은 노을과 쪽빛 가을 하늘, 전혀 다른 하늘의 이 두 색을, 공기 중에서의 빛의 산란으로 동시에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깨달음은 이전에 느꼈던 자연의 아름다움을 조금도 해치지 않는다... 오히려 아름다움을 훨씬 더 경이롭게 만든다. 한쪽 눈으로만 보는 아름다움보다, 두 눈으로 보는 아름다움이 더 풍성하듯 말이다. 과학은 세상의 여전한 아름다움의 다른 면도 보여주는, 또 하나의 눈이다. (151~154 페이지)


인공지능에 대한 단상:

  정보처리 용량이 그리 크지 않은 인간의 지성은 외부의 모든 다양한 정보에 고루 눈을 두지 못한다... 책을 펼치고 왼쪽 면의 글에 눈길을 고정하고 동시에 오른쪽 면의 글씨가 무엇인지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시각 정보의 엄청난 양을 처리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사람의 뇌는, 아주 좁은 부분에 시각을 집중함으로써 정보를 처리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결국 정보처리 용량의 한계를 이처럼 의식의 ‘집중’으로 해결하는 존재다. 정보처리 용량을 얼마든지 늘릴 수 있는 인공지능은 다르다. 많은 정보에 동시에 집중할 수 있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좁고 깊게’와 ‘넓고 얕게’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인공지능은 ‘넓고 깊게’ 볼 수 있는 존재라는 말이다.


... 바둑을 어려서부터 수없이 둔 프로기사라도 바둑판의 모든 가능성을 경험할 수는 없다. 처음 맞닥뜨린 낯선 새로운 상황에서 프로기사들은 ‘직관’을 이용한다. 사람이 가진 ‘직관’이 엄청 신비로운 것은 아니다. 과거의 수많은 경험을 일반화해서 새로운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힘이 바로 ‘직관’이기 때문이다... 결국 ‘직관’은 축적된 경험 위에 자리 잡은, 정제되고 결정화된 일반화의 힘에 붙은 다른 이름일 뿐이다. 사람은 태생적인 정보처리 능력의 한계를 ‘집중’으로 좁혀 해결하듯이,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를 깊이 따져보는 데서 발생하는 시간 자원의 과도한 소모를 ‘직관’이라는 무디지만 빠른 도구로 대치해 해결한다. 즉, 좁고 깊게 사고하는 것이 집중이라면, 넓고 얕게 사고해 빠른 결정을 이끌어내는 힘이 직관이다. (200~202 페이지) 


  사실 내가 이번 승부[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에서 느낀 것은, 인간의 직관력에 대해 가지고 있던 근거 없던 자만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인간의 위대한 직관도 결국은 프로그램으로 구현 가능한 유한한 단계의 계산으로 대치할 수 있다는 가슴 아픈 깨달음이다. 인간의 위치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그리고 인간도 진화의 연속선상에 놓여 다른 생명체 모두와 기원을 공유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미 경험한, 이번에는 우리가 신비롭게 여겼던 인간의 지성에서 다시 발견한, 익숙하지만 다른 연속성의 깨달음이다.


  ‘집중’과 ‘직관’은 우리가 지금까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만에 빠져 자랑스러워했던 인간 지성의 엄청난 능력이 아니라, 결국 어쩔 수 없이 한계 지워진 가여운 인간 지성의 두 약점의 이름이 아니었을까. 얼마든지 넓고도 깊게 볼 수 있는 지성은 ‘집중’과 ‘직관’도 필요 없는 것이 아닐까. ‘집중’ 없이 한 번에 모두 다 볼 수 있다면, 그리고 ‘직관’ 없이 끝까지 계산해해 정확히 알 수 있다면, 인간의 ‘집중’과 ‘직관’은 결국 미래에는 버려질 어떤 것이 아닐까. ‘집중’과 ‘직관’ 없이 모든 것을 ‘계산’으로 환원해 처리할 수 있는 미래의 지성 앞에서, 사람의 연약한 가여운 지성은 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한의 정보를 0으로 수렴하는 시간 안에 계산으로 처리하는 것은 인공지능에게도 당연히 불가능하겠지. 그렇다면 유한한 존재라면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이런 한계에 맞서, 인공지능도 ‘집중’과 ‘직관’을 배울까. 그럼 인공지능이 갖추게 될, 인간보다 더 넓은 ‘집중’과 더 깊은 ‘직관’은 인간의 그것과 어떻게 다를까. 인공지능이 스스로를 창조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지성이 만든 지성이 만들 지성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204~206 페이지)


