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번역을 읽다가 이해가 되지 않아 옛 번역을 집어 들었다. 왜 옛 번역은 이해가 되는데 새 번역은 이해가 되지 않을까. 쉬운 번역을 추구하다가 본질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
하이젠베르크와 아인슈타인의 대화 부분(5장)이다. 아인슈타인의 양자역학에 대한 입장이 잘 드러나는 장이다. 하이젠베르크의 새로운 접근법(원자 내 전자 궤도를 기술하는 대신 전자 천이에 따른 방출 에너지와 진폭만을 기술)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의구심을 보여주고 있다. 관찰 가능한 양만을 가지고 이론을 구성했다는 하이젠베르크의 말에 아인슈타인은 이론이란 자연에 대한 우리 지식의 '경제적'(단순화된) 표현만이 아니라 자연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줘야 한다는 입장을 제시한다.
다음은 하이젠베르크가 구성한 대화 내용이다. 두 번역을 아래 위로 대조했다. 아인슈타인이 먼저 질문한다. (파란색은 새 번역, 보라색은 옛 번역이다.)
"당신이 소개한 내용은 범상치 않게 들려요. 당신은 원자 속에 전자가 있다고 보고 있어요. 그 점은 물론 옳겠지요. 하지만 원자 속의 전자궤도는 폐지하려고 해요. 전자궤도를 안개상자 속에서 직접 볼 수 있는데도 말이지요. 왜 그렇게 이상하게 보게 되었는지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겠어요?"
"당신이 토론회에서 우리들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비상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당신은 원자 안에 전자가 있다고 가정합니다. 그 점에서 당신은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전자의 궤도를 안개상자 안에서는 직접 볼 수 있다고 하는데, 당신은 전자의 궤도를 전적으로 무시하려고 하고 있읍니다. 당신은 이 기이한 가정의 근거를 좀더 정확하게 설명해 줄 수 없읍니까?"
하이젠베르크가 대답한다. (향후 밑줄은 의미가 모호한 부분을 나타내기 위해 내가 친 것이다. 해당되는 옛 번역은 굵은 글씨로 나타냈다.)
"원자 속 전자궤도는 관찰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원자를 방전시킬 때 원자에서 나오는 방사선을 통해 원자 속 전자들의 진동수와 진폭은 즉각적으로 알 수 있지요. 기존 물리학에서도 전체의 진동수와 진폭은 전자궤도를 대신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이론에는 무릇 관찰될 수 있는 양만을 받아들여야 하므로, 저는 전자궤도 대신에 이런 진동수와 진폭만을 도입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원자 안에 있는 전자의 궤도를 관찰할 수가 없읍니다. 그러나 放電과정에서 한 원자가 방사하는 輻射로부터 진동수와 원자내에 있는 전자의 진동수에 해당하는 振幅을 유도해 낼 수는 있읍니다. 진동수와 진폭 전체에 관한 지식은 지금까지도 물리학에 있어서 전자궤도의 지식에 대한 대용품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관찰 가능한 量들만을 한 이론에 받아들이는 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에 이 전체를 전자궤도의 대표로서 도입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괜찮다. 이제부터는 한 번역을 좀 더 많이 인용하겠다.
"하지만 당신은 정말로 물리학 이론에서 관찰 가능한 물리량만을 취할 수 있다고 보는 건 아니겠지요?" 아인슈타인이 말했다.
나는 놀라서 물었다.
"바로 선생님이 그런 생각을 상대성이론의 토대로 삼지 않으셨나요? 선생님은 절대시간은 관찰할 수 없으므로 절대시간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움직이는 계든 정지해 있는 계든 시계가 표시하는 것만이 시간 결정의 기준이 된다고요."
아인슈타인이 대답했다.
