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은 전쟁의 참혹함을 적으며 책을 시작한다. 이순신은 정유년(1597년) 4월, 서울 의금부에서 풀려났다. 조정을 능멸했다는 죄목으로 억울한 문초를 당하며 옥살이를 한 후였다. 부산 앞바다에서 기다리며 바다를 건너 넘어오는 왜군을 물리치라는 이치에 맞지 않는 명령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대목은 간단히 “그들은 헛것을 정밀하게 짜 맞추어 충(忠)과 의(義)의 구조물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바다의 사실에 입각해 있지 않았다.”라고 간단히 언급된다. 


전쟁이 길어지며 백성들은 참혹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승전의 증거로 왜군은 코를 베었고 조선 수군은 머리를 잘랐다. 왜군은 아녀자까지 죽이고 코를 잘랐으며, 조선 수군은 죽은 아군의 머리도 잘랐다. 굶주린 백성들은 아이를 죽여 그 고기를 먹기도 했다. 이순신은 옥에서 풀려나 상한 몸을 추스르며 남쪽 순천의 권율에게 도착해 백의종군을 신고한다. 


봄에 피어나는 꽃의 향기와 송장 썩는 냄새가 섞인 바람 속에서, 이순신은 전쟁과 삶의 무의미에 대해 생각한다. “이 끝없는 전쟁은 결국은 무의미한 장난이며, 이 세계도 마침내 무의미한 곳인가. 내 몸의 깊은 곳에서, 아마도 내가 알 수 없는 뼛속의 심연에서, 징징징, 칼이 울어대는 울음이 들리는 듯했다.” 무장인 이순신의 마음속에서 칼이 운다. 


외롭거나 힘들 때면 왠지 <칼의 노래>를 읽고 싶어진다. 소설 속 이순신의 마음은 김훈이 현대적으로 해석한 것일진대, 그럼에도 당시의 상황을 짚어보며 지금의 처지는 훨씬 나은 것이 아니냐는 위로를 받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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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eginning of Infinity: Explanations That Transform the World (Paperback) - 『진리는 바뀔 수도 있습니다』 원서
David Deutsch / Penguin Group USA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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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progress란 이해의 범위가 넓어지거나 새로운 이해를 얻는 것이며 창의성과 자유로운 비판이 핵심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 기반에는 이성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책의 제목은 이러한 이해를 통한 지식의 창조가 끝없이 계속되리라는 저자의 믿음을 나타낸다. 저자가 말하듯 이는 완전한 낙관주의이다. 납득이 되는 주장도 많았지만—예컨대 경험주의 비판과 과학 이론의 임시성—저자의 끝없는 낙관주의적 믿음과 이성에 대한 전폭적 신뢰에 100퍼센트 동의하지는 못하겠다. 그는 이러한 태도를 비관주의라고 비판할 것이다. 


읽으면서 계속 드는 생각이, 그는 정말 이성주의를 지나칠 만큼 끝까지 밀고 간다. 이성을 전폭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면 또는 이성의 적용범위를 제한하면 비이성주의자가 되는 것인가? 저자와 달리 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진보 또는 좁게 말해서 과학의 발전이 끝이 없으리라는 저자의 주장도 희망일 뿐이다. 근원물리학 분야만 해도 문제가 무엇인지는 누구나 알지만 아직도 제대로 된 해결의 실마리를 못 찾고 있다. 언젠가는 해결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20세기 초와 같은 거대한 전환이 또 올지 확신할 수는 없다. 


저자는 지속가능성을 얘기하면서 진보의 억제가 아니라 진보 자체가 바로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진보란 늘 새로운 문제의 발생을 야기하며 이러한 문제를 지속적으로 끝없이 해결하는 것이 바로 저자가 얘기하는 ‘무한의 시작’의 모습이다. 저자에게는 세상에 대한 모든 이해가 ‘선’이다. 지구나 우주의 물리적 한계는 저자에게 큰 의미를 갖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작금의 기후위기에 대해서도, 저자는 발전 속도를 억제해서 문제를 늦추거나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지식으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본다. 발전은 중단 없이 지속되어야 하고 이를 통해 부를 계속 쌓아서 새로운 지식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지구가 망가지는 속도를 새로운 지식이 감당할 수 없다면? 많은 기후학자들이 걱정하듯 어느 순간 이후에는 되돌릴 수 없다면? 