인생에 대해:

우리의 인생은 빛살이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 문제다”라는 멋진 얘기가 있다. 영어 표현을 찾아보니 “Life is a matter of direction, not speed”로 적혀 있다. 우리말로 번역한 이는 물리학을 잘 알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물리학에서는 벡터인 속도velocity와 스칼라인 속력speed을 명확히 구별하기 때문이다. 크기와 방향을 모두 가진 것이 속도고, 속력은 속도의 크기다. “인생에서는 얼마나 빨리 나아가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디를 향해 나아가는지가 중요하다”가 원뜻이다. 물리학의 양자역학에는 크기가 중요하지 않고 방향만 중요한 경우가 정말로 있다. 양자상태의 수학적 표현이 정확히 이렇다. 이런 양을 물리학에서는 빛살ray이라고 부른다. “인생은 빛살ray이다”가 물리학적으로는 짧고도 정확한 표현일 수도 있겠다.


  멋진 말 트집은 여기서 그만... 이 말을 “과거에 있었던 곳과 지금 있는 곳의 차이가 인생에서 중요하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우리가 느끼는 ‘행복’에서도 마찬가지로 ‘차이’가 중요하다. 


... 비슷한 경제 수준의 다른 나라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행복감은 무척이나 낮다. 연구자들은 그 원인으로, 스스로가 아닌, 다른 이에게 비치는 나의 모습에 초점을 둔 전통적인 가치체계를 지목한다. 나의 과거가 아니라, 나보다 나은 다른 이의 현재를 지금의 나와 비교하기 때문이다. 과도한 집단주의는 개인의 행복을 해친다. 행복에는 ‘다름’이 중요하지만, 나의 어제와의 다름이지, 다른 이의 현재와의 다름이 아니다.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진행하는 시간의 흐름에서, 어제와 다른 내일의 나를 만드는 오늘에 충실한 것이 행복의 첩경이다. 


  진화심리학의 연구자들은 삶의 목표를 이루려는 과정에서 진화의 과정 중 부수적으로 생겨난 감정이 바로 ‘행복’이라고 얘기한다. 행복은 우리가 ‘생존’이라는 삶의 궁극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느끼는 부수적인 감정이라는 거다. 사랑하는 가족, 친한 친구와 둘러앉아 함께하는 저녁식사의 맛있는 김치찌개의 생생한 감각이 행복이다. 돈을 벌어 행복해지겠다는 식으로 삶의 목적을 설정하는 사람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이보다는, 다양한 경험을 새롭게 하는 것이 행복에 훨씬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을 여러 연구가 알려준다. 물질적인 만족으로 생긴 행복은 잠시만 지속되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종이 지금처럼 커다란 성공을 거둔 이유는 바로 인간의 사회성이다. 우리는 같은 경험이라도 다른 이와 함께할 때 더 큰 행복을 느낀다. 사랑하는 남편, 아내와 매주 다른 곳을 찾아가 새로운 경험을 함께 하라. 어제는 저녁으로 김치찌개를 맛있게 먹었다면, 오늘은 가족과 새로운 장소에서 함께 산책하라. 인생이나 행복이나 결국 요점은 어제와 다른 나다. 사랑하는 이들과 더불어, 매번 새롭고 멋진 경험을 하려 노력하라. 로또 당첨보다 훨씬 확실하고 빠른,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인생을 빛살”로 만드는 첩경이다. (311~314 페이지)