"그래요. 나는 그런 식의 철학을 활용했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에요. 좀 더 신중하게 말하자면 그런 철학은 정말로 관찰하고 있는 것에 대해 주목하도록 돕는 역할을 해요. 하지만 원리적으로 보면 관찰할 수 있는 크기만을 토대로 이론을 만들려고 하는 건 잘못된 거예요. 실제로는 정반대니까요. 사실은 이론이 비로소 무엇을 관찰할 수 있을지를 결정해요. 관찰은 일반적으로 아주 복합적인 과정이에요. 그러므로 관찰하고자 하는 현상이 비로소 우리의 측정 도구에 영향을 미쳐요. 그러면 그 결과로 이런 도구에서 계속적인 과정이 진행되고, 우회를 거쳐 우리의 의식 속에서 감각적 인상을 불러일으키고, 결과를 확인시켜 주지요.
우리 의식 속에 결과가 확정되기까지의 이런 긴 과정에서 우리는 자연이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알아야 해요. 우리가 뭔가를 관찰했다고 주장하려면 최소한 그와 관련된 자연법칙을 알아야 하지요. 따라서 이론, 즉 자연법칙을 아는 것만이 우리로 하여금 감각적 인상을 토대로 배후의 과정을 추론할 수 있게 해줘요. 따라서 뭔가를 관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이 기존의 자연법칙과 일치하지 않는 새로운 자연법칙을 정리해 내는 작업이라 해도, 관찰할 수 있는 과정에서 시작하여 의식에 이르는 길에서 기존의 자연법칙이 정확히 기능하여 우리가 그 법칙을 신뢰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관찰에 대해 이야기해도 된다는 의미예요.
상대성이론에서는 가령 움직이는 계에서도 시계로부터 관찰자의 눈에 이르는 광선이 충분히 전에 기대했던 대로 기능한다는 것을 전제로 해요. 당신의 이론에서도 마찬가지로 진동하는 원자로부터 스펙트럼 분석기 혹은 눈에 이르기까지 광선의 전 메커니즘이 정확히 예상했던 대로, 즉 기본적으로 맥스웰의 법칙대로 기능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죠.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당신이 관찰할 수 있다고 보았던 크기들을 더 이상 관찰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니까요. 따라서 관찰할 수 있는 크기만을 도입한다는 주장은 사실은 당신이 정리해내고자 하는 이론의 특성에 대한 추측이 들어간 거예요. 당신의 이론이 기존의 방사 과정에 대한 진술을 손상시키지 않을 거라고 상정하는 것이죠. 당신 생각은 옳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결코 확실한 것은 아니에요."
"그러나 관찰이 가능한 양만을 물리학의 이론에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진지하게 믿어서는 아니됩니다."
나는 놀라서 물었다.
"나는 선생님이 바로 이 생각을 선생님의 상대성이론의 기초로 삼으셨다고 생각하고 있는데요. 선생님께서는 사람들은 절대시간에 대해 말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셨읍니다. 그것은 사람들은 절대시간을 관측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運動系에서든지, 靜止系에서든지간에 다만 시계가 표시하는 시간만이 시간을 결정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읍니다."
아인시타인이 대답하였다.
"아마 나는 그런 철학을 이용했던 것 같읍니다. 그러나 그것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좀더 신중하게 표현해 보면, 실제로 관찰이 가능한 것을 생각해내는 것은 발견의 순서로서는 가치 있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원칙적인 관점에서 말한다면, 관찰할 수 있는 양만을 가지고 한 이론을 세우려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사실은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관찰할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이론입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관찰이란 일반적으로 매우 복잡한 과정입니다. 관찰되어야 할 현상은 우리들의 측정장치에서 어떤 사건을 야기시킵니다. 그 결과 장치 안에서 또 다른 현상이 발생하게 되고, 그것이 돌고 돌아서 결국은 感覺印象을 만들어내어 우리의 의식 안에 현상에서부터 우리의 의식 안에 그 결속을 정착시키게 됩니다. 정착되기까지의 이 전체적인 긴 과정에서 자연이 어떻게 기능하고 있느냐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관찰하였다고 주장하려면 우리는 적어도 자연법칙을 실질적인 면에서 알고 있지 않으면 아니됩니다. 