저자는 인간의 욕심이나 감정과 같은 측면에는 놀랄 만큼 무심하다. 그에게 인간의 의미란 보편적 지식의 창조자 외에는 없는 듯싶다. 그의 주장을 좀 더 곱씹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글을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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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6-08-28 18: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관심있는 주제라서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혹시 근원물리학이 무엇인지요?

blueyonder 2026-08-28 19:08   좋아요 1 | URL
‘근원물리학‘은 fundamental physics를 제가 번역해서 쓴 말입니다. 다른 책을 보면 ˝기초물리학˝으로도 많이 번역하던군요. ˝기초˝가 뭔가 basic의 뜻으로 오해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저는 ‘근원‘이라고 했습니다. 보통, 입자물리학, 우주론 등을 fundamental physics라고 합니다.

북다이제스터 2026-08-28 19:10   좋아요 1 | URL
말씀 감사합니다. 전 근원물리학을 물리학의 기본인 전자기학, 질량보존의 법칙 등을 연상했는데 오히려 최첨단(?) 물리학이네요. 감사합니다. ^^

blueyonder 2026-08-28 19:39   좋아요 1 | URL
네 최첨단 물리학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
 















  I doubt that either Lagrange or Michelson thought of himself as pessimistic. Yet their prophecies entailed the dismal decree that no matter what you do, you will understand no further. It so happens that both of them had made discoveries which could have led them to the very progress whose possibility they denied. They should have been seeking that progress, should they not? But almost no one is creative in fields in which they are pessimistic. (p. 446)


  나는 라그랑주나 마이컬슨이 비관론적인 생각을 가졌던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그러나 그들의 예언은 무엇을 해도 더 이상의 이해는 불가능하다는 우울한 판결을 수반했다.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이 가능성을 부정했던 바로 그 진보로 나아갈 수 있었을 발견을 한 것은 정말로 우연이었다. 그들은 당연히 그런 진보를 추구하고 있었어야 했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자신들이 비관적으로 여기는 분야에서 창조적인 사람은 거의 없다. (615 페이지, 밑줄 추가)


밑줄 친 부분은 원문을 반대의 뜻으로 번역. "I doubt that ~"은 that 이하가 아니라고 생각(의심)한다는 뜻이다. "I suspect that ~"과는 반대의 뜻이다. 역자는 "doubt"를 "suspect"처럼 생각하여 번역했다.


"나는 라그랑주나 마이컬슨이 자신들을 비관주의자라고 여겼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의 예언은 더 이상의 이해는 불가능하다는 암울한 선언과 다름 없었다. 공교롭게도 이들 둘은 자신들이 부정했던 그 진보를 이룰 수 있었던 발견을 했다. 그들은 이러한 진보를 추구했어야만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비관주의적 태도를 가지고 있는 분야에서는 그 누구도 창의적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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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have often thought that the nature of science would be better understood if we called theories 'misconceptions' from the outset, instead of only after we have discovered their successors. Thus we could say that Einstein's Misconception of Gravity was an improvement on Newton's Misconception, which was an improvement on Kepler's. The neo-Darwinian Misconception of Evolution is an improvement on Darwin's Misconception, and his on Lamarck's. If people thought of it like that, perhaps no one would need to be reminded that science claims neither infallibility nor finality. (p. 446)


"한 이론의 후계자를 발견한 이후부터가 아니라 처음부터 이론을 '오개념'이라고 부른다면 과학의 본질이 좀 더 잘 이해되리라고 종종 생각하곤 했다. 그러므로 아인슈타인의 중력 오개념은 뉴턴의 오개념을 개선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뉴턴의 오개념은 케플러의 오개념을 개선했다. 신다윈주의 진화 오개념은 다윈의 오개념을 개선했으며 다윈의 오개념은 라마르크의 오개념을 개선했다.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과학이 무오류나 최종성을 주장하지 않음을 계속 상기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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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의 성모 성당 옆 조형물 글귀와 접시 위의 불꽃은 스페인이 아직도 하나의 공동체가 되지 못했음을 증명한다. 민족은 기억의 공동체인 동시에 망각의 공동체다. 인류는 오랜 세월에 걸쳐 작은 부족 집단에서 거대한 국민국가로 공동체의 규모를 확장해 왔다. 그 과정에서 매번 전쟁을 벌였고 대규모 살상을 저질렀으며 승자가 패자를 힘으로 무릎 꿇렸다. 민중이 과거에 대한 기억을 지우고 새로운 공동의 기억을 만들어야 더 큰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은 고구려 백제.신라가 벌였던 정복 전쟁의 기억을 지우고 중국과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운 공동의 기억을 새롭게 형성했다. 남북 두 국가를 언젠가 하나의 공동체로 다시 통합하려면 한국전쟁에서 저질렀던 살상 행위에 대한 기억을 지우는 과정을 반드시 밟아야 할 것이다. (130~131 페이지)