앎과 모름에 대해:

  막상 문제를 구체적인 질문의 형태로 종이 위에 적다 보면, 사실은 문제 자체도 잘 모르고 있었다는 자기 성찰을 할 때가 많다. 도대체 문제가 정확히 무엇인지조차도, 문제를 적다 보면 명확해진다. 문제를 쓴다고 자동으로 답을 알게 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쓰다 보면 적어도 내 앎의 부족은 알게 된다. 내가 과연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를 알고 싶다면 직접 써보면 될 일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모르는지를 어떻게 하면 가능한 한 빨리 스스로 깨달을 수 있을까? 물리학 연구를 함께 진행하는 대학원생에게 종종 해주는 이야기가 있다. 연구가 다 마무리되기 전에 논문을 쓰기 시작하라는 거다. 막상 논문을 쓰다 보면, 어떤 부분이 부족한지를 스스로 알게 되기 때문이다. 논문을 쓰다 보면, 어떤 기존 연구를 더 조사해야 하는지, 현재 진행하고 있는 연구가 도대체 과거 다른 연구자의 연구와 어떤 점에서 다른지, 내가 아직 명확히 이해하지 못한 내용이 무엇이지[원문 오타], 그리고 결론을 보다 더 명확하게 뒷받침하려면 어떤 연구가 필요한지 잘 알게 된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현재 진행하고 있는 연구를 매일매일 돌이켜보며 논문의 내용을 조금씩 계속 적어가는 것이 연구자에게 큰 도움이 된다. (335~336 페이지)


사족: 라플라스의 악마를 물리친 퇴마사가 바로 로렌츠Hendrik Lorentz다. 베이징에서 날개를 퍼덕인 나비 한 마리의 작은 영향으로 뉴욕의 날씨가 변할 수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결정되어 있다고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293~294 페이지) 

나비 효과로 종종 언급되는 카오스 이론과 연관되는 이는 Hendrik Lorentz가 아니라 Edward Norton Lorenz이다. Hendrik Lorentz는 네덜란드의 물리학자로, 제이만 효과(Zeeman effect)의 발견과 설명으로 제이만과 함께 1902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으며,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론에 나오는 로렌츠 변환(Lorentz transformation)으로 유명하다. Edward Lorenz는 미국의 수학자이자 기상학자로서, 날씨와 기후의 예측불가능성을 통해 카오스 이론의 토대를 놓았다. Lorenz의 이름은 카오스 이론에 나오는 로렌즈 끌개(Lorenz attractor)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둘은 종종 혼동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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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웨이 해전 - 태평양전쟁을 결정지은 전투의 진실
조너선 파셜.앤서니 털리 지음, 이승훈 옮김 / 일조각 / 2019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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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본 책 중 가장 좋은 전쟁사 번역이다. 역자는 원저의 주에 더해 일본 원전 등을 찾아 역자 주를 붙였는데, 그 노력이 정말 대단하다. 원저의 실수를 바로 잡고 좀 더 풍부한 정보를 독자들에게 주고 있다. 용어 선택에도 고심한 흔적이 역력한데, 좀 전문적인 용어가 튀어나올 때도 있어 일반 독자들에게 어려울 수도 있지만 용어 설명을 뒤에 부록으로 넣어 배려했다. 일본 인명도 일일이 한자를 찾아서 넣는 수고를 했다. 저자인 파셜은 2005년에 나온 본인의 책보다 이 번역서가 더 뛰어난 책이라는 추천을 한다. 여러 모로 볼 때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번역 자체도 매끄럽고 좋다. 번역투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에게 이렇게 좋은 전쟁사 번역가가 생긴 것이 너무나도 기쁘다. 이 책이 통사나 전쟁의 큰 흐름을 다룬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전투만을 다루었기 때문에 일반 독자들에게는 시간을 쓸 유인을 찾기 힘들지도 모르겠다는 것이 아쉽다. 미드웨이 해전에 관심 있는 모든 이에게 추천한다. 또 일본인에 대해 좀 더 이해하고 싶은 이에게도 추천하고 싶다. 태평양 전쟁 초기, 항공기를 이용한 해전의 양상에 대해 알고 싶은 이에게도 추천한다. 


