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으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부분을 영문판과 비교하여, 오역 또는 오식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다음에 정리해 놓는다. 밑줄은 알아보기 쉽도록 추가한 것이다.
48페이지, 2. 기갑사단: “히틀러는 소련과의 전투를 위해 기갑사단의 수를 두 배로 늘렸다. 이를 위해 점령지의 비축량을 끌어오고 기존 전차를 3분의 1로 줄였는데 부족분은 품질을 상승시켜 상쇄하고자 했다.” --> “... 전차를 3분의 1 만큼 줄였는데 부족분은 품질을 상승시켜 상쇄하고자 했다.” 3분의 1로 줄인 것과 3분의 1 만큼 줄인 것은 큰 차이이다.
67페이지: “독일 해군은 ... 1930년대 들어 엄청난 전투력 강화와 현대화를 거쳤고, 덕분에 영국 해군과 정면 승부는 어려울지라도 끊임없는 위협(유보트, 위장레이더, 대형 군함의 간헐적 등장 등)을 가하거나 ...” --> “... 끊임없는 위협(유보트, 위장습격함, 대형 군함의 간헐적 등장 등)을 가하거나 ...” 위장레이더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다. 레이더라고 하면 radar가 생각난다. 원어는 camouflaged raider이다.
68페이지: “결국 산호해에 배치된 두 척의 항공모함은 그대로 무력화됐고(1942년 5월 4일~8일), 그 결과 기동부대의 전투력은 3분의 1로 줄어들고 말았다. 일본은 결국 네 척의 항공모함으로 미드웨이에 도착(1942년 6월 4~7일)했고, ...” --> “... 전투력은 3분의 1 만큼 줄어들고 말았다....” 앞과 마찬가지의 오류이다. 일본 기동부대의 항모 6척 중 2척이 무력화됐으니 남아 있는 항모는 4척이고 3분의 1 만큼 줄어든 것이다.
71페이지, 2. 무장친위대, 군대 안의 군대 ‘심각한 불균형’: “반나치주의 사단 혹은 ...” --> “대파르티잔 사단 ...” 대파르티잔의 원어는 anti-partisan이다. 무장친위대 안에 “반나치주의” 사단이 있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84페이지, 그래픽: “2,300대 + 1,450대 포위” --> “2,300대 + 노획당한 1,450대”
90페이지: “일본의 지휘관들은 보조 대형에 집착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었다.” --> “일본의 지휘관들은 부차적 기지에 집착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었다.
91페이지: “비록 독일의 유보트 함대만큼 제2차 세계대전의 전설적인 역사로 여겨지지는 않지만, 미국의 잠수함 부대인 ‘침묵의 함대’와 일본의 거대 잠수함인 가토급 잠수함 역시 태평양 전쟁에서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 “... 미국의 잠수함 부대인 ‘침묵의 함대’, 특히 대형 가토급 잠수함은 태평양 전쟁에서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가토(Gato) 급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해군의 주력 잠수함이다. ‘게이토’로 읽는 것이 좀 더 정확하다.
98페이지: “로스틴 에르빈 사령관” --> “에르빈 로스틴 대위”. 영문판에는 Commander로 나온다. 그의 독일해군 계급은 Kapitänleutnant이다. 찾아보면 대위 계급에 해당한다.
98페이지, “1942년 공격받은 호송선단...의 구성” 그래픽: “수송선 x 4척” --> “초계함 x 4척”. 초계함의 원어는 corvette이다.
102페이지: “1940년 이탈리아가 몰타 점령에 실패하면서 몰타섬에도 보급이 필요해졌다.” --> “1940년 이탈리아가 점령에 실패한 몰타섬에도 보급이 필요했다.” 번역문은 이탈리아의 몰타섬 점령 실패로 인해 몰타섬 보급이 필요해진 것 같은 오해를 낳는다.