따라서 이론, 즉 자연법칙에 대한 지식만이 감각인상을 통해서 그 바닥에 깔려 있는 현상에 관한 결론을 내릴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관찰할 수 있다고 주장할 때에는 좀더 정확하게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할 것입니다. 즉 우리가 지금까지의 것들과는 일치하지 않는 새로운 자연법칙을 정식화려고 준비하고 있을지라도, 관찰되어야 할 현상에서부터 우리의 의식까지의 과정에서는 지금까지의 자연법칙이 정확하게 작용하고 있으며, 따라서 종전의 자연법칙에 의지하여 관찰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허용되어 있다고 말입니다. 예를 들어 상대성이론에서도 運動系에 있어서 시계로부터 관찰자의 눈까지 이르는 광선은 이전의 이론으로 기대하였던 대로 정확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당신의 이론에 있어서도 당신은 진동하는 원자로부터 스펙트럼 장치에 이르는, 그리고 눈에 이르는 광선의 복사에 관한 모든 기구는 본질적으로 막스웰의 법칙에 따라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가 않다면 당신이 관찰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量은 전혀 관찰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관측이 가능한 양만을 도입한다는 당신의 주장은 사실은 당신이 정식화하려고 노력한 그 이론의 성격에 대한 하나의 추측인 것입니다. 당신의 이론은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그 시점에서 지금까지의 輻射現象의 기술을 손상하지 않는 것으로 상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서는 정당할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절대로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새 번역에서는 '양'을 '크기'로 번역하는 것이 눈에 띈다. '양'이 맞다고 본다. 하이젠베르크는 크게 놀랐다.
나는 아인슈타인의 논지를 명확히 이해했음에도 이런 생각에 대해 몹시 놀랐다. 그리하여 나는 이렇게 되물었다.
"물리학자이자 철학자인 마흐는 이론을 본래 사고의 경제성이라는 원리 아래 관찰을 종합하는 것일 뿐이라고 했다고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이런 마흐의 생각을 상대성이론에서 결정적으로 활용했다고 알고 있고요. 그런데 선생님이 지금 말한 내용은 그와는 정반대로 들립니다. 제가 이제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아니 선생님은 이 부분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야기하자면 길어요. 하지만 좀 자세히 이야기해 봅시다. 마흐의 사고의 경제성에 대한 개념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어요. 하지만 그 개념은 내겐 너무 진부해요. 우선 마흐의 생각을 몇 가지 열거해 볼게요. 우리가 세계를 다루는 것은 우리의 감각을 통해서 이루어져요. 어렸을 때 언어와 사고를 배울 때도 그렇게 되죠. 복잡하지만 서로 연결된 감각적 인상들을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알게 되는 거예요. 가령 '공'이라는 단어 같은 것으로 말이에요. 아이들은 어른들로부터 이런 방식을 배우고 그러면서 행복해해요. 의사소통이 가능해지니까요. 따라서 단어, 즉 '공'이라는 개념의 형성은 경제적인 사고 행위라고 말할 수 있어요. 복잡한 감각적 인상을 단순히 통합할 수 있도록 하니까요.
마흐는 여기서 의사소통이 가능하기 위해 인간에게--여기서는 어린아이에게--어떤 정신적 신체적 전제가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아요. 알다시피 동물은 인간에 비해 의사소통 능력이 훨씬 떨어져요. 하지만 그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겠죠. 마흐는 자연과학 이론의--아주 복잡한 이론의 경우에--형성도 기본적으로 비슷하다는 생각이에요. 우리는 현상들을 통합적으로 정리하고, 그것들을 단순한 것으로 환원시키려 한다는 거죠. 몇몇 개념의 도움으로 아주 다양한 현상들을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말이에요. '이해한다'는 말은 단순한 개념들로 다양한 현상들을 포착할 수 있다는 말인 셈이죠. 이 모든 논지는 설득력 있게 들려요. 하지만 '사고의 경제성'이라는 원리가 여기서 과연 무슨 의미인지를 물어야 해요. 그것이 심리적 경제성인지, 아니면 논리적 경제성인지, 달리 말하자면 현상의 주관적 측면이 문제인지, 아니면 객관적 측면이 문제인지를 말이에요.