책 속 한 구절:

... 고위층 내부에서 3개월간 밀고 당긴 끝에 함대는 좋게 표현해서 가치가 의문스러운 목표를 달성하려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곧 출항할 예정이었다. 작전계획은 어처구니없이 복잡했고 각 부대는 상호지원이 전혀 불가능하게 배치되었으며 일정은 지나치게 빡빡했다. 제대로 된 참모장교라면 미드웨이 작전의 도상연습이 충분하지 않았고 훈련 시간이 많이 부족했다는 점도 지적할 것이다. 작전계획에는 예측하지 못햇던 항공모함 2척의 부재도, 산호해 해전의 전훈戰訓도 반영되지 않았다. 나구모의 지각 출항에 따라 미드웨이 공격함대의 위치와 일정을 변경하지 않은 것 같은 눈에 뻔히 보이는 실수가 이 모든 것의 대미를 장식했다. 지하야 마사타카는 연합함대에 대해 쓴 책에서 이 모든 실수를 간결하게 요약했다. "진인사대천명은 이 경우에 맞는 표현이 아니다." 이 불길한 암운 아래에서 기동부대는 자신을 기다리는 운명을 향해 이틀 뒤 출항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128~129 페이지)


미일 양국 항모 설계의 차이에 관해:

... 기본적으로 격납고 설계에 영향을 주는 두 가지 변수는, 폐쇄형으로 설계할 것인가 개방형으로 설계할 것인가(달리 말하면 외기에 쉽게 개방되는가 아닌가)와 비행갑판에 장갑을 두를 것인가 말 것인가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항공모함을 운용한 주요 3국은 이 문제에 대해 각각 다른 철학을 채택했다. 영국 항공모함은 격납고를 창고, 대기실, 기타 구획으로 둘러치고 위에 장갑 비행갑판을 얹었다. 장갑 비행갑판은 함의 종강도縱强度longitudinal strength 중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조선용어로는 강력갑판强力甲板strength deck이라고 한다). 영국 방식은 격납고를 직격탄으로부터 보호한다는 장점이 있지만 심각한 단점도 있었다. 첫째, 함의 구조물 상부에 무거운 장갑을 얹으므로 갑판의 크기와 함의 높이가 제한된다. 따라서 한 격납고 위에 다른 격납고를 쌓는 복층형 격납고는 설계가 불가능하다. 복층 격납고 위에 장갑 비행갑판을 설치하면 상부 무게가 수용 불가할 정도로(당연히 함의 안정성과 복원력을 해친다.) 무거워지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 통로가 강력갑판을 뚫고 지나가야 하므로 엘리베이터 통로의 수와 크기도 제한되었고 이는 비행기 운용능력과 빠른 발진준비에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 그 결과, 영국은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 항공모함에 탑재할 수 있는 비행기 수가 적었다. 미국이나 일본의 정규 항공모함이 60~100기를 운용한 데 반해 영국 해군의 정규 항공모함은 48기 정도를 운용했다.