102페이지: “독일의 롬멜 장군은 이탈리아 해군의 도움으로 필요한 보급량의 80%를 수송 받을 수 있었다.” --> “독일의 롬멜 장군은 보급량의 80%를 이탈리아 해군을 통해 수송 받았다.” 롬멜은 필요한 보급을 충분히 받지 못했으며 이로 인해 제대로 전투를 할 수 없었다. 만약 필요한 보급량의 80%를 (이탈리아 해군의 도움으로) 받았다면 보급을 비교적 잘 받은 것이다.
105페이지: “영국군은 이탈리아령인 리비아에서 1,000km를 진격하다가, 반대로 영국령인 이집트를 침공해 일주일간 전투를 치르고 결국 정복에 실패하고 돌아오던 독일-이탈리아 군과 마주하기도 했다.” --> “영국군은 리비아에서 1,000km를 진격하다가 독일-이탈리아 군에게 저지당했으며, 독일-이탈리아 군은 1주간의 전광석화 같은 습격 후 이집트에서 멈춰서고 말았다.” 번역문대로면 시간적 순서가 이상하다. 영국군의 리비아 진격 이후 독일-이탈리아 군이 반대로 영국군을 몰아내며 이집트로 진격했다.
105페이지: “그러므로 1942년 여름, 롬멜이 절망적인 진격을 계속 강행한 것은 적절한 선택이었다. 그것은 전략적 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유일한 방책이었다. 그러나 완전 돌파까지는 아직도 100만 km가 남아 있었다.” --> “... 그러나 완전 돌파까지는 약 100km가 모자랐다.” 100만 km는 지구와 달 사이 거리(약 38만 km)의 2.5배가 넘는 거리이다.
111페이지(스탈린그라드 전투): “수송 중 발생하는 피해는 끔찍하리만큼 컸지만 적군의 공격은 매번 볼가강에서 수백 km 떨어진 곳에서 저지되곤 했다.” --> “... 매번 볼가강에서 수백 m 떨어진 곳에서 저지되곤 했다.”
112페이지, 4. 공중 수송 작전: “Ju-52 수송기로 포위되어 있는 병사들에게 필요한 물자를 보급하려고 했지만 수송기를 대거 잃고도 결국 단 한 번도 수송에 성공하지 못했다.” --> “Ju-52 수송기로 포위되어 있는 병사들에게 필요한 물자를 보급하려고 했지만 수송기를 대거 잃고도 충분한 수송에 성공하지 못했다.”
115페이지, 2. 일본 함대의 예정된 최후: “남쪽에서는 미국 전함들이 수리가오 해협에 진입하고 있었다(2).” --> “남쪽에서는 미군 전함들이 수리가오 해협에서 일본 함대를 성공적으로 저지했다(2).”
124페이지: “1934년 5월, 처칠 총리는 미국 측에 튀니지를 발판 삼아 이탈리아로 진격하자는 제안을 했다.” --> “1943년 5월, 처칠 총리는 ...”
124페이지, 1. 파시즘의 몰락: “게다가 연이은 자연재해로 3년 만에 7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 “게다가 연이은 패배로 3년 동안 70만 명을 잃었다.” disaster라는 단어를 자연재해로 오해했다. 여기서는 큰 패배를 의미한다. 70만 명이 모두 목숨을 잃은 것이 아니라 사망, 부상, 포로로 손실된 것이다.
124페이지, 1. 파시즘의 몰락: “또한 생존율이 너무 낮다는 사실(러시아 전투는 4%, 동아프리카 전투는 0%)에 이탈리아 병사들은 충격을 받았고,...” --> “또한 생환율이 너무 낮다는 사실...” 4%, 0%는 살아남은 확률(생존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돌아온 확률(생환율)을 의미한다. 생존율이 0%라면 모두 사망했다는 말이다.
