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번역본, 영국판, 그리고 미국판]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Reality Is Not What It Seems>는 <모든 순간의 물리학Seven Brief Lessons on Physics>을 쓴 카를로 로벨리의 신작이다. 실제로는 <모든 순간의 물리학>보다 먼저 쓰여졌는데, <모든 순간의 물리학>이 유명해지고 난 후 영미권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 로벨리는 <모든 순간의 물리학>에서 논의되었던 내용들을 좀 더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로벨리와 그의 글에 대해서는 아마존에 있는 다음의 2개 평이 매우 잘 요약하고 있다.
“Some physicists, mind you, not many of them, are physicist-poets. They see the world or, more adequately, physical reality, as a lyrical narrative written in some hidden code that the human mind can decipher. Carlo Rovelli, the Italian physicist and author, is one of them...Rovelli's book is a gem. It's a pleasure to read, full of wonderful analogies and imagery and, last but not least, a celebration of the human spirit.”—NPR Cosmos & Culture
“If your desire to be awestruck by the universe we inhabit needs refreshing, theoretical physicist Carlo Rovelli...is up to the task.”—Elle
이 페이퍼에서는 번역본의 제목에 대해 지적하고 싶다. "Reality Is Not What It Seems"를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라고 번역했다. 얼핏 보면 단순한 직역 같지만 오해의 소지가 많은 제목이다. '보이는 세상이 실재가 아니라면 그럼 환상이라는 얘기인가'하는 생각부터 먼저 든다. 하지만 결코 그것이 로벨리의 의도가 아니라고 얘기할 수 있다.
이 제목의 첫 번째 문제는 주어부와 술어부를 뒤바꾼 것이다. 원래는 '실재(reality)는 ...가 아니다'인데 이것을 '...는 실재가 아니다'로 바꾸었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큰 문제 없어 보이기도 한다. A가 B가 아니면 당연히 B는 A가 아니니까. 마치 '사람은 고양이가 아니다'나 '고양이는 사람이 아니다'처럼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A는 B가 아니다'에서의 초점은 A인 반면, 'B는 A가 아니다'에서의 초점은 B이다. 이 단순한 차이가 의미의 왜곡을 가져올 수 있다. '인간은 값을 매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라는 문장을 생각해 보자. 충분히 납득하고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이다. 만약 이 문장의 주어부와 술어부를 뒤바꾸면? '값을 매길 수 있는 존재는 인간이 아니다'가 된다. 뒤의 문장이 앞의 문장과 동일한 뜻을 전달하는가? 뒷 문장의 초점은 '값을 매길 수 있는 존재'이며 그것이 인간이 아니라는 말이다. 특히 문장이 부정문일 때 그럼 긍정문은 뭘까 생각하게 된다. 'A는 B가 아니다. 그러면 A는 뭐란 말인가?'가 일반적인 반응이다. 그러니 '보이는 세상이 실재가 아니라면 환상이란 말인가?'란 반응이 나오는 것이다. 단순히 주어부와 술어부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원래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의 심대한 왜곡을 발생시킬 수 있다.
두 번째 문제는 "what it seems" 부분이다. "보이는 세상"이라고 번역했는데 직역하면 '보이는 것'일 터이다. "것"을 피하고자 아마 "세상"을 쓴 것 같은데 이게 어찌 보면 문제의 시발점인지 모르겠다. '실재는 보이는 세상이 아니다'라고 놓으면 말이 안돼 보이는 것이다. 사전적 의미로 볼 때 실재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물리학자가 '실재(reality)'라고 말할 때는 보통 '물질 세계'를 의미한다. 실재(물질 세계)가 보이는 세상이 아니라면 그럼 안 보이는 세상이란 말인가, 이거 뭔가 이상하다... 그래서 주어부와 술어부를 뒤바꿔 놓으면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가 된다. 이건 뭔가 있어 보인다. 그럼 보이는 세상은 허상, 환상이란 불교적 생각도 들고...
로벨리의 의도를 살리자면 이런 식으로 번역해야 한다: 실재는 겉보기와는 다르다. 또는 세상은 보이는 바와 다르다. 물리학자에겐 실재 = 세상(물질 세계)이다. 왜 로벨리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인가.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이 자연을 연구하면 할수록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상식을 거스르는 상대성이론, 양자역학을 이용해야만 자연을, 세상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은 겉보기와는 다른 것이다. 저자의 이러한 생각은 서문의 마지막 문장에 요약되어 있다. 이 책이 여행 책이라고 하면서 이 여행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A magic journey out of our commonsense view of things, far from complete."
사물에 대한 우리의 상식적 관점을 떨쳐내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마법과 같은 여행.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란 제목은 저자의 의도에서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가?