  미 해군은 항공모함에 장갑 비행갑판을 탑재하지 않는 쪽을 선택했고 격납고 갑판이 강력갑판 역할을 하는 설계를 도입했다. 이 설계에 따르면 구조상 비행갑판 무게가 가벼워지고 격납고를 둘러싼 격실들이 없어도 되기 때문에 미국 항공모함의 격납고는 상대적으로 넓었다. 더욱이 격납고는 금속제 접이문으로 외부환경을 차단하되 양현 여러 곳에서 개방되어 있었다. 접이문은 유증기나 빛을 완전히 차단할 정도로 단단히 닫히지는 않았으나(따라서 완전 등화관제를 할 때 문제가 되었다.) 문을 열면 격납고를 완전히 개방할 수 있었다. 따라서 미국 항공모함은 필요하다면 격납고 안에서 비행기 급유와 시운전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폭발물처럼 격납고에 있는 위험물은 양현의 열린 곳 밖으로 밀어내 신속하게 투기할 수 있었다. 비장갑 비행갑판은 비교적 수리하기 쉬웠지만 폭탄을 맞으면 아래의 격납고를 보호할 수 없었고, 간혹 미 해군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특히 전쟁 말기의 가미카제 공격). 장갑 비행갑판과 비장갑 비행갑판의 이점에 대한 논쟁은 끝이 없지만, 결론적으로 미 해군은 항공모함이 전력투사 자산이며 적절한 수의 탑재기 없이 전력투사는 불가능하다는 기본명제에 충실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여 미 해군은 항공모함 설계에 위험이 따르더라도 이를 기꺼이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결함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우리는 미 항공모함이 태평양 전쟁에서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보면 일본 해군의 항공모함 설계방침은 미 해군과 영국 해군 설계철학의 가장 나쁜 점만을 취사선택했다. 그러나 전쟁 전에는 이 점이 눈에 띄지 않았다. 일본 항공모함 설계자들은 영국 해군처럼 폐쇄 격납고를 선호했다. 하지만 일본 정규 항공모함 대부분은 적절한 수의 비행기대를 운용하기 위해 상부와 하부 격납고로 이루어진 복층식 격납고를 가졌다. 동력 환풍장치와 군데군데 있는 현창을 빼고 격납고는 외부와 차단되었다. 이로 인해 일본 해군은 격납고 안에서 비행기에 급유작업을 하면서도 시운전을 실시하지 않았다. 손상통제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러한 방식은 잠재적으로 매우 위험했다. 깡통 안에서 폭죽을 터뜨릴 때처럼 폐쇄공간에서 일어나는 폭발은 폭압을 증폭하는 효과가 있다. 일본 항공모함 격납고에서는 이런 현상이 발생하기 쉬웠다. 

  이 시기의 일본 해군 함선은 상부에 과도하게 몰린 무게와 [이로 인해 일어난] 안정성 문제에 자주 시달렸다. 더욱이 일본 항공모함은 복층 격납고로 인해 높이가 상당히 높았다. 복층 격납고 설계는 상부구조물의 무게를 최소한으로 유지해야 함을 뜻했으므로 영국이 채택한 장갑 비행갑판은 처음부터 논외 대상이었다. 서구인에게 허술해 보일 만큼 가로세로로 올린 지지대로 지탱하는 포좌와 구멍이 숭숭한 돌출부의 바닥 등은 모두 상부구조물의 무게를 줄이려는 시도였다. 요약하자면, 일본 항공모함은 구조적 관점에서 미덥지 못했고 전투손상을 감내하면서 기능을 유지할 대비를 갖추지 않았다. 아카기나 가가처럼 상대적으로 튼튼한 주력함의 선체 위에 건조되지 못한 히류와 소류는 이 취약점을 그대로 안고 있었다. 

  일본 해군도 이러한 취약성을 어느 정도 인지했다. 예를 들어 신형 쇼가쿠급의 설계에서는, 실제 설계 의도대로 작동하지는 않았지만, 폭발이 일어나면 바깥쪽으로 날아가 내부 발생 폭압을 배출하도록 설계된 격벽들이 격납고에 있었다. 근본적으로 일본 항공모함의 취약성은 일본 해군이 지나치게 공격에 치우친 태도를 취했다는 데에 기인한다. 일본 해군은 미 해군만큼이나 세력투사 개념을 열렬히 신봉했다. 그러나 방어를 경시한 설계철학 덕분에 일본 함선은 상대방 함선에 비해 손상에 몹시 취약했다. 이 약점들은 적에게 궤멸적 타격을 받고 나서야 상상을 초월할 만큼 끔찍한 민낯을 드러내게 된다. (364~367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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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0-01-24 19: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blueyonder 2020-01-24 20:19   좋아요 0 | URL
초딩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