124페이지, 시칠리아 투입 병력 및 피해 그래픽: “미군 사단 6개 + 소련군 사단 5개” --> “미군 사단 6개 + 영국군 사단 5개”
127페이지: “9월 1일, 몽고메리가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에게 명령을 전달했을 때, ...” --> “몽고메리가 아이젠하워에게 지휘권을 넘겼을 때, ...” 아이젠하워가 유럽 서부전선 연합군 총사령관이었다.
129페이지, 3. 대가가 큰 전투: “독일 서부군은 대부분의 핵심 장비와 정예 병력을 잃었고, 국방군 역시 아무런 성과 없이 피해만을 입고 말았다.” --> “... 독일 공군 역시 아무런 성과 없이 피해만 입고 말았다.”
132페이지, 3. 결과: “1944년 여름 동안 독일이 겪은 전투들은 최악의 피해를 낳았다. 독일의 병력은 벨라루스에서만 40만 명이 감소했고, 28개 사단과 8개 군단의 지휘부만이 동부전선 독일군의 핵심축을 형성했다.” --> “... 벨라루스에서 손실된 40만 명, 28개 사단과 8개 군단의 지휘부는 동부전선 독일군의 핵심이었다.”
133페이지, 작전 순서 그래픽: “제1발틱” 밑의 “제3발틱” (빨간색) --> “제3벨라루스”
143페이지, 그래픽 한반도 위의 숫자: “6” --> “12”
146페이지: “일본의 민간 인명 피해는 약 100만 명으로 대부분이 미국이 투하한 원자폭탄으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나타난다.” --> “... 대부분이 미군의 공중 폭격으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나타난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인한 사망자는 최대 2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156페이지: “힘러가 가둔 강제수용소에서만 죽은 것이 아니라, 연합군에 의해 수용소에서 해방된 뒤 이어진 ‘죽음의 행진’에서 죽은 유대인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1945년에는 약 600만~1,150만 명의 유럽 유대인들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 “... 연합군에 의해 수용소가 해방되기 전 이어진 ‘죽음의 행진’에서 죽은 유대인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유럽 유대인 1,150만 명 중 600만 명 이상이 1945년까지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연합군이 진격해 옴에 따라 점령지 수용소의 유대인들을 독일 내로 옮기기 시작했는데 이 때 많은 유대인들이 사망했다고 한다. 이것이 ‘죽음의 행진’이다.
158페이지, 3. 우치 게토의 사례: “우치 게토는 1944년까지 남아 있었던 유일한 게토였는데, 나치는 이곳도 빠뜨리지 않고 거주 중인 유대인 7만 명을 가까운 헤움노 절멸수용소로 이송시켰고, 게토 주민들은 결국 가스트럭에 갇혀 학살됐다. 1943년 문을 닫은 헤움노 수용소는 1944년 우치에서 오는 7,000명의 유대인들을 학살하기 위해 잠시 문을 다시 열었다. 게토의 ‘수익성’에 실망한 나치친위대는 살아남은 5만 4,000명의 유대인을 아우슈비츠로 곧바로 보내기도 했다.” --> “1942년에 거주 유대인 7만 명을 헤움노 근처의 절멸수용소로 이송시켜 가스트럭에서 살해했음에도 우치 게토는 1944년까지 살아남았다. 헤움노 수용소는 1943년 문을 닫았다가 1944년 다시 문을 열어 7,000명의 우치 유대인들을 추가로 학살했다. 우치 게토의 ‘생산량’에 실망한 나치 친위대는 남아 있던 5만 4,000명의 유대인을 곧바로 아우슈비츠로 보냈다.”
167페이지, 2. 유고슬라비아의 저항 세력: “1944년 가을, 소련군이 이곳에 도달했고 추축국은 더 이상 북부 도시들에 대한 통치권을 잃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1945년 4월까지 멈추지 않았고 수많은 희생자들을 낳았다.” --> “1944년 가을, 소련군이 도착했을 때 추축국은 북쪽의 도시들만을 통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추축국은 1945년 4월까지 항복하지 않았으며 수많은 희생자들을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