아이가 '공'이라는 개념을 갖게 된다는 것은 복잡한 감각적 인상들을 이런 개념으로 통합하면서 단지 심리적인 단순화에 도달한다는 이야기일까요? 아니면 정말로 공이 존재하는 것일까요? 마흐는 아마, '공이 정말로 있다'라는 문장은 그와 관련된 감각적 인상들을 쉽게 통합할 수 있는 말일 따름이다, 라고 대답할 거예요. 하지만 여기서 마흐는 틀렸어요. 첫째 '공이 정말로 있다'는 문장은 미래에 주어지는 감각적 인상에 대한 발언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죠. 가능한 것, 즉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현실의 중요한 구성 요소예요. 이를 간과해서는 안 되지요. 둘째, 감각적 인상들을 표상이나 사물로 추론하는 것이 바로 사고의 기본 전제라는 점을 생각해야 해요. 따라서 감각적 인상에 대해서만 말하고자 한다면, 언어나 사고는 단념해야 하는 거죠. 다른 말로 하면, 마흐는 세상이 진짜로 있다, 우리의 감각적 인상의 배후에 뭔가 객관적인 것이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어요.
나는 단시 소박한 실재론을 옹호하려는 게 아니에요. 이것이 아주 어려운 질문이라는 걸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나는 마흐가 생각하는 '관찰'이라는 개념은 너무 순진하다고 생각해요. 마흐는 '관찰'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행동해요. 마흐는 여기서는 '객관과 주관'을 따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의 철학이 사고의 경제성이라는 의심스러운 상업적 특성을 가지게 된 거죠. 이런 개념에는 상당히 주관적인 색채가 들어 있어요. 사실 자연법칙이 단순하다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기도 해요. 그러므로 적절한 개념을 만들려면 이렇듯 단순함의 주관적인 측면과 객관적인 측면이 적절히 균형을 이루게 하는 것이 중요할 거예요. 물론 어렵겠지만요.
자 이쯤에서 당신 강연의 주제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내 생각에 당신은 나중에 우리가 지금 이야기한 이런 부분에서 어려움을 겪게 될 것 같아요.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볼게요. 당신은 관찰과 관련하여 모든 것을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해요. 즉 관찰한 것에 대해 기존 물리학의 언어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처럼요. 하지만 그러면 당신은 안개상자에서 상자를 통과하는 전자궤도를 관찰할 수 있다고 말해야 해요. 그러나 당신은 원자 내부에서는 전자궤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지요. 이것은 사실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전자가 그 안에서 움직이는 공간이 줄어든다고 해서 궤도 개념이 무효화될 수는 없잖아요."
아인시타인의 논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으나 그의 그같은 태도는 내게는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되물었다.
"한 이론이란 본래적으로 思惟經濟의 원칙 밑에서의 관찰의 총괄에 불과하다는 생각은 물리학자이며 철학자인 마하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상대성이론은 바로 이 마하의 생각을 결정적으로 사용한 것이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이 되풀이하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지금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에 따르면 전혀 반대가 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도대체 무엇을 믿어야 좋을지 분간이 서지 않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 점에 관해서 무엇을 믿고 계시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이야기가 좀 길어지더라도 자세히 이야기해 봅시다. 마하에 의한 思惟經濟 개념은 진리의 일부를 포함하고 있기는 하지만 나에게는 너무나 진부한 것입니다. 우선 마하에 관해서 몇 가지 논증을 펴보십시다. 우리들은 분명히 감각을 통해서 세계를 우리가 어려서 말하고 생각하는 것을 배울 때, 매우 복잡하기는 하지만 어떻게든지 관련성 있는 하나의 감각인상을 하나의 말, 예컨대 '공'이라는 말을 통해 표현하는 가능성을 인식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아이들은 그것을 어른들에게서 배우고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면 만족감을 느낍니다. 말의 형성과 그 말에 의한 '공'이라는 개념의 형성은 상당히 복잡한 감각인상을 간단하게 총괄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그것을 일종의 思惟經濟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마하는 의사소통이라는 과정이 시작되기까지 어떠한 정신적 육체적인 전제들이 주어져야--여기서는 어린이에게--하는가에 대한 물음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마하는 자연과학적인 이론들--경우에 따라서 매우 복잡한 이론들에게서도--의 형성도 근본적으로는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고 있읍니다. 