  무엇이 그런 차이를 만들었을까? 한국은 오래된 민족국가로 언어와 문화 등 모든 면에서 균질성이 높아 국민의 집단적 의지를 모으는 데 유리했다든가, 한글과 높은 교육열 덕분에 과학혁명과 지식정보화 혁명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든가, 냉전 시대를 상징하는 분단국가로서 체제 경쟁에서 북한을 이기려고 있는 힘을 다했다든가 하는 인문학적 설명과 해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역사에서 우연이라는 요소를 배제할 수는 없다. 개인의 삶도 사회의 역사도 필연적 법칙이나 인과관계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나는 한국이 상대적으로 운이 좋았고, 포르투갈은 특별히 불운했다고 생각한다. 살라자르가 저개발로 공산주의를 막을 수 있다는 기괴한 망상에 빠진 독재자가 아니었다면 포르투갈은 무척 다른 사회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220 페이지)

  엔히끄 왕자는 포르투갈의 역사 영웅이지만 문명사의 관점에서 보면 인류에 대한 범죄를 저지른 악당이다. 아프리카 원주민을 납치해 아조레스와 마데이라 제도의 사탕수수 농장에 투입한 일과 최초의 노예 매매 시장이 생긴 것이 그와 관련이 있다. 칙명을 내려 포르투갈 왕에게 이교도를 노예로 삼을 권리를 부여한 가톨릭 교황청의 잘못도 크지만 직접 책임은 엔히끄에게 물어야 맞을 것이다. (266 페이지)

  그때는 인류 문명의 전환기였다. 유럽에서는 종교 권력과 세속 권력이 손잡고 민중을 지배했던 중세가 막을 내렸다. 과학기술 혁명의 문이 열렸고 새로운 산업이 등장했으며 새로운 계급이 나타나 낡은 군주정의 토대를 흔들었다. 신무기와 강력한 군대를 가진 유럽의 국가들은 지구 표면의 땅을 남김없이 정복하려고 나섰다. 21세기 문명의 보편적 질서가 된 공화정과 국민국가와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부국강병(富國强兵)'을 목표로 설정한 유럽의 권력자들은 책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다. 신과 교황이 아니라 새로운 지식과 기술이 더 큰 부와 더 위력적인 무기와 더 강력한 권력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교회를 짓던 돈으로 도서관을 만들었다. 성서를 제작하던 정성으로 책을 모았다. 구원을 기도했던 절박함으로 교육과 학문 연구를 진흥했다. 신학을 과학으로 대체하고 책을 신의 자리에 올린 것이다. 주앙 5세도 그런 왕이었으니 도서관에 이름이 남을 자격이 충분하지 않겠는가. (286~287 페이지)

  낚시는 고기가 잘 낚이면 재미있다. 지루해할 틈이 없다. 하지만 잘 낚이지 않으면? 그래도 재미있다. 지루하지 않다. 시간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간다. 수면 아래 물고기의 움직임을 상상하면서, 왜 물지 않는지 생각하면서, 몇 초 후에 찌를 올릴지 모른다고 기대하면서 수면에 시선을 고정한다.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고기 생각 말고는 아무 생각 없다. 세상사든 개인사든 복잡하고 어려운 일은 다 잊는다. 머릿속을 싹 비운다. 하룻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면 머리가 개운해서 글이 잘 써진다. 남들은 어떤지 모르겠고, 나는 그렇다. (292 페이지)

  여행지에서 무엇을 하는 게 좋은지는 각자의 취향에 달렸다.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객관적으로 더 고상하다든가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다. 책과 서점이 특별한 의미를 가진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책이 총포와 같았던' 시대는 지나갔다. 총포처럼 위력 있는 것은 새롭고 유용한 지식과 정보이지 문자 텍스트를 인쇄한 종이책이 아니다. 세상은 인터넷과 검색엔진의 시대를 지나 인공지능 시대에 들어섰다. 책은 지성의 상징이 아니며 숭배할 대상 또한 아니다. 책을 쓰는 일로 세상과 관계를 맺고 살아온 나는 책을 전성기가 지난 전통 미디어로 여긴다. 서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낯선 도시를 여행할 때는 통념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따르는 것이 좋다. (307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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