우리들은 현상들을 통일적으로 질서 짓고, 또 몇몇 작은 개념들의 도움으로 굉장히 내용이 풍부한 집단현상을 이해할 수 있게 될 때까지 그 현상을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간단한 것으로 소급시키려고 시도합니다. 이때 '이해'라는 것은 이같이 단순한 개념을 가지고 그 다양성을 파악한다는 것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아주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사람들은 여기서 이 사유경제의 원리가 원칙적으로 어떻게 생각되고 있느냐에 대한 의문을 제기해야 할 것입니다. 즉 심리적인 경제가 문제가 되는가, 논리적 경제가 문제되는가, 아니면 문제가 되는 것이 현상의 주관적 측면인가, 객관적인 측면인가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어린이가 '공'이란 개념을 형성할 때 복잡한 감각인상들이 이 개념을 통해 총괄됨으로써 심리학적으로 하나의 단순화가 이루어진 탓인가, 혹은 실제로 공이 존재하는 것인가? 마하는 아마도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입니다. '공이 존재한다는 명제는 간단하게 총괄할 수 있는 감각인상의 주장 이상의 것은 아무것도 포함하지 않는다'고.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첫째, '공이 실재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는 미래에 나타날 수도 있는 감각인상에 관한 많은 진술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능한 것, 기대될 수 있는 것은 실재적인 것과 더불어 간단히 망각돼선 안되는 현실의 중요한 성분입니다. 둘째로, 감각인상으로부터 표상과 사물들을 추론하는 것은 우리의 사고의 기본적 전제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감각인상에 대해서만 말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언어와 사고를 단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말을 바꾸면 마하는 세계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의 감각인상은 어느 정도 객관적인 것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간단히 취급하고 있읍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소박한 實在論을 변호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좀 어려운 문제들을 취급하고 있다고 생각되기는 합니다만 여하튼 마하의 관찰개념은 지나치게 소박하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마하는 마치 사람들이 ‘관찰’이란 말의 의미를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사용하고 있읍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주관적이냐 또는 객관적이냐’하는 결정을 피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의 단순성의 개념은 대단히 의심스러운 상업적 성격을 띤 사유경제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개념은 너무나 지나치게 주관적입니다. 실제로 자연법칙의 단순성은 객관적인 사실이기도 하며, 올바른 개념구성에 있어서는 단순성의 주관적인 측면과 객관적인 측면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어려운 점이기도 합니다. 여하튼 다시 당신의 강연의 주제로 돌아가 봅시다. 나는 지금 우리가 서로 이야기한 그 시점에서 당신의 이론이 후에 난관에 봉착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읍니다. 그 이유를 좀 더 정확하게 말해 보지요. 당신은 당신의 관찰의 측면에서 모든 것을 지금까지의 상태대로 둘 수 있는 것처럼, 즉 물리학자가 관측하는 것을 지금까지의 언어로 말할 수 있는 것같이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다음과 같이 말했어야 했을 것입니다. 즉 우리는 안개상자 안에서의 전자의 궤도를 그 상자를 통해서 관찰할 수 있다. 그러나 원자 안에서는 전자의 궤도는 더 이상 존재해서는 안된다라고. 그것은 분명히 어불성설입니다. 단순히 전자가 움직이고 있는 공간을 축소하였다고 해서 궤도개념이 폐지될 수는 없는 일이 아닙니까?"
왜 난 옛 번역이 더 이해가 잘 될까. 실재를 중요시하는 아인슈타인의 입장이 옛 번역에서는 명확히 나타나지만 새 번역은 뭔가 모호하다. 예를 들어, '적절한 개념을 만들려면 이렇듯 단순함의 주관적인 측면과 객관적인 측면이 적절히 균형을 이루게 하는 것이 중요할 거예요.'보다는 '올바른 개념구성에 있어서는 단순성의 주관적인 측면과 객관적인 측면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가 나에게는 더 명확하게 느껴진다. 한자어를 우리말로 풀어쓰기만 한다고 읽기 쉬운 번역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몇 장 더 읽어보기는 하겠지만) 아마 새 번역 읽기를 포기할 것 같다. 만약 나처럼 새 번역이 오히려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이 많다면, 구판이 절판된 현재 이건 정말 큰 손실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